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왕따 선배, 사실은 오빠

3화

거실 한가운데,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느껴졌다. 에어컨 바람 소리마저 사라진 것 같았다. 거실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 소리만 유독 크게 들렸다. 소녀도 도현을 알아본 듯 눈이 커졌다.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가 다시 다물렸다. '저 애가……' 도현의 관자놀이에서 맥박이 세게 뛰었다. 목덜미를 타고 서늘한 감각이 번졌다. 불과 몇 시간 전, 골목 어귀에서 마주쳤던 그 얼굴. 겁먹은 토끼처럼 굳어 있던 눈동자. 그 눈동자가 지금, 아버지의 거실에서 자신을 마주 보고 있었다. 이정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환하게 웃었다. 소파 팔걸이를 짚고 일어서는 몸짓이 유난히 가벼웠다. "도현아, 인사해. 이쪽은 강미영 씨야." 강미영이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와 차분한 미소가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안녕, 도현이구나. 얘기 많이 들었어." 도현은 그저 뻣뻣하게 서 있었다. 입이 열리지 않았다. 발끝부터 정수리까지 얼어붙은 느낌이었다. '인사를 해야 하는데.' 머리로는 알았지만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쪽은 서아. 미영 씨 딸이야." 이정호가 소녀 쪽을 가리켰다. "윤서아예요. 잘 부탁해요." 소녀, 서아가 작게 인사했다.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은 자세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도현은 여전히 아무 말도 못 했다. '아까 그 애잖아.' 심장이 바닥으로 쿵 떨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 좁은 도시에서, 이렇게 우연이 겹칠 수 있나. 아니, 우연이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도현의 머릿속에서 온갖 물음표가 뒤엉켜 소용돌이쳤다. 이정호는 도현의 침묵을 눈치채지 못한 듯 계속 말을 이었다. 그는 두 손을 마주 비비며 소파에 다시 앉았다. "사실은, 미영 씨랑 나 결혼하기로 했다." 순간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거실 안의 모든 소리가 한꺼번에 사라진 듯했다. 벽시계 초침 소리마저 뭉개져 들렸다. "……결혼이요?" 겨우 나온 말이었다.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응. 갑작스럽지, 알아. 근데 이렇게 좋은 사람 만나기 쉽지 않더라고." 이정호가 강미영의 손을 슬쩍 잡았다. 두 사람의 눈빛이 다정하게 얽혔다. 손을 맞잡는 그 짧은 동작 하나에, 이 자리가 이미 오래전부터 계획된 것이었음을 도현은 직감했다. 자신만 몰랐던 이야기.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자신을 빼놓고 진행된 결정. 도현은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서아를 다시 보았다. 서아 역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같은 것을 떠올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말하면 안 돼.' 같은 생각이 두 사람의 머릿속을 동시에 스쳤다. 오늘 낮, 골목에서 있었던 일. 남자에게 손목을 잡혔던 그 순간. 숨이 턱 막히도록 겁에 질렸던 그 표정. 그리고 그걸 구해준 사람이 지금 이 집의 아들이라는 사실. 서아의 손끝이 무릎 위에서 살짝 오므려졌다. 손톱이 치맛자락을 파고들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도현이 너, 표정이 왜 그래?" 이정호가 물었다. "아, 아니에요. 그냥…… 놀라서요." "그렇겠지. 나도 처음엔 그랬어." 이정호가 하하 웃었다. 분위기를 풀려는 그의 노력이 오히려 어색함을 더 짙게 만들었다. 강미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찻잔을 매만지던 손가락이 잠시 멈췄다. "도현이, 갑자기 이런 얘기 들어서 많이 당황했지. 미안해." "아니에요, 괜찮아요." 도현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표정이 어색하게 굳어 있었다. 웃는 얼굴을 만드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인 줄 몰랐다. 근육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서아는 계속 침묵하고 있었다. 무릎 위 손가락이 옷자락을 꽉 쥐고 있었다. '이럴 수가 있나. 이게 물리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같은 날, 같은 시간대에 두 번이나 마주칠 확률. 그리고 그 두 번째가 하필 가족이 되는 자리라는 확률. 도현의 머릿속이 뒤엉켰다. 만약 서아가 그 자리에서 사실을 말한다면. '아까 낮에 그 사람이 저를 도와줬어요.' 그 한마디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복잡해질 게 분명했다. 남자에게 손목을 잡힌 이유, 그 상황, 그리고 도현이 그곳에 있었던 이유까지. 설명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도현은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침을 삼켰다. 목이 바짝 말라 있었다. "자, 그럼 이제 다 같이 저녁 먹을까?" 이정호가 손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탁 위에는 이미 배달 음식이 잔뜩 차려져 있었다. 탕수육, 짜장면, 잡채, 몇 가지 나물 반찬까지. 누가 봐도 며칠 전부터 신경 써서 준비한 자리였다. 네 사람이 식탁에 앉았다. 도현과 서아가 마주 앉게 되었다. 하필이면 정면. 피할 곳이 없는 자리였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수저 소리만 유난히 크게 울렸다. 젓가락이 그릇에 닿는 소리, 국물을 뜨는 소리, 사소한 것 하나까지 귀에 박혔다. 강미영이 먼저 말을 걸었다. 분위기를 풀려는 듯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서아야, 도현이한테 인사 제대로 했어?" 서아가 고개를 들었다. 도현과 눈이 마주쳤다. 짧은 순간, 서아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네, 아까……" 서아가 말을 하다가 멈췄다. 하필 튀어나오려던 말이 '아까 그때'였다. 골목에서의 그 순간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도현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젓가락을 쥔 손끝이 미세하게 굳었다. '제발, 거기서 멈춰.' 속으로 간절히 외쳤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 국물을 뜨는 시늉을 했지만, 숨은 이미 반쯤 멈춰 있었다. "아까 인사했어요." 서아가 얼른 문장을 고쳤다. 목소리가 살짝 높아져 있었다. 찰나였지만 두 사람 모두 위기를 넘겼다는 걸 알았다. 서아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가 다시 원래 색으로 돌아왔다. 이정호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탕수육 한 조각을 집어 강미영의 접시에 놓아주며 웃었다. "둘이 벌써 인사했어? 잘됐네. 앞으로 남매처럼 지내면 되겠다." '남매.' 그 단어가 도현의 귓가에 이상하게 걸렸다. 서아 역시 젓가락을 쥔 손이 순간 멈췄다. 하지만 도현은 그 짧은 침묵을 놓치지 않았다. '이거, 위험한데.' 식탁 아래, 도현의 무릎이 저도 모르게 떨리고 있었다. 앞으로 이 집에서, 이 애와 얼마나 자주 마주쳐야 하는 걸까. 그 생각을 하자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저녁 식사는 겉으로는 평온하게 흘러갔다. 그러나 도현과 서아, 두 사람 사이에는 누구도 모르는 팽팽한 실이 하나 걸려 있었다. 그 실이 언제 끊어질지, 아니면 더 단단하게 얽힐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이정호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맞다. 서아 방은 도현이 방 바로 옆으로 정했어. 짐도 오늘 밤에 다 옮기기로 했고." 도현의 손에서 젓가락이 미끄러졌다. 쨍, 소리가 식탁 위에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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