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이도윤 시점]
축제 준비 기간의 청람고등학교는 평소보다 소란스러웠다. 복도마다 현수막을 붙이는 아이들, 체육관에서 들려오는 밴드부의 어설픈 합주, 창문마다 붙은 색종이 조각들. 계단 난간에는 반별 부스 홍보 포스터가 겹겹이 붙어 있었고, 급식실 앞에는 축제 마스코트 인형탈을 쓴 누군가가 어색하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학교 전체가 들뜬 공기로 부풀어 있었다.
나는 그 모든 소음의 바깥에 서 있었다.
정확히는, 그 소음이 나를 통과해 지나갔다. 마치 내가 투명한 유리창이라도 되는 것처럼, 웃음소리와 발걸음과 시선들이 나를 관통해서 저 너머의 누군가에게 닿았다. 나는 그 시선의 종착지가 되어본 적이 없었다.
나는 2학년 3반 이도윤. 인터넷에서는 필명 '달빛조각가'로 웹소설 '눈부신 학원에서 다섯 명의 여자친구와 함께하는 달콤한 나날'을 연재하고 있었고, 매달 삼십만 원 남짓의 수익을 벌었다. 댓글창에서는 나름 인기 작가였다. 독자들은 내가 쓴 여주인공들의 대사에 웃고 울었고, 다음 화를 기다리며 알림 설정을 해두었다. 하지만 그건 화면 너머의 이야기였다. 현실에서는 친구가 없었고, 존재감도 없었다. 교실 뒤편 창가 자리, 그게 내 좌표였다. 쉬는 시간마다 나는 이어폰을 끼고 휴대폰 메모장에 다음 화 구상을 적었다. 그게 내 일상의 전부였다.
그런데 그날은 좀 달랐다.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사물함 문틈에 종이 한 장이 꽂혀 있었다. 처음엔 무시하려 했다. 어차피 반 아이들이 돌리는 축제 부스 홍보물이겠거니 했다. 하지만 종이를 꺼내는 순간 손끝에 느껴지는 감촉이 달랐다. 편지지처럼 얇고 매끄러운 종이, 정성스럽게 접힌 모양새. 나는 그것을 펼쳤다.
낯선 필체였다. 동그랗고 조심스러운 글씨. "할 말 있어. 방과 후, 체육관 뒤에서 기다릴게." 서명은 '차은서'였다.
차은서. 학원 최고의 미소녀. 복도를 걸을 때마다 남학생들의 시선이 파도처럼 따라붙는 그 이름. 급식실에서 그녀가 지나가면 줄을 서 있던 남자애들이 하나같이 목을 길게 빼고 쳐다보곤 했다. 나 같은 사람은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할 존재.
나는 그 쪽지를 받고 세 번을 다시 읽었다. 글자 하나하나를 손끝으로 짚어가며, 혹시 내가 잘못 본 게 아닐까 확인했다. 손끝이 떨렸다.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듯 뛰었다. 교실 뒷자리에서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데도, 나는 얼굴이 붉어지는 걸 감추려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나는, 정말로 바보처럼, 기대했다.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릴 때까지 나는 시계만 쳐다봤다. 국어 시간엔 선생님이 뭘 설명하는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온갖 상상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혹시 나에게 관심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내 웹소설을 어떻게 알고, 그 얘기를 하고 싶은 걸까.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정말로 고백이라도 하려는 걸까. 나는 그 상상을 하다가 스스로 부끄러워져서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다. 나 같은 사람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다. 하지만 그 부정 뒤에도 기대는 사라지지 않고 명치 아래에 웅덩이처럼 고여 있었다.
방과 후, 나는 가방을 대충 걸치고 체육관 뒤편으로 향했다. 걸음이 자꾸 빨라졌다가, 다시 느려졌다가 했다. 체육관 뒤편에는 이미 은서가 서 있었다. 밝은 미소, 단정한 교복, 바람에 살짝 흔들리는 머리카락. 늦은 오후의 햇살이 그녀의 머리카락 끝에 걸려 금빛으로 반짝였다. 나는 다섯 걸음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 이상은 다가갈 자신이 없었다.
"저... 무슨 일이세요?"
내 목소리는 사포처럼 껄끄러웠다. 목구멍 안쪽이 바싹 마른 느낌이었다.
은서가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 완벽해서, 나는 잠시 숨을 쉬는 법을 잊었다. 눈꼬리가 살짝 접히고,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가는 그 표정을, 나는 그동안 복도에서 스쳐 지나가며 몇 번 훔쳐본 적이 있었다. 그 표정이 지금 나만을 향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도윤아." 그녀가 내 이름을 불렀다.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같은 학년이라는 것 외에 어떤 접점도 없었으니까. "나, 사실 너 좋아해."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발밑의 땅이 기울어지는 듯한 감각.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만 벌렸다가 다물었다.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서 그녀에게도 들릴까 걱정될 정도였다. 이게 정말 현실인가. 내 인생에도 이런 순간이 오는구나. 웹소설 속 남주인공들이 느꼈을 그 감정을, 나도 지금 느끼고 있는 걸까.
그 순간, 체육관 모퉁이에서 웃음소리가 터졌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튀어나왔다. 다섯 명, 여섯 명. 낯익은 얼굴들. 은서와 같은 반 남학생들이었다. 누군가는 배를 잡고 웃었고, 누군가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낄낄거렸다.
"야, 진짜 했다!"
"대박, 저 표정 봐! 완전 심각했는데?"
"찍었어, 찍었어? 편집 각도 좀 봐줘."
누군가 휴대폰을 들이대고 있었다. 렌즈가 정확히 내 얼굴을 향해 있었다. 나는 그제야 이해했다. 벌칙 게임. 그들의 게임 속에서 내가 벌칙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은서는 지고 있던 게임의 벌칙으로, 학교에서 가장 존재감 없는 남학생에게 거짓 고백을 하는 미션을 받았고, 나는 그 미션의 도구였다. 방금 전까지 진짜라고 믿었던 그 미소가, 사실은 정교하게 설계된 연기였다는 걸 깨닫는 순간, 뭔가가 목 안에서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웃음소리가 들불처럼 번졌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가, 곧 핏기가 사라졌다. 손끝이 차가워지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나를 향한 시선들 하나하나가 바늘처럼 찔러왔다.
"미안, 미안." 은서가 웃음을 참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 손짓조차 우아했다. "진짜 아니고. 벌칙이었어. 너무 몰입한 거 아니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목구멍이 막힌 것처럼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위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방금까지 심장을 두드렸던 그 두근거림이, 이제는 전혀 다른 이유로 심장을 짓누르고 있었다. 부끄러움과 모욕감이 뒤섞여 명치를 짓눌렀다. 몇몇은 여전히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이 순간이 어딘가에 영상으로 저장되고, 어쩌면 누군가의 SNS에 올라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때였다.
"그만해."
낮고 단정한 목소리가 체육관 뒤를 갈랐다. 웃음소리가 순식간에 멈췄다. 마치 스위치가 꺼진 것처럼.
강서린이었다. 생활지도위원장, 긴 검은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은 그 완벽초인.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은서와 그 무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빛 하나에, 방금까지 낄낄대던 아이들의 표정에서 웃음이 지워지는 게 보였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사람을 조롱거리로 쓰는 게 재밌어?" 서린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수록 무리는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쳤다. "이거 학생부 사안으로 올릴까? 명예훼손, 학교폭력 사안으로 접수하면 너희들 몇 명이 징계위원회에 서게 될 것 같은데."
무리가 순식간에 흩어졌다. 누군가는 휴대폰을 황급히 주머니에 넣었고, 누군가는 그대로 뒤돌아 뛰었다. 은서는 당황한 얼굴로 뭐라 말하려다, 결국 입을 다물고 자리를 떴다. 마지막으로 나를 돌아보는 그녀의 눈빛에 아주 잠깐 미안함이 스친 것 같았지만, 그것도 곧 사라졌다.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무릎이 후들거려서 그대로 주저앉을 것 같았다.
"괜찮아?"
또 다른 목소리. 핑크빛 숏컷의 하은비가 어느새 옆에 와 있었다. 손에는 늘 들고 다니는 소형 캠코더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그 캠코더를 슬쩍 가방 안에 밀어넣었다. 마치 방금 벌어진 일을 찍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감추려는 것처럼.
"도윤 선배, 완전 안색 안 좋아요. 물 좀 마셔요."
그녀가 내밀어준 물병을 나는 반사적으로 받았다. 손이 떨려서 뚜껑을 여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저기, 이것 좀 먹어봐." 황보예령이 어느 틈에 다가와 곱게 포장된 과자 상자를 내밀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온화했다. 상자 안에는 작은 마카롱 몇 개가 정갈하게 담겨 있었다. "당 떨어지면 안 좋아요. 놀랐을 때는 단 걸 먹어야 해요."
"뭐야, 다들 벌써 알고 왔어?" 유다인이 뒤늦게 뛰어와 어깨를 툭 쳤다. 갈색으로 그을린 피부에 땀이 반짝였다. 체육관 반대편에서 달려온 듯 숨이 가쁜 채였다. "야, 저런 거에 무너지면 안 돼. 일어나. 그런 놈들한테 무너지는 거 나 진짜 싫어."
그녀의 손이 내 어깨를 잡고 억지로 세워 일으켰다. 그 손아귀에 실린 힘이 이상하게도 든든했다.
마지막으로, 조용히 다가온 사람은 이시율이었다. 검고 윤기 나는 미디엄 헤어가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내 옆에 서서, 그저 내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도윤아."
어릴 적 친구. 나를 그렇게 부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많이 놀랐지."
그 말 한마디에, 나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참았다. 참아야 했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우는 것만큼은 견딜 수 없었다.
다섯 명의 얼굴을 순서대로 훑어보았다. 서린의 냉정한 눈빛, 은비의 걱정스러운 표정, 예령의 온화한 미소, 다인의 다부진 얼굴, 시율의 조용한 시선. 각자 다른 방식으로 나를 향해 있었지만, 그 방향은 하나같이 나였다.
왜 이 다섯이, 하필 나를 감싸는 걸까.
나는 알지 못했다. 그날, 나는 그저 굴욕과 안도가 뒤섞인 감정 속에서 흔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방금까지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이상하게도 그 무너진 자리를 다섯 개의 손길이 받쳐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낙차가 너무 커서, 나는 오히려 더 어지러웠다.
그리고 그때는 몰랐다. 이 순간이, 앞으로 벌어질 모든 소란의 시작점이라는 것을.
서린이 나를 향해 돌아섰다. 그녀의 눈빛에 어떤 결심이 스치는 것을, 나는 그때는 읽어내지 못했다. 다른 네 사람의 얼굴에도 순간 비슷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는 것을, 나는 나중에야 되짚어보게 되었다.
"이도윤."
그녀가 내 이름을 불렀다. 처음으로, '가칭'이 아니라.
"할 얘기가 있어. 나중에."
그 목소리에는 방금 은서 무리를 몰아붙였을 때와는 다른 떨림이 섞여 있었다. 아주 미세했지만, 분명히 있었다. 나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인이 내 등을 툭 쳤고, 은비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병을 다시 챙기라는 손짓을 했다. 예령은 마카롱 상자를 내 손에 쥐여준 채 조용히 웃었다. 시율은 아무 말 없이 내 곁에 서 있었다. 다섯 개의 시선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함께 지키려는 사람들처럼.
나는 그 시선들 속에서, 이유도 모른 채 서 있었다. 방금 겪은 굴욕이 아직도 몸 어딘가에 남아 떨리고 있었지만, 그 떨림 사이로 낯선 온기가 스며들고 있었다.
체육관 뒤편의 바람이 다시 불었다. 색종이 조각 하나가 발밑으로 날아와 떨어졌다. 나는 그것을 주우려다 멈췄다. 그리고 다섯 사람의 얼굴을 다시 한 번 훑어보았다.
서린의 저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그날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곱씹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