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친구야, 자꾸 설레면 어떡해?

2화

다음 날 오후, 아파트 앞 편의점. 퇴근길인지 하교길인지 애매한 시간대라 편의점 안은 한산했고, 도윤은 냉장고 앞에 서서 삼각김밥 몇 개를 뒤적이며 유통기한을 확인하고 있었다. 참치마요와 불닭볶음면 삼각김밥 사이에서 좀처럼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어, 또 만났다!" 하은이 아이스크림 하나를 손에 들고 다가오며 반갑게 인사하자, 도윤은 순간 손에 든 삼각김밥을 놓칠 뻔했다.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반응하며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는데, 도윤은 애써 태연한 척 삼각김밥을 도로 매대에 세워두고 뒤를 돌아보았다. "어... 안녕." 인사라고 하기엔 어색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지만, 하은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 듯 활짝 웃으며 도윤의 옆으로 자연스럽게 다가섰다. "진짜 신기하다, 우리 만나는 게." 하은이 도윤의 옆에 나란히 서서 계산대로 향하며 태연하게 말했는데, 도윤은 그 무심한 태연함이 오히려 더 신경 쓰였다. '나만 자꾸 의식하는 건가.' 계산을 마치고 편의점 문을 나서면서도 그 생각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고, 편의점을 나서며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나란히 걷게 되었는데, 저녁 무렵의 바람이 제법 선선하게 불어와 하은의 머리카락 몇 가닥을 흩날리게 했다. 그 짧은 거리 동안 하은은 학교 이야기, 담임 선생님 흉내, 시험 걱정 같은 것들을 쉬지 않고 늘어놓았다. "우리 담임 있잖아, 오늘 진짜 웃겼어. 애들 자는 거 보고 갑자기 목소리 커지면서," 하은이 팔을 휘저으며 담임의 말투를 흉내 내는데, 그 모습이 제법 그럴싸해서 도윤은 저도 모르게 픽 웃고 말았다. 그 웃음을 본 하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가, 이내 더 신이 나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 맞다." 하은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가방을 뒤적였다. 도윤도 따라 멈춰 서서 하은의 손끝을 바라보았는데, "이거 어제 너한테 빌린 거 같은데." 그녀가 내민 것은 작은 이어폰 케이스였다. 도윤은 그것을 보는 순간 눈을 크게 뜨며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어제 엘리베이터에서 장바구니를 받쳐 들 때 자기 주머니에서 떨어진 물건이었던 모양인데, 그 사실을 인지하는 데 몇 초가 걸렸다. "어, 이거..." 도윤이 케이스를 받아 들며 뚜껑을 열어 보니, 안에 들어 있어야 할 무선 이어폰 한쪽이 없었다.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지면서 손끝에 힘이 들어갔는데, 죽은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사 준 물건이라, 도윤에게는 남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한쪽이 없는데." "어? 진짜?" 하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순식간에 걷혔다. "어디서 빠졌나 보다, 잠깐만." 그녀가 놀란 얼굴로 자기 가방을 뒤집어 털어보고, 주머니까지 뒤집어 확인하더니, 결국 미안한 표정으로 도윤을 올려다보았다. "내일 그 자리 다시 가서 찾아볼게, 진짜 미안해. 나 때문에 잃어버린 거잖아." 도윤은 애써 괜찮다고 말했지만, 속으로는 그 이어폰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생각보다 크게 마음을 흔들었다. '별거 아닌데, 왜 이렇게 신경 쓰이지.' 케이스를 손에 쥔 채 집으로 걸어가는 내내, 도윤은 몇 번이나 그 안을 다시 열어보며 확인했지만 없는 것이 있을 리 없었다. *** 다음 날 저녁 6시, 아파트 화단 근처. 하은은 정말로 어제 그 자리로 돌아가 화단 풀숲을 뒤지고 있었는데, 무릎을 꿇은 채 손으로 풀잎을 하나씩 젖혀가며 흙바닥을 살피는 모습이 제법 진지했다. 도윤이 우연히 지나가다 그 모습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뭐 해?" "아, 그 이어폰!" 하은이 고개를 들며 이마에 흐른 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여기 어디 떨어졌을 거 같아서. 어제 여기 서서 가방 뒤졌으니까." 하은이 무릎까지 꿇고 풀숲을 손으로 헤집는 모습에, 도윤은 순간 마음이 조금 물러지는 걸 느꼈다. 저 정도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도윤은 별말 없이 옆에 쭈그려 앉아 함께 풀숲을 훑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손을 움직였고, 가끔 벌레가 튀어나올 때마다 하은이 짧게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로 젖히는 통에 도윤이 저도 모르게 웃음을 참는 일이 몇 번 반복되었다. 십 분쯤 함께 찾은 끝에, 화단 구석 흙 속에서 반짝이는 작은 물체가 발견되었다. "찾았다!" 하은이 환호성을 지르며 그것을 집어 들고 흙을 털어 도윤에게 건넸다. "자, 여기." 도윤이 이어폰을 받아 드는 순간, 손끝이 살짝 맞닿았는데, 그 짧은 접촉에 도윤의 손끝이 미세하게 굳었다. 손등을 타고 올라오는 온기가 낯설어서, 도윤은 얼른 이어폰을 케이스에 집어넣으며 시선을 피했다. 하은은 그런 반응을 눈치채지 못한 듯 웃으며 흙 묻은 손을 툭툭 털었다. "근데 이거 뭐 특별한 거야? 되게 아끼는 거 같던데." "우리 엄마가... 사 준 거야." 도윤이 짧게 답하자, 하은의 표정이 순간 조금 진지해졌다. 웃음기가 걷힌 얼굴로 하은이 물었다. "엄마가?" "돌아가셨어, 어릴 때." 도윤은 별일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말했지만, 그 말을 뱉은 뒤 스스로도 왜 이런 이야기를 굳이 꺼냈는지 알 수 없었다. 평소라면 누구에게도 쉽게 하지 않는 말이었는데, 화단에 나란히 앉아 있다 보니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모양이었다. 하은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람이 불어와 둘 사이의 침묵을 채우는 동안, 하은은 그저 도윤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도윤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며 말했다. "소중한 거 찾아서 다행이다." 그 짧은 말과 손길에, 도윤은 자기도 모르게 마음 한쪽이 스르르 풀리는 걸 느꼈다.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그 온기가 가슴께까지 천천히 번져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두 사람은 그 후로도 잠시 화단 근처에 앉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해가 완전히 저물고 가로등이 하나씩 켜질 때가 되어서야 각자의 집으로 헤어졌다. *** 같은 날 밤, 도윤의 방. 방으로 돌아온 도윤은 씻고 나와 침대에 걸터앉은 채, 손안의 이어폰 케이스를 몇 번이나 만지작거렸다. 흙이 채 지워지지 않은 케이스 모서리를 손끝으로 문지르다가, 도윤은 문득 노트북을 열어 인터넷 검색창에 습관처럼 반 친구들 이름을 하나씩 넣어보곤 했는데, 그날은 처음으로 '유하은'이라는 이름을 쳐 보았다. 별생각 없이 시작한 검색이었다. 그저 같은 반 친구니까, 궁금해서, 라는 정도의 마음이었는데. 놀랍게도 학교 축제 사진, SNS 팔로워 수천 명, 교내 커뮤니티 게시판의 팬 게시물까지 쏟아져 나왔다. 도윤은 마우스 스크롤을 내리는 손을 멈추지 못한 채, 화면 가득 뜬 사진들을 하나씩 눌러보았다. '교내 최고 미녀', '전 학년 남학생 이상형 1위' 같은 제목의 글들을 스크롤하며, 도윤은 자신이 낮에 그렇게 편하게 대했던 상대가 사실은 학교 전체가 주목하는 존재였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손끝이 마우스 위에서 잠시 멈췄다. 게시물 댓글 창에는 하은을 향한 온갖 찬사와 고백 같은 글들이 줄줄이 이어져 있었고, 그 밑으로 스크롤을 내릴수록 도윤은 자신이 서 있는 자리가 어디쯤인지 조금씩 명확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랑은 완전히 다른 세계 사람이구나.' 화단에서 흙을 만지고 웃던 하은의 모습과, 화면 속 화려한 사진들이 좀처럼 겹쳐지지 않았다. 무릎을 꿇고 풀숲을 뒤지던 그 손과, 사진 속에서 카메라를 향해 세련되게 웃고 있는 그 손이 같은 사람의 것이라는 게 이상하게 낯설었다. 도윤은 이어폰 케이스를 손에 쥔 채, 그 안에 담긴 감정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오랫동안 천장만 바라보았다. 노트북 화면은 아직도 하은의 사진들로 가득했지만, 도윤은 더 이상 그것을 넘겨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방 밖에서 아버지가 텔레비전을 끄는 소리가 들려왔고, 도윤은 그제야 휴대폰을 내려놓고 불을 껐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도 하은의 웃음소리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고, 도윤은 뒤척이다 결국 다시 이어폰 케이스를 협탁 위에 올려두며, 이 낯선 마음의 정체가 무엇인지 확신하지 못한 채로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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