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도서위원, 냉전 재회

1화

나는, 2학년 반배정표 앞에 서서 내 이름을 찾다가, 그 옆줄에 적힌 이름 하나를 보고 손끝이 먼저 식는 걸 느꼈다. 최서아. 같은 반이었다. 1학년 내내 다른 반에서 조용히 앉아 있었고, 급식실에서도 일부러 동선을 어긋나게 만들었고, 복도에서 마주칠 것 같으면 미리 다른 계단으로 돌아갔던 그 모든 노력이, 종이 한 장에 이름 두 개가 나란히 인쇄되는 순간 아무 소용이 없어졌다는 걸 알았다. 한심했다, 이 정도로 무너질 거였으면서 지난 일 년을 그렇게 애써 쌓아왔다는 게. 게시판 앞에는 나 말고도 여러 명이 몰려 있었고, 누군가는 반이 갈렸다며 탄식했고 누군가는 친한 애랑 같은 반이 됐다며 팔을 붙잡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 소음 속에서 혼자 굳어 있었다. 종이에 적힌 글자는 검은 잉크일 뿐인데, 그 두 글자—서아, 라는 이름—가 유독 눈에 진하게 박혀 보이는 게 이상했다. 누가 옆에서 밀치는 바람에 반쯤 밀려났다가 다시 자리를 잡았는데도, 나는 여전히 그 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1학년 첫날, 나는 이미 결심한 게 있었다. 존재감을 최대한 줄이는 것. 성적은 위에서 놓치지 않을 정도로만 유지하고, 동아리는 아예 들지 않고, 쉬는 시간엔 책을 펴놓고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는 것—그렇게 하면 아무도 나를 특별히 기억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랬다. 선생님들 사이에서는 [도윤재는 조용하고 성실한 학생]이라는 짧은 평가로 정리되었고, 반 아이들 사이에서는 존재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흐릿하게 지나갔다. 그게 편했다. 적어도 누구도 나에게 서아의 이름을 꺼내지 않았으니까. 가끔 급식실 줄에 서 있다가 저 멀리 다른 테이블에서 서아의 뒷모습이 보일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밥을 반쯤 남기고 자리를 옮기거나, 아예 처음부터 그 방향으로는 시선을 두지 않는 습관을 들였다. 동선을 계산하는 게 하루 일과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는 걸, 나는 그때까지도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했다. 그게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는, 계산을 멈춰야 하는 순간이 와서야 깨닫게 되는 법이었다. 중3 겨울, 그날의 기억은 이상하게도 구체적인 장면보다 온도로 먼저 떠올랐다. 손이 시릴 정도로 추운 골목이었고, 가로등 하나가 깜빡이며 켜졌다 꺼졌다 하던 그 밑에서, 서아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됐어, 이제 상관하지 마]라고 했었다. 그 말이 왜 그렇게까지 날카롭게 박혔는지, 지금도 정확히는 모르겠다. 그날 서아의 목소리에는 화도 아니고 슬픔도 아닌,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서늘함이 있었고, 나는 그 서늘함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돌아섰다. 다만 그날 이후로 우리는 같은 동네를 걸으면서도 서로 다른 골목을 택했고, 같은 학교에 다니면서도 서로 다른 복도를 걸었으며, 그 침묵이 1년 넘게 이어졌다는 사실만이 남았다. 가끔은 그 침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우리가 원래부터 서로를 몰랐던 사람들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서야 왜 이렇게 오래된 골목의 냉기가 다시 손끝까지 올라오는 걸까. 게시판 앞에 서 있는 나를, 지훈이 뒤에서 어깨를 툭 치며 불렀다. "뭘 그렇게 봐." 그의 목소리는 늘 그렇듯 가볍고 무해했다. 나는 대답 대신 게시판을 눈짓으로 가리켰고, 지훈은 내 시선을 따라가다가 서아의 이름에서 멈췄다. "……아." 그 짧은 탄식 하나에 지훈이 상황을 다 파악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지훈은 내가 서아와 왜 그렇게 됐는지 정확한 이유는 몰랐지만, 우리가 한때 붙어 다니던 사이였다는 것과 지금은 서로 이름조차 부르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괜찮아?" 그가 물었을 때,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지 않았다는 걸 그도, 나도 알고 있었지만. 지훈은 더 캐묻지 않고 그냥 내 옆에 나란히 서서, 자기 이름을 찾는 척 게시판을 훑었다. "나는 3반이네. 넌 진짜 재수 없다, 야." 그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을 때, 나는 그 웃음에 기대어 잠깐이나마 숨을 고를 수 있었다. 그게 지훈다운 배려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교실로 들어가는 계단을 오르면서, 나는 다시 한번 결심을 굳혔다. 같은 반이 됐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고. 말을 섞지 않고, 눈을 마주치지 않고, 그저 물리적으로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일 뿐이라고 생각하기로. 어리석었다, 그런 다짐이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지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면서 그렇게 마음을 정리했다는 것이.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마다 그 다짐을 속으로 되뇌었는데, 마지막 계단을 밟는 순간에는 이미 그 말들이 힘을 잃고 흩어지는 걸 느꼈다. 나는 원래 그렇게 쉽게 무너지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2반 앞문으로 들어서는 순간, 나는 자리를 훑었다. 창가 쪽 두 번째 줄, 이미 익숙한 실루엣이 앉아 있었다. 검은 단발머리가 창밖에서 들어오는 늦은 3월의 햇살에 반쯤 반사되고 있었고, 서아는 고개를 숙인 채 책상 위의 뭔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옆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일 년의 시간이 무색하게 느껴졌다, 마치 어제도 저렇게 앉아 있던 사람을 보는 것처럼. 나는 그쪽으로 시선을 두지 않으려 애쓰며 내 자리를 찾았고, 다행히도 그 자리는 서아와 대각선 반대편, 교실에서 가장 먼 구석이었다. 안도감이 들었다—아주 잠깐이었지만. 가방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으면서, 나는 일부러 창밖을 오래 바라보았다. 운동장에는 아직 겨울의 흔적이 남은 잔디가 듬성듬성했고, 그 위로 새로 배정받은 신입생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게 보였다. 저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새 학년을 시작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낯선 부러움처럼 스쳐 지나갔다. 담임인 정지아 선생님이 들어와 출석을 부를 때, 나는 그 목소리가 익숙하다는 걸 깨달았다. 1학년 때와 같은 담임이었다. "도윤재."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르며 잠깐 시선을 맞췄을 때, 그 눈빛에서 뭔가 알고 있다는 듯한 여운을 느꼈지만, 정확히 뭘 아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1학년 내내 조용히 지내던 나를 유심히 봐왔던 걸까, 아니면 단순히 나의 착각이었을까. 출석부가 다음 이름으로 넘어가고, "최서아"라는 호명에 서아가 짧게 "네"라고 답하는 소리가 들렸을 때, 나는 이상하게도 그 목소리의 톤이 예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걸 느끼며 가슴이 이상하게 조여왔다. 일 년 전 그 겨울 골목에서 마지막으로 들었던 목소리와, 방금 들린 그 짧은 대답 사이에 아무런 간극도 없다는 게, 오히려 나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사람은 변한다고 하던데, 목소리만은 변하지 않는 걸까. 출석이 끝나고 담임이 새 학기 안내사항을 늘어놓는 동안, 나는 노트를 펼쳐놓고도 글자 하나 적지 못한 채 펜만 만지작거렸다. 옆자리 아이가 뭐라고 말을 걸었던 것 같은데, 제대로 듣지 못해서 그냥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넘어갔다. 그런 식으로 시간이 흘러가는 게 낯설었다, 평소라면 담임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받아 적었을 텐데. 종례가 끝나고 교실을 나서는데, 게시판 한쪽에 붙은 새로운 공지문이 눈에 들어왔다. [2학년 도서위원회 명단 발표 — 각 반 1명씩, 남녀 각각 배정] 나는 그 종이를 무심히 지나쳤다. 복도를 걸으며 지훈이 뭐라고 또 말을 걸었지만,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시늉만 하고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 종이가 앞으로 얼마나 내 일상을 뒤흔들지. 신발을 갈아신으며 현관을 나서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지 않아도, 나는 그 발소리의 리듬이 누구의 것인지 알 것 같았다—삼 년 동안 애써 잊으려 했던 그 걸음걸이. 가슴 어딘가가 다시 버석거리기 시작했고, 나는 그 감각을 애써 무시하며 걸음을 서둘렀다.
첫 화입니다 목록 다음화 ›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