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찬 건 너, 차는 건 나

4화

"강도윤 선배님, 저 3반 윤채린인데요." 낯선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을 때, 나는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춘 채 상대를 살펴보았다. 단정하게 정돈된 단발머리에, 교복을 흐트러짐 없이 깔끔하게 갖춰 입은 그 여학생은 1학년이라고 했다. 손에는 작은 종이가방을 든 채로, 그 애는 조금 긴장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저 이번 궁도부 신입 부원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요, 선배님이 시범 좀 보여주실 수 있을까 해서..."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렸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낯을 가리는 성격은 아닌 모양인지 눈빛만은 또렷하게 나를 향해 있었다. "입부 신청은 부장한테 하면 돼." 나는 짧게 대답하며 그대로 자리를 지나쳐 걸어갔지만, 윤채린은 종이가방을 내 손에 억지로 쥐어주며 다시 말을 붙였다. "이거, 그냥 감사 표시로 준비했어요. 저 사실 선배님 팬이거든요, 작년 전국대회 영상 보고 완전 팬 됐어요. 결승전에서 마지막 화살 쐈을 때, 그거 진짜 몇 번을 돌려봤는지 몰라요." 말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통에, 나는 대꾸할 틈도 찾지 못한 채 종이가방의 무게만 손에 느끼고 있었다. 안에 든 게 뭔지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저 이런 상황 자체가 익숙지 않아서 불편했을 뿐이었다. 나는 그 가방을 받지도 거절하지도 못한 채 잠깐 멈춰 섰다. 등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한서아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는 굳이 그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시선이 등에 꽂히는 감각이 이렇게 선명할 수 있다는 걸, 나는 그날 처음 알았다. "필요 없어." 결국 나는 가방을 다시 윤채린의 손에 돌려주며 그 자리를 떠났다. 윤채린이 뒤에서 뭐라고 더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에도, 나는 한서아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어지는 걸 곁눈질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애 특유의, 아무렇지 않은 척 애쓰는 표정. 입꼬리는 웃고 있는데 눈은 웃지 않는, 그런 얼굴이었다. 그날 방과 후, 나는 자리를 정리하며 가방을 챙기다가 한서아가 아무 말 없이 내 자리 근처를 계속 서성이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책상 서랍을 열었다 닫았다, 필통 지퍼를 열었다 닫았다, 별 의미 없는 동작만 반복하면서. "뭐야." "아니, 그냥." 한서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지만, 그 애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필통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 1학년 여자애, 좀 적극적이더라."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내 말이 예상보다 더 날카롭게 나왔던 모양인지, 한서아의 눈이 순간 커졌다. 하지만 곧 그 애는 입술을 꾹 다물며 고개를 저었다. "상관 없지, 없는데..." 말끝을 흐리는 그 애를 보며, 나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불편해지는 걸 느껴야 했다. 저 애가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건지, 저 표정에 담긴 게 정말 질투인지 아니면 그냥 착각인지, 나는 도무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판단이 서지 않는다는 사실이, 나를 더 짜증나게 만들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아니라고 확실하게 결론이 나면 편할 텐데. 한서아는 결국 아무 말도 더 붙이지 않고 가방을 챙겨 먼저 교실을 나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잠깐 바라보다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한숨을 내쉬며 남은 짐을 정리했다. 그리고 며칠 뒤,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체육시간, 우리 반은 강당에서 배드민턴 수업을 하고 있었다. 나는 짝이 된 한서아와 함께 코트에 서서 셔틀콕을 주고받아야 했는데, 그 애는 운동 신경이 그리 좋지 않아서 몇 번이나 헛스윙을 하며 넘어질 뻔했다. 라켓을 쥔 손목이 어색하게 꺾여 있는 것도, 셔틀콕이 오는 방향을 매번 반박자씩 늦게 읽는 것도, 옆에서 보고 있자니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조금만 더 빨리 반응해." "아, 알겠어! 근데 이게 생각보다 안 되네..." 그 애는 웃으며 말했지만, 다음 셔틀콕이 넘어오자마자 발이 엉키며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악!" 결국 한서아가 균형을 잃고 옆으로 크게 쓰러지려는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그 애의 팔을 붙잡았다. 몸이 앞으로 확 기울며 그 애의 얼굴이 순식간에 내 앞으로 가까워졌고, 나는 숨이 턱 막히는 걸 느끼며 그대로 굳어버렸다. 우뚝! 서로의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나는 그 애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바로 앞에서 볼 수 있었다. 갈색이 섞인 눈동자 안에, 강당 천장의 조명이 작게 부서져 담겨 있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걸 느끼면서도, 나는 그 애를 밀어내지도 끌어안지도 못한 채 그 자세로 몇 초간 얼어붙어 있었다. 한서아 역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강당 안의 다른 소음들이 순간적으로 멀게 들리는 착각이 들었다. 다른 아이들이 셔틀콕을 주고받는 소리, 선생님의 호루라기 소리, 그 모든 게 마치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먹먹하게 멀어져 있었다. "...너 괜찮아?" 결국 내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그 애를 바로 세워주며 물었다. 목소리가 스스로 듣기에도 어색하게 갈라져 나왔다. 한서아는 얼굴이 붉어진 채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애의 시선은 여전히 내 손에 붙어 있는 듯했다. 나는 그 손을 재빨리 떼며 한 발짝 물러섰다. "고마워." 한서아의 목소리가 유난히 작았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고개만 살짝 끄덕였고, 속으로는 방금 그 순간의 감각이 자꾸만 되풀이되는 걸 느끼며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손바닥에 남아 있는 그 애 팔의 온도가, 지워지지 않고 계속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계속 스쳤지만, 이미 심장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남은 수업 시간 동안 나는 한서아 쪽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셔틀콕만 기계적으로 받아쳤다. 그 애도 마찬가지였는지,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며 어색한 랠리만 반복했다. 그날 저녁, 궁도부 연습이 끝나고 짐을 챙기던 중, 나는 사물함 정리를 하다가 낡은 종이봉투 하나가 밑바닥에 깔려 있는 걸 발견했다. 손을 뻗어 꺼내보니, 오래전 내가 서랍 속에 처박아뒀던 그 캐릭터 키링이 담긴 봉투였는데, 언제부터인가 학교 사물함으로 옮겨져 있었던 모양이었다. 언제 옮겼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 그런 사소한 물건이었다. 나는 그걸 꺼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색이 조금 바랜 플라스틱 캐릭터가, 봉투 안에서 조용히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걸 왜 아직도 버리지 않았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오늘 낮에 한서아의 가방 지퍼에 걸려 있던 작은 키링 하나가 눈에 스쳤던 걸 기억해냈다. 체육 시간이 끝나고 가방을 챙기던 그 애의 지퍼에서, 짤랑거리며 흔들리던 그 작은 실루엣이. 그 키링이, 내가 준 것과 똑같은 캐릭터였다는 걸.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종이봉투를 그대로 다시 사물함에 넣으려던 손을 멈췄다. 같은 캐릭터일 뿐, 그냥 흔한 물건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넘기려 해도, 머릿속에서는 자꾸 다른 생각이 비집고 올라왔다. 한서아가 그걸 가지고 있다는 것도, 하필 지금 이 순간 그게 떠올랐다는 것도, 전부 우연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이상하게 맞물려 있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걸, 나는 뒤늦게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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