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가을 저녁, 학교 뒷문. 낙엽이 다 떨어진 은행나무 아래에서, 나는 손에 편지 한 장을 쥔 채 서 있었다.]
중학교 3학년 늦가을, 나는 세 달 동안 준비한 고백을 마침내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했었다. 처음에는 마음을 편지로 전할 생각이었어서, 매일 밤 방에 틀어박혀 몇 번이고 문장을 고쳐 쓰다가 결국 다 구겨서 쓰레기통에 처넣기를 반복했다. 어떤 문장은 너무 유치했고, 어떤 문장은 너무 무거웠고, 어떤 문장은 쓰다가 손이 떨려서 끝맺지도 못했다. 결국 나는 종이 위에 마음을 담는 걸 포기하고, 그 대신 직접 말로 전하기로 마음을 바꾼 채로,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학교 뒷문 앞에 서서 한서아를 기다렸다.
손에는 작은 종이봉투가 들려 있었다. 그 안에는 그 애가 평소에 좋아한다고 지나가듯 말했던 캐릭터 키링이 들어 있었는데, 나는 그걸 몇 주 동안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샀었다. 시급이 얼마 안 됐던 그 시절, 나는 매일 밤 열 시까지 진열대를 정리하고 폐기 도시락을 먹으며 돈을 모았고, 그 돈으로 산 것이 겨우 손바닥만 한 플라스틱 키링이었다는 게, 지금 생각하면 조금 우습기도 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마지막 남은 은행잎 몇 장이 발밑으로 떨어졌고,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손끝이 차갑게 식어가는 걸 느꼈다. 심장은 이상하게 빠르게 뛰고 있었는데, 그게 추위 때문인지 긴장 때문인지 나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한서아가 뒷문을 나서다가 나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을 때, 나는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 오르는 기분을 느끼며 종이봉투를 그 애 앞으로 내밀었다.
"이거... 너 줄려고."
"...뭔데 이게?"
한서아는 봉투를 받으면서도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나는 그 표정을 보고도 멈추지 않은 채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나 너 좋아해. 사귀고 싶어서 그런다."
말을 뱉고 나자 귀까지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나는 그 애의 반응을 기다렸다. 하지만 돌아온 건 예상보다 훨씬 차가운 정적이었다. 몇 초간 나를 빤히 바라보던 한서아는, 이내 옅게 한숨을 내쉬며 봉투를 다시 내 손에 밀어넣었다.
"네가 나 좋아하는 거 알아. 근데 나는 아니거든."
그 말을 하는 그 애의 표정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고, 나는 그 단호함에 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이 풀리는 걸 느껴야 했다.
"그냥... 딱 잘라 말할게. 앞으로 나한테 이런 거 하지 마. 부담스러워."
그렇게 말한 뒤 한서아는 몸을 돌려 걸어가 버렸고,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손에 든 종이봉투를 한참이나 내려다보고 있었어야 했다. 가로등 불빛 아래 서서, 그 애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나는 움직이지 못했다. 결국 나는 그 키링을 버리지 못한 채 서랍 속 깊은 곳에 처박아두었다. 지금도 그게 거기 그대로 있는지, 나는 확인해본 적이 없었다.
그 뒷모습을, 나는 2년이 지난 지금도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강도윤, 나 필기 좀 보여줄 수 있어? 1교시 수업 늦게 들어와서 앞부분 못 들었어."
현재로 돌아온 나는, 짝이 된 첫날부터 이렇게 태연하게 부탁을 해오는 한서아를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 웃음, 저 말투. 마치 2년 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내게 다가오는 태도가, 나는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안경을 벗고, 매일 새벽마다 운동장을 뛰고, 궁도부에 들어가 활을 잡는 법을 배우는 동안에도, 나는 단 한 번도 저 애를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정작 저 애는 나를 처음 보는 사람 대하듯, 아니 오히려 오래된 친구 대하듯 굴고 있었다.
"안 돼."
짧은 대답. 나는 그 이상의 설명도 붙이지 않은 채 필기 노트를 팔로 가려 덮었다. 한서아의 눈썹이 살짝 치켜올라가는가 싶더니, 이내 그 애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말을 걸어왔다.
"에이, 그러지 말고. 우리 옛날에 같은 반이었잖아, 그것도 인연인데."
"인연이라는 말, 아무 데나 갖다 붙이지 마."
내 목소리가 예상보다 더 차갑게 나왔다는 걸, 나는 그 애의 표정이 살짝 굳는 걸 보고서야 알아챘다. 겉으로는 별일 아니라는 듯 다시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방금 내가 뱉은 말이 너무 과했나 하는 생각이 슬쩍 스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생각을 곧바로 밀어냈다. 2년을 참아온 대가를, 이런 사소한 죄책감 따위로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교실 앞문으로 담임이 들어오면서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고, 나는 그 소리에 맞춰 노트를 다시 펼쳤다. 한서아는 옆자리에서 볼펜을 딸깍거리며 딴청을 부렸지만, 나는 그 소리가 신경 쓰이지 않는 척, 칠판만 바라보았다.
쉬는 시간, 한서아의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와 그 애 자리 주변을 둘러싸고 앉았다. 화려한 화장과 밝은 웃음소리로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진 그 무리 속에서, 나는 이어폰을 끼고 창밖을 바라보는 척하면서도 대화 내용을 완전히 놓치지는 않았다.
"야, 너 진짜 강도윤이랑 짝 됐다고? 완전 로또네!"
"부럽다 진짜. 나도 궁도부 애랑 짝하고 싶은데."
"근데 쟤 원래 저렇게 말 없었어? 완전 딴 사람 됐네."
그런 말들 사이에서, 한서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옅게 웃고만 있었다. 그 웃음이 평소보다 조금 힘이 없다는 걸, 나는 슬쩍 곁눈질로 확인하고서야 알아챘다. 친구들이 재잘거리는 동안에도 그 애의 시선이 몇 번쯤 내 쪽으로 흘러왔다가 황급히 창밖으로 돌아가는 걸, 나는 못 본 척 넘겼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스스로에게 조금 놀랐다. 왜 저런 사소한 표정 변화까지 신경 쓰고 있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그 생각을 재빨리 지워버렸다.
점심시간, 급식실로 향하는 복도에서 나는 우연히 한서아와 나란히 걷게 되는 상황에 놓였다. 복도는 학생들로 붐볐고, 어디선가 밥 냄새와 웃음소리가 섞여 들려왔는데, 그 애는 옆으로 다가와 자연스럽게 걸음을 맞추더니,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시 말을 걸어왔다.
"너 진짜 많이 변했더라. 예전엔 안경 쓰고 다녔잖아."
"..."
"운동도 안 좋아했었는데, 궁도부는 어떻게 시작한 거야?"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 걸음의 속도를 조금 높였다. 등 뒤로 실내화 끄는 소리가 부지런히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한서아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옆에 붙어 걸으며 질문을 이어갔고, 결국 나는 걸음을 멈춘 채 그 애를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우뚝!
"너랑 나 사이에 대화할 게 뭐가 있어."
내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한서아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흔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그 애는 입술을 꾹 다물며 시선을 살짝 아래로 떨어뜨렸다. 지나가던 아이들 몇이 우리 쪽을 힐끔거렸지만, 나는 그런 시선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나는 그 반응을 보고도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않으려 애썼지만, 속으로는... 저렇게까지 반응할 줄은 몰랐는데, 하는 낯선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도."
한서아가 다시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눈빛은 조금 전까지의 흔들림과는 다른, 훨씬 단단한 무언가를 담고 있었다.
"나 포기 안 할 거거든?"
그 말을 뱉는 그 애의 눈빛에는 이상하게도 절박함이 섞여 있었고, 나는 그 절박함의 이유를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마치 2년 전 뒷문에서 나를 밀어냈던 그 애와, 지금 눈앞에서 물러서지 않는 이 애가 같은 사람이 맞는지조차 헷갈릴 정도로.
...대체 뭐가 달라진 거야, 너.
나는 그 말을 목구멍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그저 그 애의 눈을 마주 본 채로 굳어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