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가벼운 남자, 무거운 사랑

3화

결국 받지 않았다. 화면이 꺼질 때까지 손끝만 만지작거렸다. 진동이 세 번, 네 번 울리다가 멈췄다. 그러고도 한참을 휴대폰을 뒤집어 놓은 채 천장만 바라봤다. 방 안의 불을 껐다가 다시 켰다. 잠은 오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그 장면이 계속 떠올랐다. 영화관 앞, 소파 위, 서아의 팔에 감긴 다른 손. 그 손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나는 학교에 가야 했다.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교복을 입으면서도 손이 자꾸 헛돌았다. 셔츠 단추를 잘못 끼워 다시 풀었다. 넥타이를 매다가도 몇 번이나 다시 풀었다. 어머니가 밥 먹으라고 불렀지만 나는 물만 한 잔 마시고 나왔다. 학교로 가는 길, 늘 걷던 길이었는데 그날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발끝을 보며 걸었다. 교문을 지날 때 아이들이 웃으며 지나갔다. 나는 그 웃음소리가 낯설게 들렸다. 교실 문을 열자마자 서아가 보였다. 창가 자리에 앉아 친구들과 웃고 있었다. 나를 발견하자 손을 흔들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오빠, 왜 전화 안 받아. 걱정했잖아. 나는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 걱정이라는 단어가 우습게 들렸다. 자리에 앉아 가방을 내려놓았다. 손이 떨리는 게 느껴졌지만 애써 무표정을 유지했다. 1교시 수업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웅웅거리는 소음처럼 들렸다. 쉬는 시간에 서아가 다가왔다. 팔짱을 끼려 했다. 나는 몸을 뒤로 뺐다. 서아의 얼굴에 순간 당황이 스쳤다. 왜 그래, 오빠. 나는 목소리를 낮췄다. 어제, 영화관 3층. 그 말만 했는데 서아의 표정이 굳었다. 손끝이 살짝 떨리는 게 보였다. 주변 친구들이 힐끗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로 나가서 얘기하자고 했다. 계단 아래 구석, 사람이 잘 안 다니는 곳이었다. 낡은 소화기 옆, 먼지 쌓인 창틀 아래였다. 그곳까지 걸어가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아는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댔다. 뭘 봤다는 거야.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나는 담담하게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갈라졌다. 다 봤어. 니가 그 선배 팔에, 그렇게. 서아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이 나를 더 무너뜨렸다. 웃을 일이 아닌데 왜 웃을까. 그 생각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오빠는 이해 못 해. 서아가 말했다. 나는 뭘 이해 못 하냐고 물었다.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커졌다. 서아는 시선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오빠는 항상 그대로잖아. 나는 변했는데. 오빠는 그때 그 모습 그대로고. 그 말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손끝이 차가워지는 게 아니라 이번엔 손마디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느낌이 났다. 아팠다. 그런데 그 아픔이 오히려 다행스러웠다. 다른 데가 더 아팠으니까. 그러니까 왜, 도대체 왜 나한테는 말도 안 하고. 나는 반복해서 물었다. 그러니까 왜, 왜 그렇게 웃으면서.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가 다시 낮아졌다. 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눈물이 그녀의 눈가에 차올랐다. 나 힘들었어, 오빠 알아? 사람들이 우릴 볼 때 어떤 표정 짓는지 오빠는 알아? 나는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어서 더 아팠다. 우리 둘이 함께 있을 때마다 누군가는 수군거렸다. 그걸 못 들은 척했던 건 나였다. 서아도 그걸 참아왔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그럼 헤어져. 내가 먼저 말했다. 목소리가 낮고 짧게 나왔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단호한 목소리였다. 서아가 놀란 눈으로 나를 봤다. 오빠, 그냥 그렇게. 목소리가 흔들렸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더 할 말이 없었다. 1년 3개월. 그 시간이 이렇게 짧은 문장 하나로 끝났다. 서아가 뭔가 더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나는 뒤돌았다. 등 뒤에서 서아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기도 하다. 확실하지 않다. 돌아보지 않았으니까. 교실로 돌아가는 길에 손끝이 계속 시렸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대신 속이 텅 비어버린 느낌이었다. 걸음이 자꾸 느려졌다. 벽을 짚으며 걸었다. 교실 문 앞에서 잠시 멈춰 숨을 골랐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얼굴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날 오후 수업을 어떻게 들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필기를 했던 것 같기도 한데, 노트를 펴 보니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말했다. 산에 좀 다녀올게요. 할아버지네. 어머니는 국자를 든 채로 나를 빤히 봤다. 그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얼마나. 한 달쯤요. 어머니는 잠시 아무 말 없다가 국자를 내려놓았다. 냄비에서 김이 올라오다 멈췄다. 서아랑 헤어졌구나. 나는 놀라서 어머니를 봤다. 어떻게 알았냐고 묻지 않았다. 어머니는 늘 그런 식으로 알아챘다. 얼굴만 보고도, 목소리만 듣고도. 가서 뭐 할 건데. 어머니가 물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살 좀 빼려고요. 어머니는 피식 웃었다. 웃음에 비웃음이 섞여 있진 않았다. 그래, 가서 몸이라도 만들어. 그 얼굴로 계속 살 거면. 독설이었지만 그 안에 걱정이 있다는 걸 알았다. 어머니는 다시 국자를 들어 냄비를 저었다. 저녁은 먹고 가라, 라는 말이 뒤이어 나왔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저녁에 퇴근하고 이 소식을 들었다. 넥타이를 풀며 거실로 들어오던 아버지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잠시 멈춰 섰다.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태워다 줄게. 토요일에. 그게 아버지의 방식이었다. 더 캐묻지 않고, 그렇다고 무심하지도 않게. 나는 알겠다고 짧게 답했다. 저녁상에는 평소보다 말이 없었다. 다들 각자의 방식으로 나를 살피고 있다는 걸 느꼈다. 방으로 돌아와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옷가지를 넣다가 서랍 구석에서 서아의 생일 선물로 샀던 목걸이 상자가 나왔다. 은색 체인에 작은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였다. 뜯지도 못한 채였다. 원래는 다음 주에 만나서 주려고 했던 물건이었다. 그날을 위해 몇 번이나 매장을 오갔는지 모른다. 나는 그 상자를 한참 들고 있다가 서랍 맨 아래에 다시 넣었다. 버릴 수도 없고 줄 수도 없는 물건이었다. 상자 뚜껑을 닫는 손끝이 유난히 무거웠다. 휴대폰을 확인했다. 서아의 카톡이 여러 개 쌓여 있었다. 오빠 미안해, 로 시작하는 메시지부터 오빠 왜 이렇게까지 하냐는 메시지까지. 그 사이에는 설명하려는 말들이, 변명 같기도 하고 사과 같기도 한 문장들이 뒤섞여 있었다. 나는 그 화면을 오래 들여다보다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대화방을 나가시겠습니까. 그 창을 한참 바라봤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나가기 버튼 위에서 손가락이 멈춘 채 움직이지 않았다. 이대로 눌러버리면 정말 끝이라는 생각이, 이상하게도 지금까지의 모든 순간보다 더 무겁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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