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재벌 악역, 처형 D-100

5화

의원이 저택을 나선 뒤에도 응접실에는 한참 동안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전해진 소식은 한미령의 병이 단순한 영양실조나 폐병이 아니라, 원인을 특정할 수 없는 이상 증세라는 것이었다. 의원은 진맥을 짚던 손끝을 몇 번이나 옮기며 고개를 갸웃했는데, 이런 증상은 여태 본 적이 없다고, 몸속 어딘가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독기가 스며든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원작 게임의 텍스트 어디에도 이런 설명은 없었다. 한소이와 한미령이라는 이름조차 스쳐 지나가는 조연으로만 등장했을 뿐, 그들이 이런 병을 앓았다는 서술은 어느 회차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가 몸을 옮겨 온 순간부터 이미 세계가 그가 알던 대본과는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는 뜻일까. 아니면 애초에 게임이 다루지 않았던 이면의 사건이 이제야 그의 눈앞에 드러난 것뿐일까. 그는 그 답을 알 수 없었고, 그 알 수 없음이 오히려 더 큰 불안으로 가슴을 짓눌렀다. 창밖으로 마차가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의원을 태운 마차의 바퀴 소리가 자갈길 위에서 점점 희미해지더니 이내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그럼에도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그는 두 사람을 저택 별채로 옮기라 명령했고, 유하은에게는 두 사람의 방을 준비하고 끼니마다 영양가 있는 음식을 올리라 지시했다. 이불은 가장 두꺼운 것으로 내리고, 벽난로는 하루 종일 꺼지지 않게 하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 지시를 전달받은 유하은은 손에 든 쟁반을 놓칠 뻔하며 눈을 크게 떴는데, 그 반응에는 단순한 놀라움 이상의 것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방을 나서며 복도 구석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두 손으로 가슴을 짓누르며 숨을 몰아쉬었다. 유하은이 이 저택에서 일한 지도 삼 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는데, 그동안 그녀가 본 선우진혁은 하인의 실수 하나에 채찍을 들라 명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음식이 나오면 그릇을 던지며, 정원사가 심어놓은 꽃이 취향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를 내쫓았던 사내였다. 언젠가는 시중을 들던 어린 하녀가 찻잔을 깨뜨렸다는 이유만으로 사흘치 급료를 삭감당하는 걸 지켜본 적도 있었다. 그때 그 어린 하녀가 울면서 방을 나서던 뒷모습이, 유하은의 기억 속에는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런 그가 오늘 아침부터 낯선 빈민가 여인들을 데려와 정성껏 보살피라 명령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유하은은 자신이 미친 것인지 아니면 도련님이 병에 걸린 것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벽을 짚고 선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설마 열병이라도 나신 걸까." 그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마침 지나가던 다른 하녀가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뭐가?" "아니야, 아무것도." 유하은은 서둘러 고개를 저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는데, 그 하녀는 미심쩍은 눈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제 갈 길을 갔다. 저택 안에서 도는 소문은 이미 하나둘 생겨나고 있었다. 도련님이 갑자기 사람이 변했다더라, 빈민가 여자를 둘이나 저택에 들였다더라, 하는 이야기들이 부엌과 세탁실 사이를 오가며 부풀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유하은의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불안이 남아 있었다. 이 변화가 얼마나 갈지, 그리고 그것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그녀로서는 도무지 판단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별채로 향하는 복도를 지나며 유하은은 창문 너머로 정원을 흘겨보았다. 정원사가 새로 옮겨 심은 꽃들이 저녁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는데, 저 꽃들 중 몇 그루는 지난달 도련님의 눈 밖에 나서 뽑혀 나갈 뻔한 것들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꽃을 심은 정원사를 다시 불러들이라는 말까지 나왔다고 하니, 유하은은 그저 헛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사람이 이렇게 통째로 바뀔 수 있는 걸까. 아니면 무언가에 씌인 것일까. 그녀는 그 답을 알지 못한 채, 준비해 둔 죽 그릇을 들고 별채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한편 응접실에 남아 있던 그는 창밖으로 저녁이 내리는 정원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한소이와 한미령을 구했다는 안도감보다 먼저 찾아온 것은, 이 세계가 그가 알던 대본에서 이미 어긋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서 오는 불안이었다. 그는 손끝으로 창틀을 두드리며 지난 며칠간의 기억을 되짚었다. 몸을 옮겨온 첫날 마주했던 거울 속 낯선 얼굴, 원작 속 악역이었던 선우진혁의 대본, 그리고 그 대본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오늘의 사건들. 만약 게임의 스토리가 그의 개입만으로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면, 그가 미리 알고 있던 지식들은 더 이상 안전한 나침반이 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마주할 위험은 그가 대비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일지도 몰랐다. 그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가, 불을 붙이지 않은 채 손가락 사이에서 그저 굴리기만 했다. 연기 한 줌 없이 타지 않는 담배처럼, 그가 알던 미래 역시 이제는 확실한 형체 없이 흐릿하게 흩어지고 있었다. 창밖 안개가 다시 저택 담장을 타고 스며드는 걸 바라보며, 그는 언젠가 반드시 등장할 왕족과 귀족 공략 대상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각자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을 거라는 예감에, 손끝이 다시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그 예감은 단순한 불안이 아니었다. 만약 그들 중 누군가가 이미 대본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면, 이 저택 담장 안에서 벌어진 오늘의 변화 역시 그저 시작일 뿐일 것이다. 그는 안개 너머 어둠이 짙어지는 저택 바깥을 오래도록 바라보며, 아직 얼굴조차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걸음이 이미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쳐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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