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도서위원, 냉전 재회

4화

나는, 그날 이후로 도서위원 활동은 정확히 업무의 경계 안에서만 이어졌다. 서아는 필요한 말만 짧게 건넸고, 나 역시 딱 그만큼의 대답으로 응했다. 대출증을 건네줄 때도, 반납된 책을 서가로 옮길 때도, 우리는 서로의 손이 닿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무의식적으로 계산하며 움직였다. 그 거리감이 습관처럼 자연스러워질 때쯤이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몰랐던 사람들끼리도 이보다는 덜 조심스러울 텐데. 하지만 매주 목요일마다 마주 앉아야 하는 시간은, 아무리 표면적인 침묵으로 채워도 완전히 무해할 수 없었다. 도서실 특유의 냄새—오래된 종이와 먼지, 그리고 창틀 사이로 스며드는 봄바람이 뒤섞인 그 냄새를 맡을 때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서아 쪽으로 시선이 먼저 갔다. 그녀는 대체로 내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척했지만, 가끔은 눈이 마주치는 순간이 있었고 그럴 때마다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마치 서로에게 정해놓은 규칙이라도 있는 것처럼. 신간 도서를 서가에 꽂는 작업을 나눠서 하던 어느 날, 나는 높은 칸에 손을 뻗다가 균형을 잃었고, 옆에서 같은 칸을 정리하던 서아의 손등에 내 손끝이 스쳤다. 순간 둘 다 동시에 손을 뺐다. "미안." 나는 짧게 말했다. "됐어." 그녀도 짧게 답했지만, 그 목소리 끝이 조금 흔들렸다는 걸 나는 느꼈다. 서아는 손등을 슬쩍 옷자락에 문지르며 시선을 피했고, 나는 그 사소한 접촉 하나에 온몸의 감각이 그쪽으로 쏠린다는 걸 부인할 수 없었다. 손끝이 스쳤을 뿐인데, 그 잔열이 손목을 타고 팔꿈치까지 올라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한심했다, 이 정도 접촉에도 이렇게 반응하는 내가. 나는 애써 다음 책을 집어 들며 그 감각을 밀어내려 했지만, 손끝은 한동안 이상하게 저릴 뿐이었다. 그다음 주에는, 서가 정리를 하다가 서아가 무심코 예전 말투를 흘렸다. "거기 말고 이쪽에 꽂아, 그게 더 맞아." 그녀는 나에게 손짓을 하며 그렇게 말했는데, 그 어투가 정확히 중학생 시절 우리가 함께 도서실 정리 봉사를 하던 때 쓰던 말투와 똑같았다. 서아 역시 그 말을 하고서야 스스로 놀란 듯, 잠시 굳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미안, 습관이 나왔네." 그녀가 어색하게 덧붙였다. "아니, 맞는 말이니까." 나는 애써 담담하게 넘겼지만, 속으로는 뭔가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짧은 문장 하나가 몇 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곧바로 그 시절로 나를 데려다 놓았다. 그때도 서아는 늘 이런 식으로, 정리 방식이 틀렸다며 나를 나무랐고, 나는 그 잔소리가 싫지 않아서 일부러 틀리게 꽂아둔 적도 있었다. [그렇게 하면 또 뭐라고 할 거잖아.] 그때의 내가 그렇게 말하면, 서아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나를 쏘아보다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가 지금도 선명하게 귀에 남아 있는데, 지금 눈앞의 서아는 그때처럼 웃지 않았다. 그저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고, 다시 책을 정리하는 손끝만 조금 빨라졌을 뿐이었다. 그런 순간들이 쌓이면서, 나는 서아가 여전히 그때의 서아라는 걸 새삼 확인하게 되었다. 까칠한 말투 아래, 여전히 세심하게 책을 정리하는 손끝이 있었고, 무표정한 얼굴 아래 가끔은 예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서가에서 뽑아 든 책 표지를 오래 들여다보는 순간이 있었다. 특히 애니메이션 원작 소설 코너를 정리할 때는, 그녀의 시선이 조금 더 길게 머문다는 걸 나는 눈치챘다. 책등을 손끝으로 훑어 내리는 속도가 느려지고, 표지를 잠깐 앞으로 돌려 확인하는 그 짧은 순간에 서아의 눈빛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부드러워졌다. "이거, 재밌어?" 나는 어느 날 무심코 그녀가 들고 있던 책의 표지를 가리키며 물었다. 서아는 순간 경계하듯 나를 쳐다봤다. 그 눈빛이 마치 비밀을 들킨 사람처럼 날카롭게 굳어서, 나는 순간적으로 괜한 걸 물었나 싶었다. "왜." 그녀가 되물었다. "그냥, 표지 오래 보고 있어서."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서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원작 만화가 더 좋아." 그녀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경계하는 눈빛으로 나를 살폈다. "소문내지 마." 그녀가 덧붙였다. "안 내." 나는 짧게 답했다. 그리고 나서 서아는 그 책을 조심스럽게 서가에 다시 꽂아 넣었는데, 그 손짓이 어쩐지 소중한 것을 다루는 사람의 손짓 같아서, 나는 잠깐 그 손끝을 눈으로 좇았다. 저렇게 좋아하는 걸 왜 굳이 숨기려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물어봤다가 또 저 경계하는 눈빛을 마주하게 될까 봐, 나는 그냥 다음 책을 집어 들었다. 그 대화가 그날의 마지막이었지만, 나는 그 짧은 문장 하나가 예전의 우리 사이 어떤 균열을 아주 살짝 메워주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착각이었을까—나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었다. 도서실 문을 나서면서도 나는 계속 그 말을 곱씹었다. [원작 만화가 더 좋아.] 그 별거 아닌 문장이 왜 이렇게 오래 마음에 남는지, 나는 이유를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한편, 반에서는 우리 두 사람이 매주 도서실에서 함께 있다는 사실이 조금씩 알려지고 있었다. "도윤재랑 최서아, 원래 아는 사이였다며?" 누군가 그렇게 묻는 소리를 스치듯 들었을 때, 나는 애써 못 들은 척 지나쳤다. "근데 왜 그렇게 서먹해?" 다른 목소리가 이어졌지만, 나는 그 뒷말까지는 듣지 않고 자리를 벗어났다. 교실을 벗어나 복도를 걸으면서도, 그 질문이 등 뒤에 붙어 있는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원래 아는 사이였다며, 라는 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무겁게 들렸다. 원래 아는 사이라는 말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시간이 우리 사이에 있었는데, 그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 나 역시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모르고 있었다. 왜 우리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걸까, 왜 저 손끝의 스침 하나에 이렇게 마음이 흔들리면서도 정작 먼저 다가가지 못하는 걸까. 먼저 다가가려면, 나는 그때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조차 감이 잡히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것 같았고, 아무 말 없이 예전처럼 대하는 것도 서아에게는 갑작스러울 것 같았다. 그 중간의 어딘가에 있어야 할 말을, 나는 아직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날 하교 무렵, 도서실 앞을 지나다가 나는 우연히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서아가 혼자 남아 서가 앞에 서서, 애니메이션 원작 소설 한 권을 꺼내 표지를 오래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옆모습에 스치는 창밖의 늦은 봄 햇살이, 이상하게도 예전 우리가 함께 앉아 있던 그 골목의 오후 빛과 닮아 있었다. 서아의 머리카락 끝이 그 빛을 받아 갈색으로 반짝였고, 나는 그 모습을 조금 더 오래 보고 싶은 마음에 발걸음을 멈추고 서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서 말을 걸어볼까, 저번처럼 표지를 보고 있냐고 물어볼까, 별의별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결국 나는 문 앞에서 한 발짝도 더 다가서지 못했다. 그런데, 그 순간 도서실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다른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박현수였다. 그가 서아 옆으로 다가가 뭔가 말을 건네는 걸 보며, 나는 이상하게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서아의 표정이 어떻게 바뀌는지, 박현수가 무슨 말을 건넸는지, 여기서는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지만, 나는 그 뒷모습만으로도 손끝이 싸늘하게 식는 걸 느꼈다. 왜 저 자리에 내가 아니라 저 애가 서 있는 건지, 나 자신도 이유를 알 수 없는 그 낯선 감정에 발이 붙은 채로, 나는 문밖에서 그저 그 광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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