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강도윤은 새벽 여섯 시 반에 눈을 뜨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건 알람 소리보다 먼저 몸이 반응하는 일종의 조건반사였고, 그 시각이면 아버지 강민준이 이미 부엌에서 프라이팬을 달그락거리고 있다는 걸 몸이 먼저 알아채기 때문이었다. 창밖은 아직 푸르스름한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시간이었고, 이불을 걷어내는 순간 방 안의 서늘한 공기가 팔뚝을 스치며 잠기운을 완전히 몰아냈다.
방 두 개짜리 낡은 아파트, 열일곱 평 남짓한 공간에서 아버지와 단둘이 지낸 지도 오 년이 다 되어 가는데, 도윤은 이 좁은 집의 온도가 늘 미묘하게 차갑다고 느꼈다. 벽지가 오래되어 군데군데 들뜬 자국이며, 거실 한켠에 늘 놓여 있는 어머니의 낡은 사진틀이며, 그 모든 것들이 시간이 멈춘 듯한 인상을 주었다. 어머니가 없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원래 부자 둘만 사는 집이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도윤은 이미 그 온도에 익숙해져 버린 지 오래였다.
"밥 먹어라." 민준이 국그릇을 식탁에 탁 내려놓으며 짧게 말하자, 도윤은 아무 말 없이 젓가락을 들었다. 민준의 손등에는 밤새 공장에서 일한 흔적인 듯 작은 화상 자국이 하나 더 늘어 있었는데, 도윤은 그걸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자 사이의 아침은 대체로 이런 식으로, 대화보다 침묵이 더 익숙한 방식으로 흘러갔고, 숟가락이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만이 그 침묵을 간신히 메워 주었다.
등굣길, 도윤은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늘 다니던 골목을 걸었는데, 그 길 끝에서 마주치는 학교 정문의 소란스러움이 오늘도 여전했다.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삼삼오오 몰려 웃고 떠드는 사이를 지나 교실 문을 열면, 늘 창가 자리에 앉은 유하은의 웃음소리가 먼저 들려왔고, 그 소리를 향해 반사적으로 시선이 돌아가는 자신을 도윤은 애써 무시하곤 했다.
유하은은 밀크티 색 긴 머리를 늘어뜨린 채 친구들 사이에서 웃고 있었는데, 그 미소 하나에 교실 전체의 온도가 한 톤 올라가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아침 햇살이 창문을 통과해 그녀의 머리카락 위로 부서지는 모습을 도윤은 자리에 앉으면서 슬쩍 훔쳐보았지만, 곧 시선을 거두고 책상 위에 놓인 교과서로 눈을 돌렸다. 도윤에게 그녀는 그저 '같은 반 아이돌' 같은 존재였을 뿐, 자신과는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이미 확고했다.
중학교 삼 학년 때, 도윤은 반에서 제일 예쁘다고 소문났던 여자아이에게 편지를 써서 고백했다가 아이들 앞에서 대놓고 웃음거리가 된 적이 있었는데, 그 기억은 지금도 가슴 한구석에 서늘한 흉터처럼 남아 있었다. 편지지를 접던 손끝의 떨림이며, 쪽지를 건네던 순간의 심장 소리며, 그리고 그 아이가 편지를 펼쳐 보며 옆자리 친구와 눈을 마주치던 그 짧은 순간의 표정까지도 도윤은 여전히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얘 진짜 웃기다." 누군가의 그 한마디가 교실 전체로 퍼지며 웃음이 터졌고, 도윤은 그 순간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 앉아 고개를 떨궜었다. '좋아한다는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구나.' 그날 이후 도윤은 어떤 감정이든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법을 스스로 익혔고, 그 습관은 어느새 성격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더라도 그 마음을 꺼내 보이는 대신 조용히 안으로 삼키는 쪽을 택하는 것이, 도윤에게는 이미 당연한 방식이 되어 있었다.
***
같은 날 저녁 7시, 아파트 1층 엘리베이터 앞.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돌아온 도윤이 로비에 들어서자, 형광등 불빛 아래 정적만 감돌던 공간에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누군가 짐을 한가득 들고 나오려다 휘청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장바구니 두 개가 한꺼번에 손에서 미끄러지려는 순간, 도윤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그중 하나를 받쳐 들었는데, 무게가 생각보다 훨씬 묵직해서 손목에 순간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어? 감사합니다!" 밝은 목소리가 튀어나오는데, 그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도윤의 심장이 순간적으로 덜컥 내려앉았다. 밀크티 색 머리카락, 교실에서 매일 보던 그 웃음, 그리고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도 유독 선명하게 빛나는 눈동자.
유하은이었다.
"너... 우리 반이잖아." 하은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도윤을 알아보자, 도윤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손에 들린 장바구니 안쪽에서 파와 두부 냄새가 은은하게 풍겨왔고, 그 평범한 생활의 냄새가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다. '설마 이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고?' 같은 건물, 같은 엘리베이터, 같은 시간대라는 사실이 갑자기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몇 층 살아?" 하은이 아무렇지 않게 물었고, 도윤은 짧게 "팔 층"이라 답했다. "나는 십이 층인데! 완전 신기하다, 그동안 왜 한 번도 못 봤지." 그녀가 장바구니를 받아 들며 환하게 웃는 순간, 도윤은 그 웃음이 교실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에서, 훨씬 선명한 온도로 다가온다는 걸 느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하은의 손가락 끝이 스쳐 지나가는 것조차 도윤에게는 이상하게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두 사람만 남은 좁은 공간 안에서, 도윤은 애써 시선을 층수 표시등에 고정했지만, 옆에서 풍기는 샴푸 향이 자꾸만 신경을 건드렸다. 숫자가 하나씩 올라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도윤은 몇 번이나 곁눈질로 하은을 살폈다가, 그녀가 시선을 느낄까 봐 다시 정면으로 눈을 돌리기를 반복했다. 좁은 공간 특유의 정적 속에서 하은의 숨소리와 옷깃이 스치는 작은 소리까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8층에 도착했다는 알림음이 울렸지만, 도윤은 잠깐 자신이 내려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달으며 서둘러 발을 뗐다.
"어, 여기 내려?" 하은이 묻자 도윤은 그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인사도 제대로 못 한 채 문밖으로 나섰다. 12층에서 하은이 내리며 "내일 학교에서 봐!" 하고 손을 흔들었다는 사실을, 도윤은 나중에야 복도에서 뒤늦게 떠올렸다. 그제야 참고 있던 숨을 길게 내쉬었는데, 그 숨결 끝에 아직도 그 샴푸 향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다음 날 오전, 교실.
"야, 강도윤!" 하은이 등교하자마자 곧장 도윤의 자리로 다가와 어깨를 툭 치며 이름을 부르자, 반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쪽으로 쏠렸다. 도윤은 그 시선들이 부담스러워 자기도 모르게 등을 움츠렸는데, 등 뒤로 느껴지는 시선의 무게가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어제 고마웠어. 나 원래 낯가림 있는데, 너는 그냥 편하네." 하은이 씨익 웃으며 건넨 말에, 도윤은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애매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편하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 좋은 뜻인지 아닌지 가늠이 안 되는 말이었고, 그 짧은 문장 하나가 하루 종일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쉬는 시간이 되자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중 몇몇의 시선이 도윤을 향해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할 수는 없었다. "유하은이랑 같은 아파트 산다더라"는 말이 이미 반 전체에 퍼진 모양이었고, 누군가는 대놓고 도윤의 자리 근처를 지나가며 힐끔거리기까지 했다. 평소라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시선들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유난히 살갗에 와닿는 듯했다.
도윤은 애써 무심한 얼굴로 책을 펼쳤지만, 마음속으로는 계속 어제 엘리베이터 안의 그 향기와 웃음소리가 맴돌고 있었다. 페이지를 넘기는 손끝이 몇 번이나 같은 줄을 헛짚었고, 글자는 눈에 들어오는 대신 그저 흐릿한 무늬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냥 우연이야. 이웃일 뿐이고.' 그렇게 되뇌면서도, 창가 자리에서 들려오는 하은의 웃음소리에 자꾸만 귀가 기울여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하은이 문득 고개를 돌려 도윤과 눈을 마주쳤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도윤은 심장이 이상하게 뛰는 것을 느끼며 황급히 시선을 피했는데, 그 짧은 눈맞춤이 앞으로 자신의 하루를, 어쩌면 그보다 더 긴 시간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흔들어 놓게 될 거라는 사실을, 도윤은 아직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