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가벼운 남자, 무거운 사랑

5화

산에서의 하루는 단순했다. 새벽 다섯 시, 할아버지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처음 며칠은 눈도 못 뜨고 억지로 일어났는데, 시간이 지나자 알람보다 먼저 몸이 깨는 날도 생겼다. 세수하고 마당에 나가면 할아버지가 이미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늦으면 산이 화낸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며 앞장서서 걸었다. 새벽 산행, 아침 식사, 오전엔 밭일, 오후엔 다시 산길. 그 순서는 한 달 내내 똑같았다. 처음 며칠은 다리가 아파서 계단 하나 오르는 것도 벌벌 떨었다. 종아리가 뭉치고 발바닥이 화끈거려서 밤에 이불 속에서 다리를 주무르다 잠든 날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산길을 오를 때 숨이 덜 찼다. 발끝에 힘이 붙는 게 느껴졌다. 식단도 엄격했다. 흰밥 대신 잡곡밥, 튀김 대신 나물, 단 음료 대신 물. 할아버지는 밥상에 콜라나 사이다를 올려놓는 법이 없었다. 처음엔 배가 고파서 밤에 잠도 안 왔다. 편의점 삼각김밥이나 컵라면이 그렇게 그리울 줄은 몰랐다. 그럴 때마다 할아버지는 옥수수나 삶은 감자를 조금씩 내놨다. 그냥 굶으면 몸이 축나. 조금씩 줄여야지. 할아버지의 방식이었다. 나는 감자 껍질을 벗기며 물었다. 왜 안 굶겨요, 그냥 굶으면 더 빨리 빠질 텐데. 할아버지는 흠,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다 며칠 못 가고 나가떨어진다. 니처럼 마음 약한 놈은 서서히 줄여야 오래 간다. 2주가 지나자 바지가 헐렁해졌다. 나는 처음으로 거울 앞에서 옷을 들어 올려보고 놀랐다. 뱃살이 확실히 줄어 있었다. 턱선도 조금 드러났다. 손바닥으로 배를 눌러보니 예전보다 단단해진 느낌이었다. 서아 때문에 시작한 일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서아 생각보다 오늘 몇 킬로를 걸었는지가 더 신경 쓰였다. 저녁마다 할아버지가 챙겨준 낡은 손목시계로 시간을 재며 산길을 걸었다. 오늘은 사십 분, 내일은 오십 분. 그렇게 조금씩 늘려갔다. 할아버지는 가끔 나에게 산 얘기를 해줬다. 이 산에서 아버지가 어릴 때 얼마나 말썽이었는지, 나무에 올라가다 떨어져서 팔이 부러진 적도 있다고 했다. 어머니가 처음 여기 왔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도 얘기해줬다. 어머니가 온 적이 있어요? 내가 물었다. 할아버지는 웃으며 말했다. 니 결혼 전에 인사 온다고 왔지. 그때도 지금처럼 독설을 쏘아붙였어. 흙 묻은 장화를 왜 신냐고. 나는 그 모습이 상상돼서 피식 웃었다. 어머니가 세련된 구두를 신고 흙길을 걸으며 짜증 내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할아버지는 그때 어머니가 신발에 흙 튄다고 발을 동동거리던 걸 흉내 내며 웃었다. 그 웃음이 낯설면서도 따뜻했다. 어느 날 오후, 밭에서 상추를 뽑다가 할아버지가 문득 물었다. 학교는 언제 다시 가냐. 나는 손에 흙을 묻힌 채 대답했다. 방학 끝나면요.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보름 남았구나. 그 말을 듣고 나는 시간이 얼마나 빠르게 지나갔는지 깨달았다. 손목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나는 잠깐 멍해졌다. 산에 있는 동안은 서아도, 학교도, 친구들도 다 멀게만 느껴졌는데. 이제 곧 그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배 속이 살짝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밤마다 나는 휴대폰으로 운동 영상을 찾아봤다. 산속이라 전파가 잘 안 잡혀서 로딩이 느렸다. 배터리가 아까워서 오래 못 봤지만, 그 짧은 시간에도 몸을 만드는 법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머릿속에 넣었다. 유산소와 근력 운동을 병행해야 한다는 것, 단백질을 충분히 섭취해야 한다는 것. 할아버지네 밥상엔 그런 게 부족했지만, 대신 삶은 계란과 두부로 어느 정도 채웠다. 할아버지는 내가 계란 껍질을 까고 있으면 옆에서 지켜보다가 한마디씩 던졌다. 그거 먹는다고 근육 생기나. 밭일이나 더 해라. 나는 대꾸 없이 계란을 입에 넣었다. 한 달이 다 되어갈 무렵, 할아버지가 낡은 체중계를 창고에서 꺼내 왔다. 먼지 쌓인 저울 위에 올라서니 숫자가 흔들리다 멈췄다. 처음보다 10킬로쯤 줄어 있었다. 완전한 변신은 아니었다. 여전히 배는 나와 있었고 턱은 두 겹이었다. 하지만 예전보다 걸음이 가벼워진 건 확실했다. 계단을 오를 때 숨이 덜 찼고, 셔츠 단추를 채울 때 예전보다 여유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저울 숫자를 보고는 짧게 말했다. 됐다. 이제 시작이다. 나는 그 말이 칭찬인지 잔소리인지 헷갈렸지만 왠지 기분이 좋았다. 할아버지가 마지막 며칠 동안 나에게 근력 운동을 가르쳐줬다. 낡은 마당 한쪽에 있던 돌덩이 두 개를 들어 올리는 방식이었다. 이게 헬스장 기구보다 낫다. 자연에서 배운 방식이여. 나는 처음엔 힘들어서 몇 번 못 들었다. 손바닥이 돌에 긁혀 벗겨질 뻔했고, 팔이 후들거려서 그대로 주저앉은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할아버지는 옆에서 팔짱을 끼고 지켜보며 말했다. 힘으로 드는 게 아녀. 숨을 맞춰야지. 나는 숨을 참았다가 내뱉으며 돌을 들어 올리는 법을 조금씩 익혔다. 매일 조금씩 개수를 늘려갔다. 처음엔 세 번, 나중엔 열 번. 서아 생각은 여전히 났다. 하지만 예전처럼 매 순간 떠오르지는 않았다. 산행을 하다가, 밭일을 하다가 문득 떠오르면 그냥 흘려보냈다. 손끝이 차가워지는 일도 줄었다. 어느 밤엔 서아가 웃던 모습이 떠올라서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는데, 그마저도 예전처럼 가슴이 답답해지지는 않았다. 그저 아, 서아구나, 하고 지나가는 정도였다. 떠나기 전날 밤, 할아버지가 소주 한 병을 꺼내며 말했다. 너 마시면 안 되니 나 혼자 마신다. 할아버지는 잔을 채우며 나를 바라봤다. 마당에 걸린 낡은 전구 불빛 아래서 할아버지의 얼굴이 유난히 그늘져 보였다. 학교 가서도 계속 해. 여기서 배운 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가 덧붙였다. 그리고 여자 때문에 다시 무너지지 마. 니 몸은 니 거여. 나는 그 말에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잔을 만지작거리는 할아버지의 손만 바라봤다. 손등에 굵은 힘줄이 튀어나와 있었다. 평생 흙을 만진 손이었다. 다음 날 아버지가 다시 차를 몰고 왔다. 나는 짐을 챙기며 할아버지에게 인사했다. 배낭 안에는 처음 올 때보다 훨씬 적은 짐이 들어 있었다. 옷은 그대로였지만, 몸에 걸쳤을 때 헐렁한 느낌이 새삼스러웠다. 할아버지는 짧게 말했다. 방학 끝나면 또 와.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오래 남았다. 나는 그저 네, 하고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몇 번이나 그 말을 되뇌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나는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을 바라봤다. 완전히 다른 사람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조금은 달라져 있었다. 아버지는 운전을 하며 가끔 나를 힐끗거렸다. 살 빠졌네. 아버지가 그렇게 한마디 던졌을 뿐, 별다른 말은 없었다. 창밖으로 산이 점점 멀어지고 도시의 건물들이 하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개학이 이틀 남았다. 학교로 돌아가면 서아를 다시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 한구석을 무겁게 눌렀다. 산에서는 잊고 지낼 수 있었던 그 얼굴이, 도시의 불빛이 하나씩 늘어날수록 점점 선명하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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