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도서위원, 냉전 재회

2화

나는, 다음날 아침, 지훈이 내 책상 앞에 손을 짚고 몸을 기울이며 씨익 웃었을 때, 나는 이미 뭔가 잘못됐다는 걸 직감했다. 교실 안은 아직 조회 전이라 시끄러웠고, 창밖으로 봄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와 책상 위에 얇은 줄무늬를 그리고 있었다. 그 빛 속에서 지훈의 얼굴이 유난히 밝아 보였는데, 나는 그 밝음이 나에게 좋은 소식일 리 없다는 걸 이미 몸으로 알아차리고 있었다. "나 이번에 남자 위원장 됐다." 그가 자랑스레 말했지만, 나는 그게 왜 나한테 중요한 정보인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건조하게 되물었고, 지훈은 옆자리 예린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예린이는 여자 위원장." 그가 덧붙였다. 서예린은 우리 학년에서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는 얼굴이었다. 밝은 갈색으로 물들인 긴 머리가 어깨 아래로 부드럽게 흘러내렸고, 이름 순서 탓에 늘 앞자리를 배정받으면서도 그 자리가 어색하지 않을 만큼의 화사함을 갖춘 아이였다. 지훈과는 1학년 때부터 사귀는 사이였고,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주변 공기마저 다르게 느껴진다는 걸 반 아이들 모두가 인정했다. 그런데 이제서야 왜, 그 화사함이 나에게는 불길한 전조처럼 느껴졌던 걸까. "그래서 도서위원이 뭐." 나는 다시 물었고, 지훈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위원장 특권으로 반별 배정 명단, 우리가 조정할 수 있거든." 그의 목소리에 뭔가 즐거운 듯한 여운이 묻어 있었는데, 나는 그게 왜 나와 관련이 있는지 알아채는 데 몇 초가 걸렸다. "설마." 나는 뒤늦게 뭔가를 눈치채고 목소리를 낮췄다. 지훈은 대답 대신 그저 웃기만 했고, 예린이 그의 옆에서 서류철 하나를 팔락거리며 흔들었다. 종이가 스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고, 그 짧은 순간에 나는 손끝이 싸늘하게 식는 걸 느꼈다. "2반 남자 도서위원, 도윤재." 예린이 서류를 내 눈앞에 들이밀며 또박또박 읽었다. "그리고 여자 도서위원, 최서아." 그녀는 그 문장을 마치 이미 정해진 결과를 발표하듯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 나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서류 위에 인쇄된 두 이름이 나란히 놓인 걸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께가 뻐근해졌다. 글자 몇 개가 이렇게 사람을 흔들어놓을 수 있다는 게 우습기도 하고, 동시에 견딜 수 없이 무겁기도 했다. "누가 이렇게 정한 겁니까." 나는 애써 담담하게 물었지만, 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갈라졌다. "내가." 예린이 태연하게 답했다. "왜." 나는 짧게 되물었다. 예린은 잠시 나를 응시하다가,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말했다. "둘이 원래 친했다면서요. 지훈이한테 들었어요." 그녀의 말투는 청유형처럼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 담긴 확신은 흔들림이 없었다. "지금은 아닙니다." 나는 딱딱하게 답했다. "그러니까 다시 친해지라는 거죠." 그녀는 아무 문제 없다는 듯 어깨를 폈다. 나는 그 순간 뭐라고 더 반박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예린의 눈빛에는 장난기와 확신이 반쪽씩 섞여 있어서,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어디까지가 그저 재미로 하는 소리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한심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화가 나기보다 먼저 걱정이 밀려온다는 것이. 서아가 이 사실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그 얼굴이 예상되면서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뭐야 그게] 하며 웃어넘겼을 텐데, 지금은 그 웃음조차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저 대신 다른 사람 시키면 안 됩니까." 나는 마지막 저항처럼 물었지만, 지훈이 내 어깨를 툭 치며 말을 잘랐다. "이미 명단 올라갔어. 발표까지 났고." 그의 말투엔 미안함과 확신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 "게다가," 지훈이 덧붙였다. "너네 둘이 다시 얘기라도 좀 해야 되는 거 아니야? 요즘 완전 남남처럼 지내잖아." 나는 그 말에 대꾸할 기운조차 없어서, 그냥 서류철을 다시 예린 쪽으로 밀어놓았다. 예린은 그걸 받아 챙기며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고, 그 웃음이 유독 얄밉게 느껴졌다. 돌이켜보면, 그 순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지훈과 예린 두 사람이 이런 결정을 내린 건, 단순한 장난이나 우연이 아니라는 걸. 최근 학생회 선거를 앞두고 학년 내에서 미묘한 권력 구도가 형성되고 있었고, 도서위원회 인선조차도 그 물밑 다툼의 일부라는 소문이 있었다는 걸 나는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지훈이 위원장이 된 것도 순수한 실력만이 아니라, 반 대표들 사이의 표 계산이 얽혀 있었다는 것을. 그런 판 위에서 나와 서아의 이름이 나란히 오른 건, 어쩌면 그들에게는 그저 재밌는 우연 정도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는 결코 우연으로 넘길 수 없는 무게였다. "그리고 첫 회의는 이번 주 목요일, 도서실." 예린이 마지막으로 그렇게 덧붙이며 서류를 접었다. 나는 그날 하루 종일 아무것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뭘 설명했는지, 급식으로 뭐가 나왔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옆자리 친구가 뭔가 물어봤을 때도 나는 엉뚱한 대답을 했고, 그 애가 이상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던 시선조차 흐릿하게만 남아 있었다. 오직 목요일이라는 단어와, 도서실이라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마주쳐야 할 얼굴 하나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을 뿐이었다. 점심시간에도 나는 밥맛을 느끼지 못했다. 젓가락을 들었다가 놓았다가 하는 사이, 머릿속에서는 이미 목요일의 도서실 풍경이 몇 번이나 재생되고 있었다. 서아가 나를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까. 놀랄까, 아니면 아예 무표정하게 지나칠까. 어느 쪽이든 나는 그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종례가 끝나고 복도를 걷는데, 저 앞에서 서아가 누군가와 짧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상대는 다름 아닌 박현수였다. 중학교 때부터 알던 얼굴이었고, 우리 세 사람은 한때 같은 무리에 속해 있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었다. 그 시절에는 셋이 붙어 다니는 게 당연했고, 누구 하나가 빠지면 어색할 정도로 자연스러운 사이였는데, 지금은 그 자연스러움이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었다. 현수가 서아에게 뭐라고 말을 건네자, 서아는 짧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웃음이 나에게는 낯설었다. 예전엔 저런 표정을 나에게도 지어 보였던 걸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복도의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서아의 옆얼굴이 유난히 또렷하게 보였고, 나는 그 순간 가슴이 버석거리는 걸 느꼈다. 나는 서둘러 시선을 돌리고 반대편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발걸음이 평소보다 빨라졌고, 계단을 두 칸씩 건너뛰듯 내려가면서도 등 뒤의 소리에 온 신경이 쏠려 있었다는 걸 부인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등 뒤에서 현수의 목소리가 언뜻 들려온 것 같았다—[걱정 마, 내가 알아서 할게]라는, 예전에도 들었던 것 같은 그 말투가. 무엇을 알아서 하겠다는 건지, 나는 알 길이 없었다. 다만 그 말이 자꾸 귓가에 남아 계단을 다 내려온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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