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완벽 부회장의 충전모드

2화

며칠 뒤 점심시간, 급식실 한 켠에서 나는 우연히 서윤과 마주쳤다. 그녀는 늘 그렇듯 완벽한 자세로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등을 곧게 펴고 앉아 웃는 얼굴조차 각이 딱 맞는 것처럼 정돈되어 있었다. 나를 발견하자 잠깐 눈빛이 스쳤을 뿐 별다른 티를 내지 않았다. 시선이 마주친 시간은 채 일 초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무심함이 오히려 더 신경 쓰였다. 원래대로라면 아무 사이도 아닌 사람의 시선 따위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어제 별관 뒤에서 본 것들 때문일까. 완벽한 부회장이라는 타이틀 뒤에 숨겨진 얼굴을 한번 본 이상, 나는 서윤을 예전처럼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되어버렸다. 밥을 먹는 내내 시선이 자꾸만 그쪽으로 갔다. 서윤은 친구들의 말에 적당히 웃고,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고, 적당히 질문을 던졌다. 흠잡을 데 없는 리액션이었다. 마치 대본을 외운 사람처럼. 저게 진짜일까. 식판을 반납하고 급식실을 나서면서도 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방과 후, 나는 별관 근처를 지나가다가 다시 서윤과 마주쳤다. 이번엔 그녀가 먼저 나를 붙잡았다. "잠깐 얘기 좀 해." 서윤의 목소리가 낮았다. 평소 교실에서 듣던 또랑또랑한 목소리와는 결이 달랐다. 별관 3층 계단에 앉아서 서윤은 종이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정식 계약서 형식으로 작성된 문서였는데, 손글씨가 놀라울 만큼 단정했다. 마치 인쇄한 것 같은 필체였다. "이게 뭐야?" "비밀보장 계약서." "장난해?" "장난 아니야." 서윤의 눈빛이 진지했다. 창으로 들어오는 오후 햇살이 그녀의 옆얼굴에 걸려 있었는데, 그 빛 아래서도 표정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나는 종이를 받아 들고 내용을 훑어보았다. 목격한 사실을 절대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을 것, 위반 시 어떤 불이익도 감수할 것, 심지어 이 계약서의 존재 자체도 발설하지 않을 것 같은 조항들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마지막 줄에는 서명란까지 정확히 그려져 있었다. "이런 거 왜 만들어. 그냥 말로 하면 되잖아." "말은 깨지기 쉬워." "종이는 안 깨져?" "적어도 증거는 남지." 서윤이 딱 잘라 말했다. 그 말투에는 어떤 여지도 없었다. 나는 그 애가 얼마나 불안한 상태인지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완벽한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이렇게까지 철저해야 한다면, 그 이미지를 유지하는 게 얼마나 피곤한 일일지. 계약서를 이만큼 준비해 왔다는 건, 이미 여러 번 이 순간을 상상하고 대비했다는 뜻일 터였다. 그 상상 속에서 서윤은 몇 번이나 이 종이를 접었다가 다시 펼쳤을까. "싫으면 서명 안 해도 돼. 대신..." 서윤이 말을 흐렸다. 대신 뭘 하겠다는 건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 뒷말이 결코 좋은 쪽은 아닐 거라는 게 눈빛으로 전해졌다. 서윤의 손끝이 종이 끝을 살짝 매만졌다. 그게 그 애가 보인 유일한 동요였다. "위협하는 거야?" "부탁이야." 부탁이라는 말이 이렇게 절박하게 들릴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나는 종이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서윤의 손글씨는 완벽했지만, 그 완벽함 아래 얼마나 많은 압박이 있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획 하나하나가 조심스럽게, 힘을 눌러 쓴 자국이 종이 뒷면까지 배어 있었다. "서명하면 뭐가 달라져?" "아무것도. 그냥 넌 계속 아무것도 몰랐던 척하면 돼." "그럼 이 계약서는 왜 필요한 거야." "확실히 해두고 싶어서." 서윤의 목소리에 미세한 균열이 스쳤다. 확실히 해두고 싶다는 말 뒤에 숨은 불안이 느껴졌다. 완벽해 보이는 사람일수록 사소한 균열에도 크게 흔들리는 법이라는 걸, 나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계단 아래로 지나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서윤이 순간적으로 몸을 굳혔다가, 그 소리가 멀어지자 다시 원래의 자세로 돌아왔다. 그 짧은 순간의 경직이 오히려 그 애의 초조함을 더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나는 볼펜을 받아 들고 종이에 이름을 적었다. 이도윤. 세 글자를 써넣는 손끝이 이상하게 무거웠다. 왜 이렇게 쉽게 서명을 하는 건지 나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냥, 그 애의 불안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싶었던 것 같다. "됐다." 서윤이 종이를 받아 확인하고는 처음으로 옅게 웃었다. 완벽한 미소는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 서툴고, 조금 안심한 것 같은 웃음이었다. 그 웃음을 본 순간, 나는 지금까지 서윤이 짓던 그 어떤 웃음보다 이게 훨씬 진짜에 가깝다는 걸 알았다. "그럼 이제 우리 무슨 관계야?" "비밀을 공유한 관계." 서윤이 딱 잘라 정의했다. 그 정의가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비밀을 공유한 관계라니, 친구도 아니고 아는 사이도 아닌 애매한 그 위치가 왜 이렇게 특별하게 느껴지는지 알 수 없었다. 마치 세상에 딱 둘만 아는 암호를 나눠 가진 기분이었다. "그럼 이제 가끔 이렇게 얘기해도 돼?" "왜?" "비밀 공유자끼리는 안부 정도는 물어봐야 하는 거 아냐?" 서윤이 살짝 눈을 흘겼지만, 그 눈빛에 짜증은 없었다. "마음대로 해." 그로부터 며칠간, 나는 서윤과 우연히든 의도적이든 자주 마주쳤다. 특히 방과 후 이 별관 근처에서. 서윤은 늘 이곳에서 잠깐씩 숨을 돌리는 듯했고, 나는 그 시간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은근히 그 자리를 지켰다. 처음엔 계단 아래 구석에 앉아 있다가, 어느 날은 창틀에 걸터앉아 있다가, 또 어느 날은 그냥 지나가는 척 복도를 서성이는 식이었다. "또 왔네." "우연이야." "세 번째 우연이면 우연이 아니지." 서윤이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이 처음보다 조금 더 자연스러웠다. 계약서에 서명을 받아낸 뒤로 서윤의 표정에서 경계심이 조금씩 옅어지는 게 느껴졌다. 여전히 조심스러웠지만, 적어도 나를 볼 때만큼은 가면을 완전히 쓰지는 않는 것 같았다. "오늘은 뭐 하고 있었어?" "연설 대본 외우는 중." 서윤이 무릎 위에 놓인 종이를 흔들었다. 빽빽하게 적힌 문장들이 접힌 자국투성이였다. "몇 번이나 고쳤어?" "세 번째." "완벽주의자네." "완벽해야 하니까." 그 대답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한빛고 개교기념 행사가 다가오고 있었다. 학생회 주관으로 진행되는 전교생 앞 연설이 예정되어 있었고, 서윤이 그 연설을 맡기로 했다는 소식이 학교 전체에 퍼져 있었다. 완벽한 부회장의 완벽한 연설. 모두가 당연하게 기대하고 있었고, 복도에서도 벌써부터 서윤의 연설을 두고 이런저런 말들이 오갔다. 누구는 서윤이라면 걱정할 것 없다고 했고, 누구는 그렇게 완벽한 애가 실수라도 하면 얼마나 재밌을지 궁금하다고도 했다. 나는 그날 별관에서 본 서윤의 얼굴이 떠올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 애, 정말 괜찮을까. 모두가 서윤을 완벽한 사람으로만 보고 있는데, 나는 그 완벽함이 얼마나 가까스로 유지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 간극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행사 전날, 나는 또 별관 근처를 지나다가 서윤과 마주쳤다. 그녀는 창가에 앉아 대본을 손에 든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그 표정이 유난히 지쳐 보였다. 대본은 손에서 몇 번이나 접혔다 펴진 흔적으로 가장자리가 해져 있었다. 창밖으로는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고, 그 붉은빛이 서윤의 얼굴에 그림자처럼 걸려 있었다. "내일 그거, 자신 있어?" "당연하지." 대답은 즉각적이었지만,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나는 그 대답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었다. 서윤의 손끝이 대본의 모서리를 다시 매만졌다. 계단에서 처음 보았던 그 초조한 손짓과 똑같았다. "진짜 괜찮은 거야?" "괜찮다고 했잖아." 목소리가 조금 날카롭게 올라갔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그 애의 옆얼굴을, 붉게 물든 그림자 속에서 유난히 창백해 보이는 그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을, 나는 그날 처음으로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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