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3월 둘째 주, 한빛고등학교 2학년 3반 교실 문 앞에 붙은 명단을 확인하던 순간, 나는 숨을 잠깐 멈춰야 했다. 34번, 한서아. 종이에 인쇄된 그 세 글자를 눈으로 세 번쯤 곱씹으면서도, 나는 혹시 다른 학교에도 같은 이름을 가진 애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기대를 붙잡고 있었다. 명단 옆으로 지나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신발 끄는 소리, 새 학기 특유의 낯선 섬유 냄새가 코끝을 스치는 동안에도,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종이 위의 이름만 들여다보았다.
한서아. 한서아. 한서아.
이름을 세 번 읊는 사이에도 심장은 조금씩 빨라지고 있었는데, 나는 그 심장의 속도를 애써 무시하며 교실 문을 밀고 들어섰다. 하지만 교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창가 자리에 다리를 꼬고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그 애의 옆모습을 확인한 순간, 나는 그 기대가 얼마나 하찮은 것이었는지를 곧바로 깨달아야 했다.
탈색한 밝은 갈색 머리카락을 굵게 웨이브 넣어 늘어뜰인 채로, 스커트를 규정보다 짧게 접어 올려 입고, 손목에는 반짝이는 팔찌를 겹겹이 두른 그 애는 2년 전보다 훨씬 화려해져 있었다. 손톱에는 옅은 펄이 들어간 매니큐어가 발려 있었고, 귓가에는 작은 큐빅 귀걸이가 흔들렸으며, 창문으로 들어오는 오전 햇살이 그 애의 옆얼굴을 비스듬히 비추고 있었다. 옆으로 살짝 돌아간 턱선과 웃을 때 왼쪽만 깊게 파이는 보조개는, 놀랍게도, 그때 그대로였다.
한서아.
중학교 3학년, 도담중학교 2반 창가 자리에서 처음 마주쳤던 그 이름을, 나는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단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다. 정확히는 잊으려 애쓴 만큼 더 선명하게 새겨진 이름이었다.
[네가 나 좋아하는 거 알아. 근데 나는 아니거든.]
그 말을 들었던 늦가을 저녁, 학교 뒷문 앞에서 손끝이 시릴 정도로 차가웠던 바람과, 그보다 더 차가웠던 그 애의 눈빛이 지금도 가끔 꿈속에서 재생됐다. 그때 나는 열다섯이었고, 성적은 반에서 중간쯤, 체육은 늘 꼴찌권, 안경 렌즈는 늘 지문투성이였던 볼품없는 남학생이었다. 그런 내가 반에서 제일 예쁘고 화려했던 한서아를 좋아한다는 건, 지금 생각해도 어이없을 만큼 무모한 짝사랑이었다. 고백을 하기까지 세 달이 걸렸고, 거절을 당하는 데는 십오 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날 나는 편지를 준비했었다. 며칠 밤을 새워가며 몇 번이고 고쳐 쓴, 유치하기 짝이 없는 문장들이 가득한 편지였다. 하지만 그 애는 내 손에 들린 편지를 채 받아보지도 않은 채, 그저 짧은 몇 마디로 모든 걸 끝내버렸다. 뒷문을 나서던 그 애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던 것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날 이후로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정확히는, 다시는 그런 눈빛을 받지 않기로 결심했다.
2년간 나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학교 궁도장에서 활을 당겼고, 밤 12시까지 독서실에 남아 문제집을 풀었으며, 방학 때는 전국 청소년 궁도대회에 나가 메달을 목에 걸었다. 활시위를 당길 때마다 손끝에 남는 얼얼한 통증과, 새벽 공기 속에서 하얗게 뿜어져 나오던 입김을 지금도 몸이 기억한다. 그 사이 안경은 렌즈로 바뀌었고, 어깨는 넓어졌으며, 성적은 전교 상위권으로 올라섰다. 사람들은 나를 두고 '문무양도 아이돌'이라 부르기 시작했지만, 나는 그런 별명 따위에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다. 내가 원했던 건 단 하나, 언젠가 다시 그 애를 마주쳤을 때 완전히 무너뜨릴 만큼 냉정하게 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 '언젠가'가, 하필이면 오늘,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
"어라?"
한서아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발견한 순간, 그 애의 눈이 커지는가 싶더니 입꼬리가 순식간에 올라갔다. 휴대폰을 쥐고 있던 손이 잠깐 멈추고,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자세가 조금씩 풀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겉으로는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은 얼굴을 유지한 채 그 애 옆을 지나쳐 갔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속에서만 벌어지는 일이었다.
"강도윤? 강도윤 맞지?"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2년 전보다 조금 더 낮아지고, 조금 더 확신에 찬 그 목소리는 여전히 내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하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한서아는 자리에서 반쯤 일어난 채로,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있었다.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여자애가 무슨 일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우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진짜 강도윤이잖아... 완전 딴사람 됐네."
그 애의 목소리에는 놀라움과 반가움이 섞여 있었고, 나는 그 반가움이라는 감정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를 거절했던 사람이, 나를 알아보고 저렇게 웃을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 애의 웃음에 담긴 온도와, 2년 전 그날 뒷문 앞에서 나를 향해 던졌던 눈빛의 온도가 너무 다르다는 사실이, 나를 오히려 더 혼란스럽게 했다. 나는 미간에 잠깐 주름을 잡았다가 곧바로 풀며, 최대한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 그런가 보네."
짧은 대답. 나는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내 자리로 걸어갔다. 등 뒤로 한서아의 시선이 계속 따라붙는 걸 느낄 수 있었지만, 나는 절대 돌아보지 않았다. 속으로는... 저 눈빛이 진짜 반가움인지, 아니면 그냥 놀라움인지 구별이 안 돼서, 나는 자꾸만 손끝이 저려오는 걸 느꼈다.
자리에 앉아 가방을 정리하는 동안에도, 나는 창가 쪽에서 들려오는 한서아와 그 애 친구들의 웃음소리를 애써 무시하려 했다. 필통에서 펜을 꺼내 책상 위에 나란히 늘어놓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나는 애써 못 본 척했다. 하지만 그 웃음소리 사이로 간간이 내 이름이 섞여 나오는 걸 알아채지 못할 만큼 무신경하지는 못했다.
"야, 너네 강도윤 몰라? 완전 이번 대회 금메달 딴 그 궁도부 애."
"헐, 저 사람이 그 강도윤이라고? 사진하고 완전 다르잖아, 실물이 더..."
주변 여자애들이 소곤거리는 소리에, 나는 책상 위에 교과서를 펼치면서도 귀만은 그쪽으로 가 있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손가락으로 책장을 넘기는 시늉을 하면서도, 정작 눈에 들어오는 건 활자가 아니라 창가 쪽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들뿐이었다. 그리고 그 소곤거림 사이로, 한서아의 목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나 저 애 중학교 동창이야."
그 말을 하는 그 애의 목소리에는 이상하게도 자랑스러움 같은 게 묻어 있었다. 나는 볼펜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끼며, '동창이라고, 그냥 그렇게만 말하면 돼?' 하는 생각이 스치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동창. 그 두 글자로 정리되기에는,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이 너무 많았다.
2년 전, 나를 그렇게 차갑게 밀어냈던 애가, 이제 와서 다시 웃으며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웃음이, 나는 도저히 진심으로 믿을 수가 없었다. 창가 쪽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계속되는 동안에도, 나는 애써 교과서 첫 페이지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속으로는 2년 전 그 뒷문 앞의 차가운 바람을 다시 떠올리고 있었다.
수업이 시작되기 직전, 담임 선생님이 자리 배치를 발표하겠다며 종이 한 장을 들고 교실 앞에 섰다. 교실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지면서, 아이들의 시선이 하나둘 앞으로 모이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 순간까지도 몰랐다. 저 종이 한 장이 앞으로 내 2년간의 복수 계획 전체를 흔들어놓을, 아주 성가신 시작점이 될 거라는 걸.
"3분단 2번, 강도윤. 3분단 1번, 한서아."
선생님의 목소리가 그렇게 발표한 순간, 나는 정말로 얼음이 되어버렸다.
교실 안 여기저기서 낮은 웅성거림이 일었지만, 그 소리조차 나에게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창가 쪽을 바라보았고, 한서아는 이미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린 채로, 왼쪽 보조개를 깊게 파이도록 웃고 있었다.
"우리 짝이네?"
너무나도 태연한 그 목소리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