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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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오후, 도서실 문을 여는 순간 손잡이의 서늘한 감촉이 손바닥에 그대로 남았다.
철제 손잡이는 초봄의 서늘한 공기를 그대로 머금고 있었고, 그 차가움이 손끝을 타고 팔꿈치까지 스며드는 것 같아서, 나는 잠깐 문 앞에 서서 숨을 골랐다.
안은 텅 비어 있었고, 창가 쪽 긴 책상에 서아가 이미 앉아 있었다.
햇살이 그녀의 옆얼굴을 비스듬히 비추고 있었는데, 그 빛 속에서 서아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태연하게 파일을 넘기고 있었다.
나는 최대한 거리를 둔 자리에 앉으려 했지만, 위원장 예린이 미리 배치해둔 자리표에는 [도윤재 — 최서아 맞은편]이라는 안내가 붙어 있었다.
그 종이 위에 적힌 글씨체마저 얄궂게 또렷해서, 나는 잠시 그 자리표를 구겨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어리석었다, 이런 사소한 배치 하나에도 심장이 요동친다는 게.
서아는 나를 보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냥 무심하게 시선을 돌려 창밖을 보다가, 다시 손에 든 파일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 무표정함이 오히려 더 신경을 긁었다.
나는 애써 침묵을 지키며 맞은편에 앉았고, 의자를 당기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서 서아의 시선이 잠깐 흔들리는 걸 느꼈지만, 그녀는 곧 다시 무심한 얼굴로 돌아갔다.
잠시 뒤 예린이 들어와 오리엔테이션을 시작했다.
"오늘은 서로 자기소개하고, 신간 정리 업무부터 시작할게요." 그녀는 짧게 설명을 마치고, 지훈과 함께 다른 위원들 자리로 이동했다.
그녀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걸 들으며, 나는 이 좁은 공간에 서아와 단둘이 남았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실감했다.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책장 사이로 스며드는 오후 햇살이 먼지 냄새와 뒤섞여 도서실 안을 나른하게 채웠고, 그 정적 속에서 시계 초침 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먼저 입을 뗀 건 서아였다.
"자기소개, 안 해도 되지 않나."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서로 다 아는데." 나는 짧게 맞받았다.
"그럼 됐네." 그녀는 다시 시선을 파일로 돌렸다.
그 짧은 대화 안에서도, 서아의 손가락이 파일 모서리를 무의식적으로 매만지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때 옆 테이블에서 다른 위원들이 나누는 자기소개 소리가 들려왔다.
[저는 책 좋아하고요, 특히 영화 원작인 소설 자주 봐요.]
그 목소리를 듣던 서아가, 나와 눈이 마주치지 않은 채로 불쑥 같은 말을 따라했다.
"저도 책이랑 영화 좋아해요." 그녀는 마치 형식적인 인사처럼 그렇게 뇌까렸다.
그 말투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옆에서 들었다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을 거였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손끝이 차갑게 식는 걸 느꼈다.
"거짓말." 나는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뱉었다.
서아의 시선이 그제야 처음으로 정면으로 나를 향했다.
그 눈빛에서 순간적으로 스치는 당혹감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뭐라고 했어." 그녀의 눈매가 순식간에 서늘해졌다.
"책이랑 영화 좋아한다는 거, 거짓말이잖아." 나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이미 여러 감정이 뒤섞여 어지러웠다.
왜 이런 걸 굳이 짚고 넘어가려는 건지, 나조차도 스스로에게 설명할 수 없었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해." 그녀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네 방에 있던 그 책장, 절반이 만화책이었잖아." 나는 무심코 그 말을 하고서야, 내가 지금 몇 년 전의 기억을 꺼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윤재야, 이거 봐, 이번 화 진짜 대박이야.] 그날 서아가 눈을 반짝이며 만화책을 들이밀던 모습이 갑자기 눈앞에 겹쳐졌다.
그 잔상이 너무 선명해서,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서아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그건 옛날 얘기고." 그녀는 애써 태연하게 넘기려 했지만, 그 말투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지금도 그렇잖아." 나는 계속했다.
"어제 복도에서 네 가방에 매달린 키링, 그거 만화 캐릭터던데." 나는 그걸 왜 기억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이상했지만, 이미 말은 튀어나온 후였다.
사실 나는 그 키링을 본 순간부터 하루 종일 그 생각을 곱씹고 있었다는 걸, 서아에게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서아의 손끝이 파일 위에서 하얗게 도드라졌다.
"네가 무슨 상관인데." 그녀가 낮게 쏘아붙였다.
"거짓 자기소개 하는 게, 위원회 활동에 방해될 수도 있으니까." 나는 표면적인 이유를 댔지만, 사실은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나는 그저, 서아가 예전의 자신을 완전히 지워버린 것 같은 그 모습이 견딜 수 없었을 뿐이었다.
"됐어. 그만해." 서아가 자리에서 일어서려다가, 다시 앉으며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는 걸 보며, 나는 내가 뭔가 건드려서는 안 될 부분을 건드렸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왜 하필 너야." 그녀가 혼잣말처럼 뇌까렸는데, 그 문장이 나에게 들으라고 한 건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왜 하필 나일까—나도 똑같은 질문을 서아에게 되돌려주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한심했다, 이런 순간에도 그녀의 표정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는 게.
정적이 흘렀다.
나는 파일을 펼쳐 신간 목록을 정리하는 척했지만, 손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글자들이 눈앞에서 흐릿하게 번져 보였고, 나는 몇 번이나 같은 줄을 반복해서 읽었다.
서아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펜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그 어색한 소음—펜이 책상에 부딪히는 짧은 소리, 종이가 넘어가는 바스락거림—만이 우리 사이를 채웠다.
창밖으로 꽃잎 하나가 유리창에 부딪혔다가 미끄러져 떨어지는 게 보였고, 나는 그 장면을 괜히 오래 눈으로 좇았다.
한참 후, 서아가 낮게 내뱉었다.
"애니메이션 좋아하는 거, 반에 소문나면 곤란해서 그런 거야." 그녀의 목소리엔 뜻밖에도 지친 기색이 묻어 있었다.
그 말을 하는 서아의 눈빛에는, 예전에는 없던 방어적인 그늘이 있었다.
"굳이 감출 필요 있어?" 나는 물었다.
"넌 몰라도 돼." 그녀가 딱 잘라 말했다.
존댓말과 반말이 그 짧은 대화 안에서 경계 없이 넘나들었는데, 그게 예전의 우리를 떠올리게 해서 나는 순간 가슴이 버석거렸다.
예전에는, 그런 경계 없음이 오히려 편안함의 증거였는데.
"신간 정리는 나눠서 하자." 서아가 갑자기 화제를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파일을 챙기면서도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그 시선 회피가 오히려 무언가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녀가 책장 사이로 사라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책장 사이로 스며든 햇살이 그녀의 뒷모습을 얇게 가르며 지나갔고, 그 빛 속에서 서아의 실루엣은 유독 작고 여리게 보였다.
그 뒷모습이, 이상하게도 1년 전 그날 골목에서 돌아섰던 뒷모습과 겹쳐 보였다.
[윤재야, 나 이제 안 볼래.] 그때도 서아는 이렇게 등을 돌리고 걸어갔었다.
그날의 골목길 가로등 불빛과, 지금 이 도서실의 창백한 형광등 불빛이 이상하게 닮아 있어서, 나는 잠시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어리석게도, 나는 여전히 그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