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가벼운 남자, 무거운 사랑

1화

쇼핑몰 3층 푸드코트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 옆, 통유리에 비친 내 모습을 봤을 때, 나는 늘 그렇듯 시선을 돌렸다. 190에 가까운 키에 몸무게는 물어보지 않는 게 예의였다. 어깨가 넓어서 옷을 사면 항상 라지도 작았다. 나는 유리 쪽으로 걷지 않으려고 일부러 안쪽 통로로 붙어 걸었다. 익숙한 습관이었다. 서아 생일 선물을 사러 온 참이었다. 이번 주 토요일이 서아 생일이었고, 나는 이미 두 달 전부터 뭘 사줄지 고민했다. 목걸이 매장을 세 번이나 돌았다. 은색이 나을지, 로즈골드가 나을지, 그런 것도 서아한테 물어볼 수는 없었다. 서프라이즈여야 하니까. 손끝이 시렸다. 긴장하면 늘 그랬다. 겨울도 아닌데 손끝만 유난히 시린 게 이상하다고, 언젠가 서아가 내 손을 잡고 말한 적이 있었다. 오빠 손 왜 이렇게 차, 심장이 약한 거 아니야. 나는 그때 웃으면서 아니라고 했다. 원래 이래. 그러면서도 서아가 잡아준 손을 놓기 싫어서 매장을 두 바퀴나 더 돌았던 기억이 났다. 세 번째 매장을 나오면서 휴대폰을 확인했다. 서아는 오늘 학원 간다고 했었다. 아침에 카톡으로. 오빠 나 오늘 세 시부터 학원인데 저녁에 연락할게. 나는 그 메시지를 캡처해두기까지 했다. 별거 아닌 말인데도 서아가 보내는 문장은 다 저장해두고 싶었다. 오후 세 시, 그 시간에 학원 갈 사람이 왜 여기 있을까. 나는 그 생각을 하기도 전에 이미 걷고 있었다. 에스컬레이터를 두 칸씩 올랐다. 숨이 찼다. 늘 그랬다. 사람들이 옆으로 지나가면서 나를 한 번씩 쳐다봤다. 큰 몸이 계단을 두 칸씩 오르면 아무래도 소리가 났을 거다.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영화관 앞 소파 구역이었다. 팝콘 냄새와 냉방기 바람이 뒤섞여 있는 곳. 나는 기둥 뒤에서 걸음을 멈췄다. 서아가 거기 앉아 있었다. 다리를 꼬고, 누군가의 팔에 반쪽 몸을 기댄 채였다. 상대는 3학년 농구부 에이스, 이름은 알았지만 부른 적은 없었다. 체육대회 때 반 대표로 나와서 덩크슛을 넣던 애였다. 그때 서아가 옆에서 소리를 지르며 좋아했던 것도 기억이 났다. 나는 그게 그냥 같은 반 친구를 응원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서아가 웃었다. 그 웃음을 나는 안다. 내가 처음 좋아했던 웃음이었다. 눈이 반달로 접히고, 왼쪽 볼에만 살짝 들어가는 보조개. 그 웃음을 보려고 나는 재미없는 얘기도 몇 번씩 지어냈었다. 서아를 웃게 하는 게 내가 제일 잘하는 일이라고 믿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발끝부터 천천히 얼어붙는 느낌, 그런 게 진짜로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몸은 크고 무거운데 마음은 어디로 사라진 건지,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숨소리조차 죽였다. 서아의 손이 그 남자의 손등을 쓸었다. 익숙한 손짓이었다. 나한테도 늘 그렇게 했으니까. 손등을 두 번 쓸고,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어 깍지를 끼는 것까지. 그 순서마저 똑같았다. 나는 뒷걸음질쳤다. 등이 기둥에 부딪혔다. 소리가 났는지도 모르겠다. 서아가 고개를 돌렸다면 나를 봤을 거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서아는 나를 보지 않았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목걸이 매장 쇼핑백을 코트 안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구겨졌다. 상관없었다. 에스컬레이터를 내려오는 동안 다리가 후들거렸다. 계단 하나 헛디뎠다가 겨우 손잡이를 잡았다. 지나가던 사람이 괜찮으세요, 하고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길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가게마다 걸린 크리스마스 조명 같은 것들이 아직 안 뗀 채로 반짝이고 있었다. 계절이 안 맞는데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나도 그랬다. 계절이 안 맞는 사람처럼, 서아 옆에 있는 게 원래부터 안 맞는 자리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집으로 오는 길, 버스 창에 머리를 기댔다. 유리가 차가웠다. 왜 그랬을까, 언제부터였을까, 설마 처음부터 이럴 거였을까. 질문만 쌓이고 답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서아가 나한테 오빠라고 부르기 시작한 게 언제였는지 세어봤다. 일 년 삼 개월이었다. 나는 그 숫자를 세는 내가 한심했다. 버스가 신호에 걸려 멈출 때마다 창밖으로 사람들이 지나갔다. 커플로 보이는 애들이 손을 잡고 편의점 앞에서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고 있었다. 나는 그 장면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서아의 웃는 얼굴이 지워지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니 엄마가 저녁을 차려놨다. 된장국 냄새가 났다. 나는 신발을 벗으면서도 마음이 딴 데 있었다. 방으로 곧장 들어가고 싶었지만 엄마가 부엌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에 어쩔 수 없이 식탁에 앉았다. 나는 숟가락을 들었다가 도로 내려놨다. 왜, 입맛 없어? 엄마가 반찬통을 열며 물었다. 아니. 나는 짧게 대답했다. 목소리가 이상하게 나왔다. 엄마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반찬통 든 손을 멈추고 나를 봤다. 눈으로 나를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훑는 게 느껴졌다. 뭔 일 있었어. 물음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없어. 엄마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국그릇을 내 앞으로 밀어놓았다. 먹어, 배고프면 화도 안 나. 그 말이 왜 그렇게 서러웠는지 모르겠다. 나는 숟가락으로 국을 한 번 떠서 입에 넣었다가 그대로 삼키지 못하고 다시 그릇에 내려놨다. 짠맛만 혀에 남았다. 엄마는 그 이상 캐묻지 않고 자기 밥을 먹었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뉴스 소리만 부엌을 채웠다. 나는 밥그릇을 한참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먹었습니다, 하는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나는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봤다. 형광등 불빛이 눈을 찔렀다. 서아가 웃던 얼굴이 자꾸 겹쳐졌다. 그 웃음, 그 눈, 손짓 하나까지 다 내 것이었다고 믿었는데. 나는 그동안 서아가 나한테 했던 말들을 하나씩 떠올려봤다. 오빠밖에 없어. 오빠가 제일 편해. 그 말들이 지금은 다 다르게 들렸다. 편하다는 게 좋다는 뜻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걸, 나는 그날 처음 의심했다. 휴대폰이 울렸다. 서아였다. 오빠 오늘 학원 끝나고 통화할까? 나는 화면을 한참 봤다. 손끝이 떨렸다. 학원이라는 글자를 보는 순간 낮에 봤던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 답장을 쓰려다 지웠다. 세 번, 네 번. 뭐라고 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 봤어, 라고 쓰면 서아가 뭐라고 대답할까. 아무 일도 아니었다고 하면, 나는 그 말을 믿어야 할까. 결국 아무것도 보내지 않았다. 창밖으로 가로등이 켜졌다.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숨이 막혔다. 살이 많으면 숨쉬기가 더 힘들다는 걸, 사람들은 잘 모른다. 이불 속은 덥고 답답했지만 그걸 걷어낼 힘도 나지 않았다. 나는 그날 밤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처음이었다. 휴대폰 화면이 몇 번 더 밝아졌다가 꺼졌다. 나는 끝내 한 번도 확인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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