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야근이라는 말은 이 도시에서 태어난 순간부터 이미 정해진 팔자처럼 받아들여지는 단어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간 그 순간부터, 그는 저녁 여섯 시라는 시간이 그저 달력 위에 박힌 무의미한 숫자에 불과하다는 걸 배웠다. 사무실 창밖으로 네온사인이 꺼지고 다시 켜지기를 반복하는 사이, 그는 삼 년째 같은 자리에서 같은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야근 수당도 없는 밤을 견디고 있었는데, 팀장은 늘 “젊을 때 배워야지”라는 말로 그 모든 시간을 정당화했고, 그는 그 말에 반박할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유일한 위로는 퇴근길 지하철에서 몰래 켜보는 휴대폰 화면 속 여성향 게임뿐이었는데, 그마저도 이번 주 안에 결말을 봐야 한다는 조바심에 쫓기고 있었다. 그날도 마감이 코앞이라는 이유로 막차 시간을 넘기고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계단을 두 칸씩 뛰어 내려가다 발을 헛디딘 순간,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오르는 감각과 함께 뒤통수로 뭔가 단단한 것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고, 그 뒤로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어렴풋이, 자신이 그렇게 좋아했던 여성향 게임의 결말을 끝내 보지 못하고 죽는다는 사실이 억울했다는 감정만이 마지막으로 남았다. 삼 년을 갈아 넣은 회사도 아니고, 제대로 만나보지도 못한 가족도 아니고, 하필이면 게임의 엔딩이라니. 억울함.
정신이 든 곳은 그러나 병원 응급실도, 저승도 아니었다. 캐노피가 늘어진 커다란 침대 위, 천장에는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몰딩이 있었고, 창밖으로는 안개가 낮게 깔린 정원이 펼쳐져 있었으며, 방 안은 그가 살아온 삼십여 년의 인생 어디에도 없었던 종류의 고요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벽지에는 금박으로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침대 시트는 손끝에 닿는 감촉만으로도 값을 짐작하기 어려운 비단이었다. 그는 손을 들어보았는데, 손끝이 낯설게 희고 가늘어서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걸 느꼈다. 이게 내 손일까.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보고, 손등의 힘줄이 움직이는 걸 눈으로 확인하고서도 그는 여전히 이 몸이 자신의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은촛대의 촛불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걸 바라보며, 그는 이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벽에 걸린 거울로 걸어가 자신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그는 숨이 턱 막히는 걸 느꼈다. 은발에 가까운 회색 머리칼과 서늘한 청록빛 눈동자, 조각처럼 다듬어진 콧대와 턱선을 가진 이 얼굴을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수백 시간을 쏟아부었던 여성향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속에서, 주인공을 괴롭히고 끝내 처형당하는 악역 귀족의 얼굴이었다. 선우진혁. 게임 내에서만 삼백 시간 가까이 플레이하며 그 캐릭터의 대사 하나하나를 외울 정도였던 그가, 하필이면 그 캐릭터의 몸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은 웃기지도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 되었구나. 그는 거울 속 자신을 향해 낮게 되뇌었는데, 그 목소리마저 원작 속 성우의 그것과 똑같아서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게임 속에서 이 얼굴이 짓던 표정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여주인공을 벼랑 끝으로 몰아넣던 냉소, 하인들에게 채찍을 휘두르던 무심함, 그리고 마지막 챕터에서 광장 한복판에서 처형당하던 순간의 절규까지. 그 모든 장면이 자신의 미래로 예고되어 있다는 사실이 실감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방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그는 재빨리 표정을 가라앉혔고, 문이 열리며 메이드복을 입은 젊은 여자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이며 들어섰다. 유하은이었다. 그녀는 아침상을 준비했다는 말을 전하러 온 것뿐이었는데,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어깨를 움찔 떠는 것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그 반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
"오늘은... 별다른 지시가 없으신지요, 도련님." 유하은이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채 물었다. 그 말투에서 배어나는 두려움이 지나치게 습관적이라는 걸 그는 느꼈고, 원작 속에서 선우진혁이 하인들에게 어떤 취급을 받게 만들었는지를 떠올리자 속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폭언, 매질, 그리고 이유 없는 해고. 원작 텍스트 몇 줄로만 처리되었던 그 문장들이, 이제는 자신이 살아내야 할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이 실감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손목에 희미하게 남은 붉은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저것이 무엇 때문에 생긴 상처인지, 물어볼 수도 없었다. 물어보는 순간 자신이 이 몸의 주인이 아니라는 걸 들킬지도 몰랐고, 무엇보다 그 답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아서 두려웠다. 그는 일단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만 끄덕였고, 유하은은 안도한 듯 서둘러 물러났다. 문이 닫히는 소리마저 조심스러웠다.
혼자 남은 방 안에서 그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원작에서 선우진혁 가문은 해동 왕국에서도 손꼽히는 부호였고, 그 재산 목록만 나열해도 소설 한 챕터가 채워질 정도였다는 사실이 문득 떠올랐다. 영지, 저택, 상단의 지분까지, 게임 텍스트로 스쳐 지나갔던 그 숫자들이 이제는 자신의 것이 되어 있었다. 죽음 대신 얻은 것이 막대한 재력이라는 사실은 분명 다행이었으나, 그 다행함을 온전히 누리기도 전에 그는 이 몸에 씌워진 운명의 무게를 먼저 마주해야 했다. 원작의 시간표를 되짚어보면, 지금이 대략 몇 번째 챕터에 해당하는지, 처형이라는 결말까지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가늠해봐야 했다. 그리 넉넉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먼저 왔다.
창밖 안개가 서서히 걷히며 정원의 나무들이 윤곽을 드러내는 걸 바라보던 그는,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결코 넉넉하지 않다는 예감에 손끝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정원 저편, 나무 그늘 아래 누군가 서 있는 듯한 그림자가 스치듯 눈에 들어왔지만, 안개가 다시 짙어지며 그 형체를 가려버렸다. 저것이 무엇이었는지 확인할 새도 없이, 방문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