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무명작가, 여주는 다섯

2화

[차은서 시점] 체육관을 빠져나오면서도 나는 웃고 있었다. 겉으로는. 입꼬리는 완벽하게 올라가 있었고, 눈매는 부드럽게 휘어 있었다. 지나가는 아이들이 나를 보며 수군거려도, 그 웃음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나는 그 정도는 할 수 있었다. 표정 관리쯤, 초등학교 때부터 훈련된 근육이었으니까. 속으로는 다른 이야기가 흐르고 있었다. 위장이 서서히 조여드는 느낌.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 나는 걸음을 옮기는 내내 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어디서부터 어긋났는지, 무엇을 놓쳤는지. 벌칙 게임 따위는 애초에 아무 의미도 없었다. 게임에서 진 건 사실이었지만, 벌칙의 대상을 정할 때 나는 이미 계산을 마쳤다. 학교에서 가장 존재감 없는 남학생, 이도윤. 그를 골랐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아이였으니까. 아무리 짓밟아도 뒤탈이 없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그 애를 이용해 다른 목적을 이루려 했다. 같은 반 남학생 중에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 정지훈. 축구부 주장이자 학년에서 가장 인기 많은 남자애. 그 애가 요즘 눈여겨보던 여자애가 있었는데, 그 여자애 — 서하윤 — 무리가 요 며칠 나를 미워하고 있었다. 지나가면서 들으라는 듯 하던 말들, 사물함에 붙어 있던 조롱 쪽지, SNS에 은근히 올라오던 저격글들. 그 애들 무리가 본격적으로 나를 몰아세우려는 조짐이 있었다. 나는 먼저 웃음거리를 만들어 그 흐름을 뒤집으려 했다. 계획은 단순했다. 도윤이라는 무해한 표적을 골라 벌칙이라는 명분으로 조롱하면, 그 자리에 있던 남학생들 — 특히 내가 좋아하던 지훈이 — 앞에서 내가 여전히 학교의 중심이라는 걸, 재미있고 대담하고 사랑스러운 여자애라는 걸 다시 확인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서하윤 무리가 뭐라 떠들든, 지훈이의 시선이 나에게 머무는 순간 나는 다시 승자가 될 터였다. 계산은 완벽했다. 완벽했어야 했다.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몇 번이나 돌렸는지 모른다. 도윤이 얼굴을 붉히고, 아이들이 웃고, 지훈이가 나를 보며 피식 웃는 그 장면. 나는 그 장면을 몇 번이나 재생했다. 실패할 수 없는 그림이었다. 그런데 강서린이 끼어들었다. 서린이 등장한 순간, 나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직감으로 알았다. 완벽초인이라 불리는 그 생활지도위원장이 이런 사소한 소란에 끼어드는 일은 거의 없었다. 평소 서린은 웬만한 일에는 무심했다. 규율에 어긋나지 않으면 눈길도 주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마치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정확한 타이밍에 나타나 상황을 뒤집었다. 그 표정이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 서늘하게 굳은 눈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목소리. "그만해." 딱 두 마디였다. 그런데 그 두 마디에 체육관 전체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뒤이어 하은비가, 황보예령이, 유다인이, 이시율이 차례로 몰려들었다. 하은비는 캠코더를 든 채 헐레벌떡 뛰어왔고, 황보예령은 평소의 여유로운 걸음이 아니라 거의 뛰다시피 다가왔다. 유다인은 운동복 차림 그대로 체육관 문을 박차고 들어왔고, 이시율은 도서부실에서 뛰어나온 듯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것도 우연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즉각적이었다. 나는 뒤늦게, 정말 뒤늦게 알았다. 저 다섯 명이 이도윤이라는 아이를 이미 주시하고 있었다는 것을. 왜? 그 물음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도윤은 존재감 없는 애였다. 반에서 이름도 잘 안 불리는, 그런 애였다. 그런 애를 저 다섯 명이, 학교에서 제일 화려하고 제일 주목받는 다섯 명이 동시에 신경 쓰고 있었다니. 나는 그 이유를 그날 밤 알게 되었다. 집에 돌아와 씻고, 침대에 엎드려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손가락이 저절로 학교 익명 게시판 앱을 찾아 눌렀다. 낮에 있었던 소동이 벌써 올라와 있었다. 제목만 봐도 심장이 철렁했다. 「오늘 체육관에서 있었던 일 아는 사람?」 조회수가 벌써 수천을 넘어 있었다. 나는 손끝이 차가워지는 걸 느끼며 게시글을 눌렀다. 누군가 몰래 찍은 영상이었다. 하은비의 캠코더에서 흘러나온 것인지, 아니면 그 자리에 있던 다른 누군가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화면 속에서 나는 도윤에게 다가가 웃으며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었고, 다음 순간 서린이 걸어 들어와 내 손목을 잡아 세웠다. 영상 아래 댓글이 폭발적으로 달려 있었다. 새로고침을 할 때마다 숫자가 늘어났다. "저거 그 웹소설 아니야?" "뭔 웹소설?" "검색해봐. '눈부신 학원에서 다섯 명의 여자친구와 함께하는 달콤한 나날'. 주인공 이름이 이도윤인데." 나는 그 문장을 세 번 읽었다. 그리고 손가락이 저절로 검색창을 눌렀다. 나는 그 웹소설을 검색했다. 그리고 첫 화를 읽는 순간, 등줄기에 얼음물이 쏟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주인공은 존재감 없는 남학생. 학교 최고의 미소녀에게 벌칙으로 거짓 고백을 받고 모욕당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다섯 명의 여학생이 나타나 그를 감싼다. 생활지도위원장, 방송부 신입생, 영애, 체육부 스타, 도서부 문학소녀. 나는 화면을 몇 번이나 위로 쓸어 올리며 다시 읽었다. 손이 떨렸다. 문장 하나하나가 오늘 낮의 장면과 거의 겹쳐졌다. 체육관의 조명, 아이들의 웅성거림, 서린이 걸어 들어오던 걸음걸이까지도. 나는 소설 속 '학교 최고의 미소녀' 캐릭터의 이름을 확인했다. '채은희'. 너무 노골적이었다. 나는 실소가 나왔다. 차은서, 채은희. 한 글자만 바꾼 이름. 이렇게 대놓고 자신을 드러낼 필요가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다음 문단을 읽었다. 소설 속 채은희는 오만하고, 계산적이고, 결국 남주인공에게 완벽하게 응징당하는 악역이었다. 이도윤, 그 무해해 보이던 애가 이런 걸 쓰고 있었다니. 그리고 그게 오늘, 그대로 현실이 되어버렸다니. 우연일까? 아니면 이도윤이 자신의 소설 설정을 현실에서 재현하려고 오늘 일을 유도한 걸까? 나는 그 가능성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벽에 등을 기대고, 도윤의 표정을 떠올려 보려 애썼다. 벌칙을 받던 순간, 그 애는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눈동자가 흔들리고,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건 연기가 아니었다. 나는 그런 표정을 알아볼 수 있었다. 진짜 당황과 가짜 당황은 결이 다르다는 걸, 나는 오랫동안 표정을 관리해온 사람으로서 구별할 수 있었다. 나는 곧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다. 저런 표정으로 무너지던 애가, 저렇게까지 정교하게 상황을 조작할 수는 없다. 그건 오히려 다섯 여자애들 쪽이 소설을 읽고 상황에 편승했을 가능성이 더 커 보였다. 그렇다면 저 다섯 명은 대체 언제부터, 왜 그 소설을 읽고 있었던 걸까. 그리고 왜 하필 그 순간에, 그렇게 정확하게 나타났던 걸까. 머릿속이 뒤엉켰다. 실이 풀리다가 다시 엉키는 느낌이었다. 어느 쪽이든, 나에게 중요한 건 하나였다. 내 계획은 완전히 망가졌다. 나는 스마트폰을 침대 위에 던지듯 내려놓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형광등 불빛이 눈을 찔렀다. 이제 학교 전체는 내가 아니라 이도윤을 주목하고 있었다. 나는 조롱을 준 가해자로, 그것도 다섯 미소녀에게 응징당한 우스운 가해자로 낙인찍히고 있었다. 정지훈의 시선을 사로잡으려던 계획은, 이제 나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계획이 되어 돌아왔다. 나는 이불을 걷어차며 몸을 일으켰다. 방법을 바꿔야 했다. 가만히 앉아서 무너지는 건 내 방식이 아니었다. 나는 언제나 상황을 뒤집는 사람이었다. 초등학교 때도, 중학교 때도. 밀려나는 순간이 오면, 나는 그 밀려남을 다른 방향의 도약으로 바꿔왔다. 만약 이 상황이 학원 전체의 화제가 된다면, 오히려 나는 그 화제의 중심에서 완전히 밀려나는 대신 — 그 흐름에 다시 올라탈 수도 있었다. 이도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다가가는 모습을 보인다면. 눈물까지 곁들이면 더 좋겠지. 아이들은 극적인 반성을 좋아한다. 그렇다면 나는 다시 주목받는 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다섯 명과 경쟁하는 여섯 번째 자리 정도는, 충분히 매력적인 위치였다. 게다가 소설 속 주인공이 실제로 인기 폭발 중인 존재라면 — 그 인기의 온기를 나눠 받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서하윤 무리가 나를 저격하던 흐름도, 이 화제 하나로 완전히 덮어버릴 수 있을 터였다. 나는 씩 웃었다. 그 웃음에 진심이 얼마나 섞여 있었는지는, 나조차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나는 이도윤이라는 애를, 이제 다르게 봐야 했다. 무해한 표적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변수로. 그리고 변수는, 이용할 방법을 찾으면 오히려 기회가 되는 법이었다. 나는 휴대폰 화면을 다시 켰다. 웹소설 목록 화면에는 '달빛조각가' 작가의 최신 연재작 조회수가 실시간으로 치솟고 있었다. 하루 사이에 조회수가 열 배는 뛴 것 같았다. 댓글 수도 세 자릿수를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스크롤을 내리며 그 숫자들이 올라가는 속도를 지켜보았다. 댓글창에는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이거 실화냐?" "작가가 청람고 다니는 거 아니야?" "소설 속 이름이랑 학교 애들 이름 비슷한 거 봤냐." "채은희 검색해봤는데 완전 그 사건 여주 그대로임 ㄷㄷ" "근데 진짜 다섯 명 맞음? 생활지도위원장이랑 방송부 걔랑 체육부 걔?" "오늘 체육관에 있었던 사람 나와서 목격담 좀" 나는 그 댓글들을 하나하나 읽으며, 입꼬리를 천천히 끌어올렸다. 얼음처럼 차가웠던 손끝에 서서히 온기가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생각한 순간, 오히려 다른 문이 열리고 있었다. 내일이면, 이 학교는 완전히 다른 곳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다른 곳에서 다시 한 번 내 자리를 만들어낼 생각이었다. 댓글창이 새로고침될 때마다 숫자가 또 늘어났다. 나는 화면을 끄지 않은 채로, 그 불빛을 마주 보며 오래도록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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