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친구야, 자꾸 설레면 어떡해?

3화

다음 날 오전 11시, 토요일. 도윤이 늦잠에서 깨어나 거실로 나오자, 아버지 강민준이 소파에 앉아 신문을 뒤적이고 있었다. 아침부터 켜켜이 쌓인 정적이 거실을 채우고 있었고, 도윤은 그 정적에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오늘 나갈 데 있냐." 민준이 신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무심하게 물었다. "아뇨, 딱히." 도윤이 짧게 답하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고 안에는 반찬 몇 개와 우유 한 팩이 전부였는데, 그 텅 빈 풍경이 유난히 눈에 밟혔다. 어제까지는 아무렇지 않았던 것들이 오늘은 조금 다르게 보였다. 민준은 아들의 대답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고 신문을 넘겼고, 도윤은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뒀다. '물어볼 거면 좀 더 물어보든지.' 속으로 삐죽거리는 말이 목구멍 어딘가에서 사라졌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강도윤! 오늘 시간 되면 우리 집 좀 와줄래? 엄마가 밥 해준다고 하셔서.] 하은의 문자였다. 도윤은 그 짧은 문장을 세 번이나 다시 읽었다. 글자 수는 몇 개 되지 않는데, 그 안에 담긴 의미를 헤아리려는 듯 눈이 자꾸 같은 줄로 돌아갔다. '왜 나를...'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지만, 손가락은 이미 [그래]라고 답장을 치고 있었다. 전송 버튼을 누른 순간 심장이 한 박자 빠르게 뛰었는데, 도윤은 그 이유를 굳이 캐묻지 않기로 했다. *** 오후 1시, 12층 유하은의 집. 초인종을 누르자 문이 열리며 하은이 반갑게 도윤을 맞았다. "어서 와!" 하은이 문을 활짝 열고 몸을 옆으로 비켜서며 안으로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높았고, 그 밝음이 도윤에게 낯설게 느껴졌다. 집 안은 도윤의 집보다 넓고 밝았는데, 거실 창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인상적이었다. 가구 배치도 정갈했고, 벽에는 하은과 지현이 함께 찍은 사진들이 몇 장 걸려 있어 그 집만의 온도를 짐작하게 했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작은 회색 고양이 한 마리가 도윤의 다리 근처로 다가와 냄새를 맡더니, 관심 없다는 듯 홀연히 소파 밑으로 사라졌다. 도윤은 순간 몸이 굳었다가, 고양이가 사라지고 나서야 어깨에 들어간 힘을 풀었다. "저건 모모야, 우리 집 고양이. 되게 도도해." 하은이 웃으며 설명했다. "낯선 사람한테는 원래 저래, 신경 쓰지 마." "고양이 키운 적 없어서...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네." 도윤이 어색하게 대답하자, 하은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냥 무시하면 돼. 저 녀석도 너 무시할 거니까 공평하지." 주방에서 요리 소리가 들려오다가, 곧 한 여자가 앞치마를 두른 채 걸어 나왔다. 유지현이었다. 하은과 닮은 눈매를 가진, 다소 피곤해 보이지만 미소가 따뜻한 사람이었다. 손에는 국자를 든 채였고, 이마에는 요리하다 흘린 땀이 살짝 배어 있었다. "네가 도윤이구나. 하은이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 지현이 손을 내밀며 인사하자, 도윤은 얼떨결에 그 손을 맞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낯설면서도 어딘가 편안했다. "안녕하세요, 강도윤입니다." 도윤이 딱딱하게 인사하자, 지현이 피식 웃었다. "뭘 그렇게 긴장해, 편하게 있어." "어제 이어폰 찾아준 거, 하은이가 계속 신경 쓰길래 밥이라도 한 끼 대접해야겠다 싶어서 불렀어." 지현이 부엌으로 돌아가며 덧붙였고, 도윤은 그 말에 왠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게 뭐 대단한 일도 아닌데.' 하은이 옆에서 도윤의 표정을 살피며 슬쩍 웃었다. "왜, 부담스러워?"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도윤이 말끝을 흐리자, 하은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그를 식탁 쪽으로 이끌었다. 식탁에 차려진 음식은 소박했지만 정갈했는데, 계란찜과 나물 몇 가지, 그리고 갈치조림이 상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누군가가 정성껏 차려준 밥을 먹는다는 사실이 도윤에게는 낯설면서도 묘하게 위로가 되었다. "많이 먹어, 남자애들은 원래 많이 먹어야 커." 지현이 반찬을 자꾸 덜어주며 하는 말에, 도윤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밥그릇에 쌓이는 반찬의 양을 보며 도윤은 잠시 말을 잃었는데, 이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챙김을 받는 감각이 오래전에 잊혔던 것처럼 낯설었다. "저희 아빠는 이런 거 잘 안 하셔서..." 도윤이 무심코 흘린 말에 지현이 잠깐 눈을 마주쳤다가, 별다른 말 없이 국그릇을 도윤 쪽으로 조금 더 밀어주었다. 그 배려가 말보다 더 크게 다가왔다. 식사 도중 지현의 휴대폰이 울렸고, 그녀는 짧게 통화를 하더니 미안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마 회사 일 때문에 잠깐 나가봐야 할 것 같아. 하은아, 손님 잘 챙겨." 지현이 급하게 외투를 챙기며 말하자, 하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걱정 마." 지현이 현관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가 들리자, 집 안에는 다시 도윤과 하은, 그리고 소파 밑에서 슬그머니 얼굴을 내민 모모만 남았다. 갑작스러운 정적이 두 사람 사이로 내려앉았고, 도윤은 젓가락을 든 채로 잠시 멈췄다. "우리 엄마 원래 이렇게 바빠. 나 어릴 때부터 혼자 있는 게 익숙해." 하은이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그 말투 안에 얕게 스며 있는 외로움을 도윤은 눈치채지 못할 수 없었다. '나만 결핍이 있는 게 아니었구나.' 도윤은 그 말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그냥 밥을 한 숟갈 더 떴다. 하은도 더 이상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대신 젓가락으로 계란찜을 크게 떠서 도윤의 밥그릇 위에 올려주었다. "이거 진짜 맛있어, 먹어봐." *** 같은 날 오후 3시, 하은의 방. 식사 후 하은이 자기 방을 구경시켜 주겠다며 도윤을 이끌었는데, 방 안은 화장품과 옷가지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지만 그 무질서함마저 그녀다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책상 위에는 다이어리와 펜, 그리고 반쯤 마른 매니큐어 병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고, 벽에는 좋아하는 가수의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여기 앉아, 편하게." 하은이 침대 위에 아무렇지 않게 앉으며 손짓하자, 도윤은 조심스럽게 책상 의자에 앉았다. 방 안을 둘러보던 도윤의 시선이 벽 한쪽에 걸린 사진 액자에 잠깐 머물렀다. 어린 하은과 지현이 놀이공원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저거 초등학교 때 사진이야. 엄마가 그날 하루 휴가 냈었거든." 하은이 도윤의 시선을 따라가며 말했다. 그 말투에는 별거 아니라는 듯한 태연함이 묻어 있었지만, 도윤은 그 문장 안에 담긴 무게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근데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줘?" 도윤이 결국 참고 있던 질문을 던지자, 하은은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씩 웃었다. "음, 그냥 편해서? 넌 다른 애들이랑 좀 다르거든. 나한테 뭘 원하지 않는 느낌이랄까." 그 말에 도윤은 순간 가슴이 조금 뜨거워지는 걸 느꼈지만, 애써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원하는 게 없다니, 그건 아닌데.' 속으로 삼킨 말이 목구멍 어딘가에 걸린 채 남았다. 도윤은 그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라 그냥 침묵을 지켰고, 하은은 그 침묵을 딱히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듯 침대에 걸터앉은 채 다리를 흔들었다. "우리 친구 하자." 하은이 침대에서 팔을 뻗어 도윤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친구." 도윤은 그 단어를 조용히 따라 읊었는데, 그 단어가 왜인지 실제보다 더 무겁게 느껴졌다. 입 안에서 굴려본 그 두 글자가 낯설고도 간지러운 느낌으로 남았다. "뭐야, 표정이 왜 그래." 하은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아니, 그냥. 친구라는 말 오랜만에 들어서." 도윤이 얼버무리듯 답하자, 하은이 픽 웃으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럼 이제 자주 들을 거니까 익숙해져." 그 말이 아무렇지 않게 던져졌지만, 도윤의 마음속에서는 오래도록 잔향처럼 남았다. 창밖으로 오후 햇살이 길게 늘어지고, 모모가 방문 틈으로 슬그머니 들어와 하은의 침대에 뛰어오르는 모습을 바라보며, 도윤은 이 낯설고도 따뜻한 공간에 자기가 앞으로도 자주 드나들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을 조용히 느꼈다. 그리고 그 예감 뒤편에서,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 하나가 조용히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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