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노을빛이 서류 더미 위로 붉게 번져 있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그 빛은 유독 짙고 탁했다. 마치 피가 서서히 번져가는 것처럼, 책상 위에 놓인 종이 뭉치들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나는 그 빛깔이 이상하게도 지금 이 방의 공기와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무겁고, 끈적하고, 벗어날 수 없는.
강서린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 숨소리가 이상하게 크게 들렸다. 방 안의 정적이 너무 완전해서, 아주 작은 소리도 증폭되어 귀에 박혔다. 나는 등 뒤로 문을 닫고 선 채, 도망칠 곳도 없이 그녀와 마주 서 있었다. 문고리를 잡았던 손바닥에는 땀이 배어 있었다.
"제안할 게 있어."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얼음 같았지만, 그 끝에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나는 그 떨림을 알아차리지 못한 척,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차리지 못한 척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알아차렸다는 뜻이라는 걸 나조차 모르지 않았다.
"뭔데요."
"다섯 명 중 한 명을 선택해."
순간 위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려 했지만, 그녀의 표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얼음처럼 굳은 얼굴, 그러나 그 아래로 무언가가 소용돌이치고 있다는 걸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네?"
"다섯 명 중 한 명. 은비, 예령, 다인, 시율, 그리고 나." 그녀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이름을 나열했다. 마지막에 자신의 이름을 말할 때, 목소리가 살짝 낮아졌다. "연인으로."
이름들이 하나씩 불릴 때마다, 머릿속에서 각각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은비. 카메라 앞에서 울먹이던 얼굴, 그리고 그 뒤에 숨겨져 있던 계산. 예령. 도서관 구석에서 내 소설의 문장을 손끝으로 짚으며 웃던 얼굴. 다인. 체육관 뒤편에서 나를 붙잡고 흔들던 손. 시율. 옥상에서 바람에 머리카락을 날리며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던 눈. 그리고 강서린. 지금 내 앞에서, 서류철을 손에 쥐고 서 있는 이 사람.
다섯 개의 얼굴이 순서대로 스쳐 지나가는 동안, 나는 그중 누구에게도 확실한 답을 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사실이 나를 더 초조하게 만들었다.
나는 말을 잃었다. 목구멍이 사포처럼 껄끄러웠다.
"그,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저는 그런 거 선택할 자격도, 이유도..."
"이유는 이미 만들어졌어." 그녀가 내 말을 자르며 서류철을 책상 위에 던졌다. 종이 뭉치가 책상 표면에 부딪히는 소리가 방 안에 크게 울렸다. 익명 게시판에 올라온 캡처 화면들이었다. 내 소설의 문장들, 하은비의 영상, 학생들의 댓글.
나는 그 캡처 화면들을 내려다보았다. 화면 속 문장 하나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내가 썼던 소설의 한 구절, 그리고 그 아래 달린 댓글. '이거 완전 현실 아니냐?' '남주 실화냐' '다섯 명이 다 진짜라는데?'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학교 전체가 네 소설과 현실을 겹쳐 보고 있어. 다섯 명이 너를 감싸는 모습을 봤고, 그걸 자기들 멋대로 해석했지. 소문은 이미 들불처럼 번졌어. 이대로 방치하면 너도, 우리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될 거야."
그녀의 손끝이 서류 모서리를 톡톡 두드렸다. 규칙적인 그 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더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저한테 한 명을 정하라는 거예요? 그게 해결책이라고요?"
"적어도 명확해지겠지." 그녀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흔들림이 없었지만, 나는 그 안에서 무언가 다른 감정이 일렁이는 것을 보았다. "애매한 상태로 다섯 명 모두에게 흔들리는 게, 지금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있어."
나는 그녀의 눈을 마주 보다가 시선을 피했다.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듯 뛰었다. 그 박동이 너무 커서, 그녀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싫으면요."
"싫으면?" 그녀가 반문했다. "선택하지 않으면 다섯 명 모두를 어중간하게 붙잡아두는 셈이 돼. 그건 너한테도, 그 애들한테도 좋을 게 없어."
논리적이었다. 지독하게 논리적이었다. 그런데 그 논리 뒤에 숨은 것이 무엇인지, 나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손끝이 서류 모서리를 만지는 방식, 시선이 나에게서 떠나지 않는 방식. 그건 단순한 생활지도위원장의 업무 처리가 아니었다.
나는 문득 그녀가 처음 이 방으로 나를 불러들였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도 그녀는 이렇게 서류를 펼쳐놓고, 나를 마주 보며 서 있었다. 그때는 그저 학교 규정 위반을 지적하는 자리였을 뿐인데, 지금은 완전히 다른 무게가 그 시선에 실려 있었다.
"생각할 시간을 좀... 주세요."
겨우 그 말을 뱉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얼마나."
"모르겠어요. 조금만."
그녀는 잠시 나를 응시했다. 그 침묵이 영원처럼 길었다. 시계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초침이 한 번, 두 번, 세 번 움직이는 소리까지 셀 수 있을 정도로 방 안은 조용했다.
이윽고 그녀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좋아. 하지만 너무 오래 끌지는 마."
그녀의 목소리 끝에 다시 그 떨림이 섞였다. 나는 그것이 초조함인지, 다른 무엇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녀 자신도 그 감정의 이름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문을 열었다. 손잡이가 차갑게 손바닥에 닿았다. 등 뒤에서 그녀의 시선이 여전히 나를 붙잡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복도로 나서자 노을빛이 더 강하게 눈을 찔렀다. 나는 눈을 찡그리며 걸음을 옮겼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다섯 개의 이름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은비, 예령, 다인, 시율, 강서린. 순서를 바꿔봐도, 다시 나열해봐도, 어느 하나 확실하게 걸러낼 수 없었다.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수업이 끝난 지 오래된 시간이었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미 집으로 돌아갔거나 동아리실에 모여 있을 시간이었다. 발소리만이 텅 빈 복도에 울렸다. 벽에 걸린 게시판, 낡은 사물함들, 창밖으로 보이는 운동장. 익숙한 풍경들이 오늘따라 낯설게 느껴졌다.
몇 걸음 걷지 않아, 복도 모퉁이에서 누군가와 마주쳤다.
차은서였다.
그녀는 창가에 기대어 서 있었다.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놀란 기색조차 없었다. 그 밝은 미소가 노을빛을 받아 더욱 환하게 빛났다. 그녀의 교복 리본이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얘기, 잘 끝났어?"
그녀가 물었다. 그 순간 나는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서늘함을 느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궁금함이 아니라,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자의 여유가 배어 있었다.
"...뭘요?"
내 목소리가 스스로 듣기에도 어색하게 갈라졌다. 되묻는 척했지만, 사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지.
"서린이랑." 그녀가 짧게 웃으며 벽에서 몸을 떼었다. 그 웃음소리는 청량했지만, 어딘가 계산된 듯한 리듬이 있었다. "생활지도부실 앞에서 다 들렸거든."
나는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심장이 다시 한번 크게 뛰었다. 벽이 얇았던가? 아니면 그녀가 일부러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어느 쪽이든, 그녀가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나를 더 궁지로 몰아넣었다.
"다섯 명 중에 한 명이라니." 그녀가 나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며 말을 이었다. 걸음걸이는 여유로웠지만, 그 눈빛만큼은 정확하게 나를 향하고 있었다. "재밌는 제안이네. 서린이답게 논리적이고, 서린이답게 이기적이고."
"이기적이라니, 그게 무슨..."
"몰랐어?" 그녀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 몸짓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더 불편하게 느껴졌다. "다섯 명 중 하나를 고르라는 말, 결국 자기가 그 다섯 명 안에 끼어 있다는 뜻이잖아. 애초에 자기가 후보에서 빠질 이유가 없었을 텐데도."
나는 그 말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녀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강서린은 스스로를 다섯 명의 후보 중 하나로 넣었다. 생활지도위원장이라는 위치에서, 학교의 소문을 잠재우기 위한 해결책이라는 명분으로. 그 명분 뒤에 감춰진 것이 무엇인지, 이제는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럼 은서 씨는요." 나는 겨우 물었다.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은서 씨는 왜 여기 있는 거예요."
그녀가 걸음을 멈췄다. 나와의 거리가 한 걸음 정도로 줄어들어 있었다. 노을빛이 그녀의 얼굴 절반을 붉게 물들이고, 나머지 절반은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다. 그 대비가 이상하게도 그녀의 표정을 읽기 어렵게 만들었다.
"나?" 그녀가 웃었다. 그 미소는 여전히 완벽했지만, 그 완벽함이 지금처럼 소름끼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나는 그냥, 재밌어서."
"재밌어서요?"
"응." 그녀가 나를 지나쳐 걸어가며 말을 덧붙였다. 어깨가 살짝 스쳤다. "다섯 명 중에 몇 명이 진심이고, 몇 명이 그냥 게임을 하고 있는지. 그거 지켜보는 게 얼마나 재밌는데."
나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그녀의 발소리가 복도 끝으로 멀어져 갔다. 뒤돌아보지 않은 채, 그녀는 손을 흔들었다.
"선택 잘해. 나도 궁금하니까."
그 말이 복도에 남긴 여운은, 노을빛보다 더 오래, 더 끈질기게 내 등을 짓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