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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다음 날 아침, 나는 평소보다 이십 분이나 일찍 집을 나섰다. 밤새 뒤척이다 겨우 잠들었던 탓에 눈꺼풀은 뻑뻑했고 관자놀이 부근이 지끈거렸는데, 씻는 내내 세면대 거울 속 내 얼굴이 유난히 창백해 보여서 나는 몇 번이나 뺨을 두드리며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어제 부실에서 목격했던 그 장면이, 아니 정확히는 그 장면을 보고 굳어버린 내 표정을 윤서아가 발견했던 그 순간이 자꾸만 눈앞에서 재생되었고, 그럴 때마다 위장이 조여드는 느낌에 아침을 거의 넘기지 못했다. 등굣길 내내 나는 윤서아가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온갖 시나리오를 그려보며 걸음을 옮겼다. 소문을 퍼뜨리지 말라고 다시 한번 확인만 하려는 건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건가. 어쩌면 아예 처음부터 나를 어딘가로 끌어들이려는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이 꼬리를 물수록 발걸음이 무거워졌고, 결국 나는 교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서서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해야 했다. 도대체 뭘 원하는 걸까.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미 최악의 상황들을 그리고 있었다.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습관처럼 창가 쪽 맨 뒷자리, 내 지정석 같은 그 구석으로 향했는데, 자리에 앉기도 전에 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태윤." 돌아보니 윤서아가 팔짱을 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반 아이들 몇몇이 이미 등교해 있었지만 다들 자기들끼리 대화에 정신이 없었고, 삼삼오오 모여 휴대폰을 들여다보거나 어제 있었던 축구 경기 얘기를 나누는 소리가 교실을 채우고 있었다. 그녀는 그 소음의 틈을 노려 다가온 듯 목소리를 낮춘 채였는데, 그 낮은 음성이 오히려 더 위협적으로 느껴져서 나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점심시간에 옥상으로 와." 명령이라기보다는 통보에 가까운 말투였다. 반문할 틈도, 거절할 여지도 주지 않는 그 단호함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 순간에도 심장이 저 혼자 요란하게 뛰는 걸 느끼며, 이 상황이 어디로 향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불안감에 손끝이 차갑게 식어갔다. 윤서아는 더 이상의 말도 없이 등을 돌려 자기 자리로 돌아갔고, 나는 한참을 그 뒷모습만 바라보다가 겨우 자리에 앉았다. 오전 수업 시간 내내 나는 칠판을 보는 척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옥상에서 벌어질 대화를 수십 번 미리 그려보았다. 시계 초침이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것 같았고, 쉬는 시간마다 반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조차 멀게만 느껴졌다. 점심시간, 나는 도시락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옥상으로 향했다.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무겁게 느껴졌고, 옥상 문의 손잡이를 잡는 순간에도 손바닥에 땀이 배어났다. 문을 열자 이미 그곳에 윤서아가 난간에 팔을 걸친 채 서 있었는데, 바람이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모습이 어딘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여서 나는 잠깐 넋을 놓았다가 이내 정신을 차렸다. 지금 이런 걸 감상할 때가 아니었다. "왔네." 그녀가 몸을 돌리며 짧게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그녀를 마주 보고 서 있었는데, 그녀는 잠시 나를 훑어보더니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그 시선이 마치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계산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나는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어제 일, 계속 비밀로 해줄 거지?" "당연하지. 나는 진짜 아무한테도…" "그럼 부탁 하나 들어줘." 말이 뚝 잘리는 그 방식이 마치 협상 테이블에 앉은 사람처럼 능숙해서,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부탁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무겁게 다가온 적은 처음이었다. "부탁… 이라니?" 조심스레 되묻자 윤서아는 한숨을 짧게 내쉬고는 난간에 등을 기댔다. 그 표정에서 나는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에 그늘이 스치는 걸 보았다. 평소 교실에서 보던, 늘 여유롭고 당당한 모습과는 사뭇 다른 얼굴이었다. "나 좋아하는 사람 있거든."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나는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열 가지쯤 상상해봤지만, 이런 방향은 단 한 번도 떠올리지 못했다. 옥상 위로 스치는 바람 소리만이 침묵을 채웠고, 나는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서…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네가 도와줘야지. 그 사람 옆으로 갈 수 있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내가 왜, 어떻게, 애초에 나 같은 아싸가 그런 일에 무슨 도움이 된다고. 온갖 반문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그녀의 눈빛이 워낙 단호해서 나는 감히 반박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 사람이 누군데?" 결국 나는 가장 궁금한 질문을 던졌다. 윤서아는 잠시 시선을 돌려 운동장 쪽을 바라보았는데, 그 시선이 향한 곳에는 마침 체육복을 입은 남학생 무리가 축구를 하고 있었다. 그중 유난히 눈에 띄는 한 명이 있었다. 큰 키, 시원한 이목구비, 공을 다루는 발놀림까지 어딘가 여유로워 보이는 그 남자애를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공을 몰고 상대편 사이를 가르며 달릴 때마다 운동장 여기저기서 작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한도현. 반 남자애들 중에서도 압도적인 인기를 자랑하는, 축구부 주력 선수이자 여자애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그 이름을 나는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이 알아챘다. 같은 반이지만 나와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대화를 나눠본 적 없는, 그런 존재였다. "한도현." 내가 그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자 윤서아의 표정이 살짝 붉어졌다. 처음으로 본 그녀의 인간적인 모습이었는데, 그 순간만큼은 계산적인 눈빛 대신 진짜 소녀 같은 감정이 스치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맞아. 근데 나 고백했다가 완전히 까였거든." 그 말을 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나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냥 침묵을 지켰는데, 그녀는 곧바로 표정을 다시 굳히며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순간의 냉정한 표정 전환이 어찌나 빠르던지, 방금 본 붉어진 얼굴이 착각이었나 싶을 정도였다. "근데 나 아직 포기 안 했어. 그래서 네가 필요해." "내가… 뭘 어떻게 도와줄 수 있다는 건데?" "네가 걔 반 친구잖아.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는 위치잖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와 한도현은 같은 반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사이에 어떤 접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늘 인싸 무리의 중심에 있었고, 나는 늘 그 무리의 시선 밖에 있었으니까.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는 위치라는 말이 오히려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우리 사이의 거리는 멀었다. "그리고 명심해." 윤서아가 목소리를 낮추며 한 발짝 더 다가섰다. 그 거리감이 어찌나 가까웠는지 나는 저도 모르게 뒤로 몸을 살짝 젖혔고, 등 뒤로 난간의 차가운 금속이 느껴졌다. "이거 못 도와주면, 어제 본 거 반 전체에 다 퍼뜨릴 거야." 그 말이 협박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의 눈빛에는 진심이 담겨 있어서 나는 반박할 여지조차 찾을 수 없었다.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며, 나는 몇 초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이미 나는 알고 있었다. "알겠어… 해볼게." 그 대답을 뱉는 순간, 나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무언가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걸 직감했다. 윤서아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옅게 웃으며 몸을 돌렸고, 옥상 문을 향해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나는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옥상 바람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지던 그 순간, 나는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결코 간단하지 않을 거라는 불안한 예감에 온몸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운동장 저편에서 여전히 공을 몰고 뛰는 한도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나는 그 순간 저 사람과 내가 얽히게 될 거라는 사실이 도무지 실감 나지 않아서, 그저 멀거니 서서 그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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