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빈민가라는 곳은 어느 시대, 어느 왕국에서나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해동 왕국의 수도 외곽, 성벽과 하수로가 만나는 지점에서부터 시작되는 그 구역은 낮에도 볕이 잘 들지 않아 늘 습한 냄새가 감돌았고, 판자를 얼기설기 엮어 만든 지붕 아래서는 아이들이 마른기침을 뱉으며 놀고 있었다. 귀족들의 저택가에서는 이곳을 두고 게으른 자들이 모여 사는 소굴이라 부르며, 신문에서도 종종 이 일대를 "왕국의 수치이자 나태의 온상"이라 표현했다. 정작 그 신문을 읽는 자들 중 이 골목 안에 발을 들여본 이는 거의 없었으니, 그 표현이 얼마나 공허한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마차가 그 좁은 골목 어귀에 멈추자 김덕수는 도련님이 이런 곳까지 걸음을 옮기는 것이 옳지 않다며 만류했다. "도련님, 이곳은 사람이 지나다닐 곳이 아닙니다. 저 안쪽에서 무슨 병이 돌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만약 옷자락에라도 뭐가 묻어 돌아가시면 마님께서 뭐라 하시겠습니까." 그가 손을 비비며 재차 말했으나, 도련님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마차 문을 스스로 열어 내려섰다. 흙탕물이 튀어 값비싼 구두 위로 번지는 것을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김덕수가 뒤따르며 연신 혀를 찼지만, 그 소리마저 골목 안쪽 습한 공기에 금세 흡수되어 사라졌다.
골목을 몇 개 지나자 낮게 늘어진 지붕 아래,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모여 선 곳이 있었다. 오늘 밤을 넘기기 어려울 거라는 낮은 속삭임이 들려왔고, 그 중심에는 야윈 소녀가 쓰러진 여인의 몸을 부축한 채 주저앉아 있었다. 주변을 둘러싼 이들 중 누구도 나서서 손을 내밀지 않았는데, 그것은 냉정해서가 아니라 이곳에서는 이런 광경이 지나치게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죽음이 일상의 얼굴을 하고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이 골목이었다.
소녀의 옷은 색이 바랠 정도로 낡았고 뺨은 움푹 꺼져 있었으나, 눈동자만은 이상하리만치 맑고 또렷했다. 한소이였다. 게임 일러스트 속에서 화사한 미소를 짓던 얼굴과는 달리, 지금 그녀의 표정에는 세상 전체를 향한 경계와 지친 분노만이 남아 있었다. 도련님은 순간 그 낙차에 숨이 막히는 걸 느꼈다. 원화에서는 분홍빛 뺨과 반짝이는 눈으로 웃고 있던 그 소녀가, 지금 눈앞에서는 뼈마디가 드러날 정도로 마른 손으로 어머니의 몸을 붙들고 있었다. 같은 인물이되 전혀 다른 존재였다. 게임과 현실. 그 두 단어가 그의 머릿속에서 부딪혔다.
그가 다가서자 한소이는 재빨리 어머니를 자신의 등 뒤로 밀어 넣으며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 "뭘 구경하러 오셨어요, 귀족 나리." 그녀가 낮게 내뱉었는데, 그 말투에는 존댓말을 쓰면서도 조금의 존경도 담기지 않은 냉소가 서려 있었다. 마치 존댓말이라는 형식을 지키는 것 자체가 그녀가 이 세계에 마지막으로 남겨둔 자존심인 것처럼.
"구경 온 게 아니오." 그가 답하자, 그녀는 짧게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뭔데요. 동정이라도 베풀러 오셨어요? 그것도 아니면 세금 걷으러 오셨나." 뒤에서 누군가 낮게 킬킬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 골목에서는 귀족의 방문이 곧 세금 인상의 전조라는 것이 오래된 상식이었으니, 그 웃음에는 씁쓸함이 배어 있었다.
"당신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해 주고 싶소." 도련님이 말했다. 그 말에는 어떤 수식도 없었고, 그렇다고 확신에 찬 어조도 아니었다. 그저 사실을 진술하듯 담담했다.
그 말에 한소이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으나, 그녀는 곧 다시 표정을 굳혔다. "그런 말, 여기서 몇 번을 들었는지 모르실 텐데요." 그녀가 손끝으로 어머니의 이마를 짚으며 말을 이었다. "지난겨울에도 어느 성직자가 와서 신의 은총이 곧 내려올 거라고 했어요. 봄에는 어느 상인이 약을 지어주겠다고 했고요. 다들 그렇게 말하고는 정작 아무것도 하지 않고 떠났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걸 도련님은 놓치지 않았는데, 그것이 분노보다는 오랜 실망의 축적에서 나온 것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사람은 몇 번이나 속고 나면 희망을 품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게 된다. 그녀의 눈빛에 서린 경계는 바로 그 두려움의 흔적이었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 물었다. "내가 그렇게 떠나면, 당신 어머니는 살 수 있는 거요?" 그 물음에 한소이는 대답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손이 어머니의 옷깃을 움켜쥔 채 가늘게 떨리고 있었는데, 그 침묵이 곧 대답이었다. 살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 사실을 그녀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다는 것.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 중 하나가 낮게 중얼거렸다. "저 아가씨도 참 독하지. 저 몸으로 몇 달째 어미를 저러고 있으니." 다른 이가 맞받았다. "독한 게 아니라 갈 데가 없는 거지. 저러다 둘 다 죽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야." 그 말들은 한소이의 귀에도 닿았을 테지만,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수백 번은 들어본 말들이었을 것이다.
도련님이 무릎을 굽혀 쓰러진 여인의 상태를 살피려는 순간, 여인이 갑자기 격렬한 발작에 휩싸이며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팔다리가 뻣뻣하게 굳으면서 입가에는 거품이 일었고, 눈동자가 뒤로 넘어가며 흰자만이 드러났다. 한소이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를 부여잡았다. "어머니! 어머니, 정신 차리세요, 제발!"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낮은 탄식이 터져 나왔고, 몇몇은 고개를 돌려 그 광경을 외면했다.
도련님은 순간 숨이 멎는 걸 느꼈다. 손끝까지 차갑게 식는 감각이었다. 원작 대본 어디에도 이런 장면은 없었다. 게임 속 한소이의 어머니는 그저 만성 영양실조로 앓다가 주인공의 도움으로 서서히 회복되는 것으로 짧게 처리되었을 뿐인데,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이 발작은 그 설정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단순한 영양 결핍이라면 이렇게 온몸을 뒤틀며 경련하지는 않는다. 이건 뭔가 다른 병이다. 그럼 이건 뭐지. 그의 머릿속으로 차가운 의문 하나가 스치고 지나갔고, 그 의문은 발작하는 여인의 몸짓만큼이나 불길하게 그의 가슴 한복판에 들러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