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옆집 소녀는 밤에만 버튜버

2화

[강태준 시점] "전부." 그 한마디가 카페 안의 모든 소음을 지워버렸다. 에스프레소 머신이 갈리는 소리, 옆 테이블 여고생들의 웃음소리, 창밖 버스 정류장의 안내 방송까지도. 오직 그 두 글자만이 귓속에서 무한 재생되고 있었다. 마치 고장 난 스피커처럼, 같은 구간만 반복해서 튀는 것처럼. 전부, 전부, 전부. "태준아, 듣고 있어?" 유나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얼굴을 다시 봤다. 화장은 완벽했다. 방송 나가기 전에 하는 그 화장. 아이라인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고, 입술은 촬영용 조명 아래서도 예쁘게 나오는 색이었다. 이 사람은 나와 헤어지는 순간에도 방송을 준비하듯 얼굴을 그려 왔다는 사실이, 그 무심함이 나를 더 미치게 했다. "네가 나한테 전부를 바친 건 알아. 근데 태준아, 그게 문제였어." 유나는 그렇게 말하며 눈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눈빛이 나를 더 아프게 했다. 죄책감 하나 없는, 그저 귀찮은 숙제를 처리하듯 정리된 눈빛이었다. 그 눈을 십 년째 보고 있었는데, 오늘 처음 보는 눈 같았다. "그게 왜 문제야."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기생충 같잖아, 그런 관계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위장이 바닥까지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10년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지금까지, 그녀가 넘어질 때마다 손을 잡아줬고, 그녀가 울 때마다 옆에 있어줬고, 새벽 두 시까지 편집 프로그램을 붙잡고 그녀의 방송을 다듬었던 10년. 구독자 수가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내 심장도 같이 뛰었던 그 시간들. 그 모든 시간이 '기생충'이라는 단어 하나로 압축되어 쓰레기통에 처박히는 소리를 들었다. "내가... 언제 기생충처럼 살았는데." "편집도 네가 하고, 대본도 네가 짜주고, 심지어 스폰서 컨택까지 네가 다 해줬잖아. 그게 정상이야? 사람들이 나보고 그러더라. 남자친구가 다 해주는 거 아니냐고. 그거 들을 때마다 내가 얼마나 쪽팔린지 알아?" 쪽팔렸다고. 나는 그 말을 속으로 곱씹었다. 내가 밤을 새워 만든 자막이, 오타 하나 잡겠다고 눈이 빠지도록 들여다봤던 그 시간이, 그녀에게는 쪽팔림의 원인이었다는 거다. "그럼... 그냥 그만두라고 하면 됐잖아. 왜 헤어지자는 말까지 나와." "태준아." 유나가 한숨을 쉬었다. 마치 이해력이 부족한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 같은 말투였다. "너랑 나는 이제 다른 세계에 살고 있어. 나는 이제 팬이 오만 명이야. 근데 너는 아직도 나 방송 편집이나 해주는 남자친구고. 이게 어울려 보여?" 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도 그녀의 논리 안에서는 나만 초라해질 것 같았다. "미안해. 정말로. 근데 이건 너를 위한 결정이기도 해." 나를 위한 결정. 그 말이 가장 잔인했다. 자신의 편의를 위해 나를 버리면서, 그것을 나를 위한 선물처럼 포장하는 그 방식이. 나는 그날 카페에서 어떻게 나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버스를 탔는지 걸었는지도 모르겠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집 앞 골목이었고, 다리는 무겁게 늘어져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유난히 노랗게 보였고, 발밑의 아스팔트가 물결처럼 흐물거리는 것 같았다. 세상이 원래 이렇게 기울어져 있었던가, 아니면 내가 기울어진 걸까. 현관문을 열자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아버지가 나를 돌아봤다. "태준아, 왔어?" 아버지는 늘 그렇듯 지나치게 밝았다. 이혼 이후로 아버지는 웃음의 볼륨을 한 단계 높여놓은 사람 같았다. 슬픔을 감추기 위한 위장인지, 정말로 그렇게 사는 게 편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텔레비전에서는 예능 프로그램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아버지는 그걸 보면서도 정확히 웃지 않았다. 그저 웃는 타이밍에 소리만 내고 있는 것 같았다. "저녁 먹었어?" 아버지가 물었다. "아니." "라면 끓여줄까?" 나는 대답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굳이 따라오지 않았다. 그게 아버지의 방식이었다. 캐묻지 않는 것. 대신 문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보다 조심스러운 기색이 섞여 있었다. "그, 유나랑 잘 얘기했어?" 나는 침대에 얼굴을 묻은 채 대답했다. "끝났어." 짧은 침묵이 흘렀다. 문 너머에서 아버지의 발소리가 멈췄다가, 다시 멀어졌다. 부엌에서 냄비 소리가 났다. 물을 올리는 소리, 그리고 잠시 후 라면 봉지를 뜯는 바스락거림. 나는 먹지 않겠다고 했는데도 아버지는 뭔가를 끓이고 있었다. 그게 그 사람이 위로하는 방식이었다. 말이 아니라 국물로. 그날 밤 나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천장을 보며 10년을 되짚었다. 유나의 첫 방송, 마이크도 제대로 없어서 이어폰 마이크로 시작했던 그 방송. 구독자 100명을 넘기고 서로 얼싸안았던 그날, 밤새 자막 오타 하나를 잡겠다고 눈을 비벼가며 검수하던 시간들. 스폰서와의 미팅 자리에 대신 나가서 굽신거리던 일들. 그녀가 아파서 방송을 못 할 것 같다고 울면서 전화했을 때, 새벽에 죽을 사서 들고 뛰어갔던 일까지도. 전부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을까. 아니, 착각이 아니었다면 뭐였을까? 나는 답을 찾지 못한 채로 새벽을 맞이했다. 창밖이 서서히 밝아지는 걸 느끼면서도 눈은 감기지 않았다. 마치 몸이 잠을 거부하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나는 거의 눈을 붙이지 못한 채로 등교했다. 눈 밑이 시커멓게 죽어 있었을 게 분명했다. 세수를 하면서 거울을 봤을 때, 낯선 사람이 나를 마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교실 앞에서 박현우가 그런 나를 보고 눈을 찌푸렸다. "야, 너 얼굴이 왜 그래. 어디서 맞았냐?" "몰라도 돼." "아니 진짜, 얼굴색이 왜 시체 같아. 유나 누나랑 무슨 일 있었어?"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가슴 한쪽이 다시 욱신거렸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몰라도 된다니까." 박현우는 뭔가 더 묻고 싶은 눈치였지만, 담임이 교실로 들어오는 바람에 입을 다물었다. "자, 다들 자리에 앉아라. 오늘 전학생이 왔다." 그 순간 교실 문이 열렸다. 나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들었다. 실연의 여파로 세상 모든 일에 무감각해져 있던 참이었으니까. 어차피 전학생이든 뭐든, 내 인생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려던 참이었다. 문가에 선 여학생은 긴 검은 머리로 얼굴의 반쪽을 가리고 있었다. 어깨는 심하게 안으로 말려 있었고, 시선은 바닥에 고정된 채였다. 걸음걸이조차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는 것처럼 조심스러웠다. 마치 이 교실 어딘가에 지뢰가 깔려 있어서, 잘못 밟으면 터질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윤소은입니다." 목소리는 거의 들릴락 말락 했다. 담임이 자리를 지정해주자 그녀는 서둘러 걸어가 앉았다. 그 순간 옆에서 나던 아이들의 작은 웅성거림, 저 애 좀 특이하다는 식의 시선들이 그녀를 스치고 지나갔다. 누군가는 킥킥거리며 옆자리 친구에게 귀엣말을 했고, 그녀는 그 소리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가방에서 노트를 꺼냈다. 나는 그 뒷모습을 잠깐 보다가, 다시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어차피 내 인생에 끼어들 일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겐 지금 나를 버린 여자와, 십 년이라는 시간의 잔해만으로도 머릿속이 가득 차 있었으니까. 수업이 끝날 때까지 나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필기도 하지 않고, 그저 펜을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빙글빙글 돌리기만 했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웅웅거리는 배경음처럼 들렸다. 유나의 마지막 표정이 눈앞에서 자꾸 재생됐다. 눈을 피하지 않던 그 눈빛. 그날 저녁, 나는 방에서 짐 정리를 하다가 아버지가 부르는 소리에 거실로 나갔다. 사실 짐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유나와 관련된 사진들, 편집하다가 저장해둔 프로젝트 파일들을 지워야겠다고 생각하며 앉아 있었을 뿐이었다. "태준아, 옆집에 새로 이사 온 사람들 봤어?" "아니, 왜." "엄마랑 딸이 산다더라. 딸이 우리 학교 다닌다던데." 순간 뭔가가 뒤통수를 스쳤다. 나는 별생각 없이 되물었다. "이름이 뭔데?" "글쎄, 그거까지는 못 들었어. 근데 애가 좀 조용하다더라. 이사 인사도 겨우 했다던데. 엄마가 대신 인사하고 딸은 뒤에 숨어 있었다니까." 아버지는 그 말을 하면서도 딸기를 씻고 있었다. 물소리가 계속 흘렀고, 아버지는 딸기 하나를 집어 나에게 건넸다. 나는 받아서 씹었지만 맛을 느끼지 못했다. "아빠는 그 집 딸 얼굴 봤어?" "아니, 그냥 뒷모습만. 왜, 관심 있어?" "아니. 그냥 물어본 거야." 나는 별 의미 없이 흘려들었다. 조용한 전학생과 조용한 옆집 딸. 그게 같은 사람일 확률이 얼마나 되겠어, 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조용한 여학생이 한둘도 아닐 텐데, 라며 스스로의 생각을 밀어냈다. 그날 밤 열두 시가 넘었을 무렵, 나는 침대에 누워 유나에게서 받은 마지막 메시지를 다시 읽고 있었다. 마침표만 가득한, 온기 하나 없는 문장들. "그동안 고마웠어." 딱 그 한 줄. 십 년의 시간에 대한 마지막 인사가 여섯 글자였다. 그때 벽 너머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엔 환청인가 싶었다.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벽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오빠들, 오늘 늦게 시작해서 미안!" 귀에 익은, 그러나 낯선 목소리였다. 밝고 높은, 마이크 너머로 조율된 듯한 목소리. 낮에 교실에서 들었던 그 작고 떨리는 목소리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자신감이 넘쳤고, 리듬이 있었고, 심지어 어딘가 애교스러운 억양까지 섞여 있었다. 벽 하나를 두고, 누군가 방송을 켠 것이다. 나는 어둠 속에서 벽을 향해 몸을 돌렸다. 심장이 이상하게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 목소리를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다는 확신이 스쳤다. 아니, 확신이라기보다는 불길한 예감이었다. 낮에 교실 문가에서 고개도 못 들던 그 여학생과, 지금 벽 너머에서 청량하게 웃고 있는 이 목소리가, 정말로 같은 사람일 수 있을까. 잠은, 이제 완전히 달아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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