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선우진혁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몸의 주인이 원작 속에서 어떤 결말을 맞았는지, 그는 이불 속에서 몇 번이고 되짚어 보았다. 창밖으로 새어 드는 새벽빛이 커튼 틈을 비집고 들어와 천장에 가느다란 줄을 그리고 있었으나, 그의 눈은 그 빛을 좇지 않았다. 악역 귀족 선우진혁은 히로인 한소이를 집요하게 괴롭히고, 그녀의 신분을 조작해 감옥에 가두려 하다 결국 왕궁 처형장에서 목이 잘리는 결말로 스토리 후반부를 장식했다. 그것도 게임 내에서 가장 인기 있던 회차 중 하나였는데, 유저 게시판에서는 그 장면을 두고 사이다라는 표현이 붙었던 것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목이 떨어지는 삽화 아래 달린 댓글들, 드디어 죽었다,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다, 이 캐릭터는 죽어야 마땅하다는 말들이 줄줄이 이어졌던 것도. 사이다.
손이 떨렸다. 처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운명이라는 문장을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는 순간, 그는 숨이 가빠 오는 걸 느끼며 침대 헤드보드에 등을 기댔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려 관자놀이를 타고 목덜미까지 적셨다. 언제 죽는지 정확한 시점까지는 기억나지 않았으나, 그 파멸이 예외 없이 한소이라는 이름의 여인과의 악연에서 시작된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원작 초반, 선우진혁은 빈민가에서 죽어가던 한소이를 우연히 마주치고도 그녀를 구하지 않고 오히려 그 처지를 이용해 조롱했으며, 그 장면이 두 사람 사이의 첫 갈등이자 이후 모든 파멸의 씨앗이 되었다는 것을, 그는 게시판 스포일러 정리글로 몇 번이나 읽었던 기억이 있었다. 정리글 작성자는 그 장면을 두고 이렇게 적어 놓았었다. 이 새끼가 여기서 착하게만 굴었어도 게임이 안 성립했다. 다행히 안 그래서 우리가 재밌게 즐길 수 있었다. 웃음이 나올 리 없는 문장인데도, 그때는 그저 스크롤을 넘기며 무심히 읽었을 뿐이었다. 지금은 그 문장 하나하나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했다. 갈등의 씨앗이 애초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만들면 되는 것이다. 그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처형장으로 가는 길을 걷지 않으려면 무엇부터 해야 할까. 답은 곧 정리되었다. 원작에서 적이 될 사람을 미리 아군으로 만든다. 그것도 가장 결정적인 순간, 그녀가 가장 절박했던 순간에 손을 내밀어서. 간단해 보이는 문장이었으나, 그 문장 뒤에 숨은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 몸의 원래 주인이 평생 쌓아 온 오만과 잔혹함을 하루아침에 뒤집어야 한다는 뜻이었고, 동시에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이들의 눈초리 속에서 낯선 얼굴로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걸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목이 붙어 있는 것과 떨어지는 것 사이에서 고민할 여유는 누구에게도 없었다.
그는 유하은을 불러 집사 김덕수를 데려오라 일렀는데, 그 목소리가 평소보다 다급했던지 유하은은 잠시 멈춰 섰다가 서둘러 방을 나섰다.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고, 그는 그 소리에 흠칫 놀라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이 저택 안에서 살아가는 하인들에게조차 선우진혁이라는 이름이 어떤 무게로 다가오는지, 그는 이제야 조금씩 실감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발이 성성한 노년의 사내가 들어왔다. 김덕수였다. 그는 문 앞에서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올렸으나, 그 눈빛 깊은 곳에는 오랜 세월 이 가문의 폭군을 모셔온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그 경계심은 단순한 예의범절의 그늘이 아니라, 지금껏 이 도련님이 내린 명령들이 대체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남기는 것으로 끝났다는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도련님, 무슨 일로 이렇게 갑작스레..."
"저잣거리 아래쪽, 빈민가 지구에 병든 여인과 딸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소. 한나절 안에 그들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내시오." 그가 말하자 김덕수는 잠시 표정을 굳혔는데, 그 얼굴에는 이 명령이 여느 때의 것과 다르다는 의아함이 역력히 드러났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장부를 슬쩍 옷깃 안으로 밀어 넣으며 되물었다.
"소인이 알아보겠습니다만... 도련님께서 그런 자들에게 어인 관심이십니까? 이제까지 그런 곳의 존재조차 신경 쓰지 않으셨던 걸로 아는데."
"관심이 아니라 볼일이 있소. 마차를 준비하시오." 그는 짧게 답했고, 목소리에는 더 이상의 질문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실려 있었다. 김덕수는 그 단호함의 정체를 알지 못한 채 더 묻지 않고 물러났다. 문이 닫히기 직전, 그는 뒤돌아보며 한 번 더 시선을 던졌는데, 그것은 의심이라기보다는 어딘가 낯선 것을 마주한 자의 조심스러운 관찰이었다.
마차가 준비되는 동안 그는 창가에 서서 정원 너머 도시의 지붕들을 바라보았다. 안개가 여전히 낮게 깔려 있어 저 아래 어디쯤인가 있을 빈민가의 형체는 보이지 않았으나,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게임의 첫 장면, 한소이가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골목 어귀에서 쓰러지던 그 순간이 바로 오늘, 아니 늦어도 내일이라는 것을. 창유리에 서린 입김이 뿌옇게 시야를 가렸다가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그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시간은 그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촘촘하게 짜여 있었고,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그녀는 이미 숨이 끊어진 채로 발견될지도 몰랐다. 자신이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정작 손을 내밀 대상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면, 그 모든 각오는 아무런 소용이 없어지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
마차가 준비되었다는 전언이 들려오자,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섰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이 스스로도 낯설게 느껴질 만큼 빨랐고, 저택의 하인들 몇이 그 급한 걸음걸이를 힐끗거리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으나 그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현관을 나서자 이미 대기하고 있던 마차와 마부가 보였고, 안개는 여전히 걷히지 않은 채 저택 담장 너머의 길을 흐릿하게 지우고 있었다. 그 안개 속 어딘가에서,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한 여인과 그녀의 딸이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의 발걸음을 더욱 급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