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왕따 선배, 사실은 오빠

5화

교문 앞, 박준혁이 서아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어, 저 얼굴 처음 보는데?" 옆에 있던 친구가 히죽 웃었다. "신입생인가? 예쁘네." "몇 반인지 알아?" "모르지, 이제 알아봐야지." 박준혁이 팔짱을 낀 채 서아 쪽으로 턱을 까딱였다. 친구가 낄낄거리며 그 어깨를 툭 쳤다. 서아는 그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숙인 채 빠르게 지나갔다. 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운동화 밑창이 아스팔트를 타박타박 두드렸다. 도현은 몇 걸음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등에 멘 책가방 끈을 꽉 움켜쥔 손끝이 하얘졌다. 박준혁이 서아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그 시선이 서아의 어깨에서 허리께로 슬쩍 내려가는 게 보였다. 도현의 손끝이 저절로 오므려졌다. '저 눈빛, 마음에 안 드는데.' 관자놀이가 지끈, 울렸다. 당장이라도 다가가서 저 시선을 걷어차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나서면 오히려 이상해 보일 뿐이었다. 오빠도 아니고, 애인도 아니고, 아무 사이도 아닌데. 계약서에 적힌 조항들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남처럼 지낼 것. 불필요한 접촉 금지. 학교에서 특별히 아는 척하지 않기. 도현은 시선을 거두고 조용히 교실로 향했다. 어금니를 슬쩍 깨물었다가 풀었다. 교실에 도착하자마자, 서아가 2학년 3반이라는 소문이 벌써 돌고 있었다. "저기 신입 전학생, 완전 예쁘다던데." "어디서 왔대?" "몰라, 근데 준혁이가 벌써 관심 있대." "헐, 벌써?" "쟤 원래 빨라. 어제 오늘 전학 왔는데 벌써 이름까지 알아냈다니까." 도현은 그 대화를 흘려들으며 자리에 앉았다. 속이 이상하게 불편했다. 가슴 한가운데가 꽉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내가 왜 이러지.' 말도 안 되는 감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한유리가 지나가며 슬쩍 말을 걸었다. "너 표정이 왜 그래." "신경 꺼." "어머, 관심 있는 척은." "뭔 소리야." "됐고. 딴 데 보지 마, 티 다 나." 한유리가 냉소적으로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화난 복어처럼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가 이내 픽 웃고는 자기 자리에 앉았다. 도현은 그저 창밖을 바라보았다. 운동장에서 축구공이 튀는 소리, 아이들이 웃는 소리가 멀게 들렸다. 손가락으로 책상 모서리를 톡톡 두드리며 애써 딴생각을 하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날 하루, 도현은 몇 번이나 복도에서 서아와 마주쳤다. 매점 앞에서 한 번, 계단 중간에서 한 번, 화장실 앞에서 또 한 번. 서아는 그때마다 눈을 마주치지 않고 지나갔다. 작은 목례만 겨우 나눴다. 고개가 아래로 15도쯤, 딱 그만큼만 숙어졌다가 다시 올라왔다. 규칙은 잘 지켜지고 있었다. 지나칠 정도로 잘. '저렇게까지 안 봐도 되는데.' 도현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방금까지 아는 척하지 말라고 계약서까지 들이밀었던 건 자신인데. 그런데 방과 후, 신발장 앞에서 박준혁이 서아를 붙잡고 서 있는 게 보였다. "저기, 이름이 뭐야?" "윤서아예요." "어느 반이야?" "3반이요." "번호 좀 알려줄래?" 서아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겁먹은 토끼처럼 눈이 동그랗게 커진 채 시선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신발장 문에 손이 닿아 있었지만 열 틈이 없었다. 박준혁의 팔이 자연스럽게 신발장 옆을 짚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그게……" "그냥 번호만. 어렵게 생각하지 마." 박준혁이 씩 웃으며 한 걸음 더 다가섰다. 도현은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췄다. 심장이 쿵, 하고 크게 뛰었다. '가만있어야 하는데.'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다리가 저절로 그쪽으로 움직였다. 발끝이 바닥을 타타닥 밟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뭐 하는 거예요." 도현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박준혁이 뒤돌아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넌 왜 끼어들어." "신발장 막고 있잖아요. 다른 애들 못 지나가요." 핑계 같은 이유였지만, 그럴싸하게 나왔다. 주변을 슬쩍 둘러보니 마침 지나가려던 학생 두어 명이 걸음을 멈추고 눈치를 보고 있었다. 타이밍이 절묘했다. "어, 저기 좀……" 지나가려던 학생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자 박준혁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박준혁이 도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어제 골목에서의 일을 떠올린 듯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 골목에서 도현이 어떻게 나섰는지, 어떤 눈빛으로 자신을 봤는지, 아직 몸이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알았어, 간다." 박준혁이 짧게 혀를 차며 자리를 떴다. 가는 길에 곁눈질로 도현을 한 번 흘겨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서아가 안도한 표정으로 도현을 보았다. 어깨에 잔뜩 들어가 있던 힘이 스르르 풀리는 게 눈에 보였다. "감사합니다, 선배." "됐어. 조심해서 다녀." 도현은 짧게 말하고 몸을 돌렸다. 심장은 아직도 진정되지 않은 채 쿵쿵 울리고 있었다. '별거 아니야, 신발장 때문에 그런 거야.' 스스로에게 그렇게 되뇌었지만 걸음이 평소보다 빨랐다. 뒤에서 서아의 시선이 오래 머무는 걸 느꼈지만 모른 척했다. 목덜미가 따가운 느낌이 들었다. 돌아보지 않으려 애를 써야 했다. 그날 저녁, 집에서의 식사 자리. 네 가족이 다시 식탁에 모였다. 김치찌개 냄비에서 올라오는 김이 식탁 위를 자욱하게 채우고 있었다. 분위기는 이제 조금 자연스러워져 있었다. 수저 부딪히는 소리,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뉴스 소리가 적당히 뒤섞였다. 강미영이 서아에게 물었다. "학교는 어땠어? 힘든 거 없었니?" "괜찮았어요. 도현 오빠가……" 서아가 말을 하다가 순간 멈칫했다. 하마터면 '선배가 도와줬어요'라고 할 뻔했다. 입 밖으로 나오기 직전에 겨우 삼켰다.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오빠가, 뭐?" 이정호가 궁금한 얼굴로 되물었다.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으려다가 손을 멈춘 채였다. "아, 그냥…… 오빠가 학교에서도 잘 지내고 있을 것 같아서요." 서아는 억지로 문장을 이어 붙였다. 말끝이 살짝 떨렸다. 도현은 국그릇에 시선을 고정한 채 숨을 죽였다. 숟가락을 든 손이 미세하게 굳어 있었다. '제발, 여기서 끝나라.' 이정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둘이 학교에서 마주친 적 있어?" 짧은 정적이 흘렀다. 냄비에서 나던 김 소리마저 잦아드는 것 같았다. 서아와 도현의 눈이 동시에 흔들렸다. "아니요, 그럴 리가요." 서아가 얼른 대답했다. 목소리가 살짝 빠르게 나왔다. "학교가 커서 마주칠 일이 없을 것 같은데요." 도현이 뒤늦게 말을 덧붙였다. 자기 목소리가 너무 태연한 게 오히려 부자연스럽게 느껴져서 속으로 아차 싶었다. 이정호는 대답을 듣고도 완전히 개운하지 않은 표정이었다. 숟가락을 든 손이 잠시 멈춰 있었다. 시선이 서아에게서 도현에게로, 다시 서아에게로 천천히 오갔다. "그래? 이상하게 둘 다 표정이……" 말을 끝맺지 않은 채, 이정호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눈빛에 무언가를 눈치챈 기색이 스쳤다. 강미영도 슬며시 시선을 옮겨 도현과 서아를 살폈다.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둘이 무슨 일 있었어?" "아니요, 진짜 아무 일 없었어요." 서아가 다급하게 손사래까지 쳤다. 그 몸짓이 오히려 더 의심스러워 보인다는 걸 서아 자신은 미처 알지 못했다. 식탁 위, 수저 소리마저 멈춘 짧은 순간. 도현의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리고,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이정호의 눈빛이 점점 더 날카롭게 좁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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