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찬 건 너, 차는 건 나

3화

3월이 지나 4월로 넘어가는 사이, 나와 한서아의 짝 관계는 어느 정도 '기묘한 균형' 상태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그 애의 질문에 최소한의 대답만 돌려주었고, 그 애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은 채 매일 아침 인사를 건넸다. 처음에는 그 인사조차 무시하려 했지만, 같은 자리에 앉아 하루 여섯 시간을 붙어 있는데 완전히 무시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교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책상 위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는 시간이면, 한서아는 어김없이 가방을 내려놓기도 전에 나를 향해 몸을 반쯤 돌리곤 했다. 그러고는 뭐든 하나씩 물어왔다. 오늘 날씨가 어떤지, 숙제를 다 했는지, 어제 본 시험 몇 점을 받았는지 같은, 대답할 필요조차 없어 보이는 질문들을. "오늘 급식 뭐야? 나 배고파 죽겠는데." "메뉴판 봐." "에이, 그냥 말해주면 되잖아, 나 이따 급식 줄 서면서 볼 거니까~" 한서아는 말끝을 늘이며 웃었고, 나는 그 애의 그런 말투에 매번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결국은 짧게 메뉴를 읊어주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런 식으로 대답해주는 스스로가 신경에 걸렸다. 복수를 하겠다며 완벽하게 냉정한 사람이 되려 했는데, 정작 매일 이렇게 소소한 대화에 응해주고 있으니, 나는 자꾸만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있었다. 그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4교시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자 한서아는 식판을 들고 내 뒤에 슬며시 줄을 섰고, 나는 애써 모른 척 앞만 보고 걸었다. 그런데도 등 뒤에서 들려오는 그 애의 목소리는 이상하게 귀에 콕콕 박혔다. 나는 그게 왜 그런지 굳이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방과 후, 궁도부 훈련장으로 향하는 길에 나는 오랜 팀원인 박준서를 만났다. 준서는 경상도 사투리가 진하게 섞인 말투로 늘 나를 놀려대는 유일한 존재였는데, 이번에도 예외는 없었다. "야, 강도윤이. 니 요새 표정이 와 그리 이상하다냐?" "뭐가 이상한데." "뭐가 이상하냐고? 니 지금 얼굴에 다 써져 있는데. 뭐 고민 있제?" 준서는 활통을 어깨에 메며 나를 향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고, 나는 그 시선을 피하려 궁도장 문을 먼저 열고 들어갔다. 궁도장 안은 오후의 햇살이 마루 바닥을 데워놓은 탓에 나른한 냄새가 났고, 저 멀리 표적지 두 개가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나는 활통에서 활을 꺼내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지만, 준서는 그런 나를 순순히 놓아주지 않았다. "니 짝 됐다면서, 그 예쁜 여자애. 한서아라 캤나?" 나는 활시위를 손끝으로 매만지던 손을 잠깐 멈췄다. "그게 뭐." "뭐긴 뭐야, 니 중학교 때 그 여자애 아이가. 니가 좋아했다가 차였다는." 탁! 손에 들고 있던 활이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준서는 그런 나를 보며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이미 그 애가 정확한 사실을 짚어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준서는 오래전부터 내가 궁도에 미친듯 매달렸던 이유를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고, 나는 그걸 굳이 숨기지 않았었다. 다만 상대의 이름까지는 말한 적이 없었는데, 준서는 오늘 처음 그 이름을 확인하고 나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 것이었다. "...맞아." 나는 결국 그 사실을 인정하며 바닥에 떨어진 활을 주워 들었다. 손끝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는 그 짧은 순간에도, 준서의 시선이 여전히 내 얼굴에 붙어 있는 게 느껴졌다. "근데 이제 와서 그게 뭐가 중요해." "중요하지, 와 안 중요하냐. 니 지금 그 여자애랑 한 반, 한 짝인데." 준서는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해봐라. 니 아직도 그 여자애 신경 쓰이제?" 나는 그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못한 채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 표적지 정중앙을 노려보면서도, 머릿속으로는 계속 준서의 질문이 맴돌고 있었다. 손끝이 살짝 미끄러지는 걸 느꼈지만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난 뒤였다. 결국 화살은 표적을 살짝 빗나가 옆쪽에 꽂혔고, 준서는 그걸 보며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허, 봐라 봐라. 신경 쓰이는 거 확실하네." "...신경 쓰이는 거랑, 좋아하는 거랑은 다른 거야." 내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준서는 어깨를 으쓱하며 더는 그 얘기를 깊게 파고들지 않았지만, 나는 다시 활을 집어 들며 애써 표적에만 집중하려 했다. 그러나 두 번째 화살도, 세 번째 화살도 평소만큼 정확히 날아가지 않았다. 그날 밤 훈련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나는 계속 준서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걸 느끼며 걸었다. 신경 쓰이는 거랑 좋아하는 거랑은 다르다고 스스로에게 되뇌었지만, 정작 그 구분이 어디서부터 갈라지는지는 나조차 명확히 답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나는 한서아의 또 다른 얼굴을 처음으로 목격하게 되었다. 쉬는 시간, 나는 화장실에 다녀오다가 우연히 한서아가 계단 아래 구석에서 친구 하나와 나누는 대화를 듣게 되었다. 그 친구는 다른 반 애인 듯했는데, 목소리가 낮고 진지했다. 계단참 그늘 아래 두 사람의 실루엣만 보였고, 나는 무심코 그 자리를 지나치려다 발걸음을 멈췄다. "서아야, 너 진짜 강도윤한테 다시 다가가는 거 괜찮은 거야? 걔 표정 보면 완전 널 싫어하는 것 같던데." "...알아." 한서아의 목소리가 평소와 다르게 축 처져 있었다. 늘 말끝을 늘이며 웃던 그 목소리와는 완전히 다른, 낮고 조심스러운 음색이었다. "그래도 해야 돼. 나 걔한테... 진짜 미안한 거 갚아야 되니까." "미안한 게 뭐가 있어, 그냥 거절한 거잖아." "그게 아니야." 한서아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나 그때 걔 진짜 좋아했었어. 근데 그걸 그렇게 심하게 밀어낸 거는... 다른 이유가 있어서였어." 나는 그 순간 벽 뒤에 숨어 숨을 죽인 채 서 있었다. 심장이 갑자기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걸 느끼면서도, 나는 그 대화를 계속 엿듣지 않을 수 없었다. 등에 닿은 차가운 벽의 감촉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나는 그 다음 말을 기다리며 온 신경을 귀에 집중시켰다. '다른 이유가 뭔데.' 머릿속에서 그 물음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하지만 마침 그때 종이 울렸고, 두 사람은 대화를 급하게 끝내며 각자 흩어졌다. 나는 결국 그 '다른 이유'가 무엇인지 듣지 못한 채, 그저 자리에 남아 있는 찜찜함만 안고 교실로 돌아가야 했다. 계단을 올라가는 발걸음이 평소보다 훨씬 무겁게 느껴졌다. '좋아했다고... 그런데도 그렇게 밀어냈다고.' 나는 그 말을 계속 곱씹으면서도,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좋아했다면서 그렇게 매몰차게 거절할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2년 전 그날, 한서아가 내 앞에서 지었던 그 차가운 표정이 다시 떠올랐다. 웃음기 하나 없이 나를 내려다보던 그 눈빛과, 지금 계단 아래에서 떨리던 그 목소리가 같은 사람의 것이라는 게 잘 믿기지 않았다. 나는 그 의문을 품은 채 교실 문을 열었고, 마침 그 안에서는 낯선 여자애 하나가 내 자리 앞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우리 반 아이도 아니었고, 옆 반에서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그 애는 내 책상 위에 손을 얹은 채, 나를 발견하자마자 표정을 굳혔다. 교실 안의 소란스러움 속에서도 그 애 주변만은 이상하게 조용했고, 나는 문 앞에 선 채로 잠시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