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해동 왕국은 건국 이래 삼백 년 동안 단 한 번도 왕조가 바뀌지 않은 나라였다. 흔히 사람들은 그것을 왕실의 위엄이라 말하고 싶어했으나, 정작 그 삼백 년을 지탱한 것은 왕실 그 자체가 아니라 왕실을 둘러싼 다섯 개의 대공가와 스물세 개의 후작가가 서로의 목줄을 쥔 채 팽팽하게 당겨온 균형이었다. 누군가 조금이라도 힘을 더 얹으려 하면 나머지가 즉시 달려들어 그 무게를 눌러버리는 식이었고, 그 지긋지긋한 견제 속에서 왕실은 오히려 가장 안전한 자리에 앉아 삼백 년을 버텨온 것이다. 선우 가문은 그 살벌한 균형의 한가운데에서, 특이하게도 무력이나 병권 대신 돈줄을 쥐고 살아남은 가문이었다. 왕실 재정을 오랫동안 관리해 온 특수한 지위 덕분에 누구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자리였으나, 동시에 누구에게나 이용당하기 쉬운 자리이기도 했다. 그가 이 세계에 떨어져서 얻은 것이 다름 아닌 그 돈줄이라는 사실은, 지금 눈앞의 위기 앞에서 무엇보다 실용적인 무기가 되었다.
한미령의 발작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러나 숨이 넘어갈 듯 가늘어지던 그 짧은 순간이, 그의 머릿속에 있던 온갖 계산과 망설임을 일순간에 지워버렸다. 처형대에 매달린 목이 어떻게 될지, 이 몸의 원래 주인이 어떤 파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는지, 그런 것들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그는 즉시 김덕수를 불러 왕도에서 가장 실력 있다는 궁정 의원을 데려오라 일렀고, 돈이 얼마가 들든 상관없다는 말을 세 번이나 강조했다. 첫 번째는 명령이었고, 두 번째는 확인이었고, 세 번째는 다짐이었다. "왕궁 소속 의원을 민간에서 부른다는 것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도련님." 김덕수가 눈썹을 좁히며 곤란한 기색을 내비쳤다. 평생을 선우 가문에서 집사로 일해온 그의 얼굴에는, 이런 무리한 부탁을 감당해야 하는 처지에 대한 피로가 짧게 스쳤다. 그러나 그는 짧게 답했다. "그럼 왕궁에 진 빚을 갚으라고 하시오. 선우 가문이 그 정도 청은 넣을 수 있지 않소." 그 말에 김덕수는 잠시 눈을 크게 떴다. 도련님이 이런 식으로 가문의 오랜 채권을 직접 언급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그 뒷모습을 보며 그는 생각했다. 명예니 자존이니 하는 것들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그저, 살아야 했다.
원작 속에서 이 왕국을 떠받치는 또 다른 축은 왕족과 몇몇 유력 귀족가의 후계자들이었다. 게임 속에서 그들은 한소이를 둘러싸고 각자의 매력과 비밀을 하나씩 풀어놓는 공략 대상들이었고, 플레이어는 그들 중 누구의 루트를 타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말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 결말들 중 상당수에서, 선우진혁이라는 이름은 파멸의 조연으로 등장했다. 아직은 그 누구도 이 저택 앞에 나타나지 않았으나, 그는 눈을 감고 그들의 이름과 성격을, 그리고 각자가 어떤 방식으로 선우진혁을 몰아세우는지를 하나하나 되짚었다. 누구는 냉정한 논리로 그를 궁지에 몰았고, 누구는 다정한 얼굴로 뒤통수를 쳤으며, 누구는 존재 자체만으로 그가 저지른 죄를 증명하는 증거가 되었다. 그 되짚음이 끝날 때마다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그들 중 누구라도 지금 이 순간의 자신을 본다면 어떤 의심을 품을까. 몰락한 가문의 자제가 원수의 딸을 살리겠다며 왕궁 의원까지 불러들였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그것은 선의로 읽히기보다 수상한 계략으로 읽힐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자선을 베푸는 악역이라니. 소문이 이상하게 퍼지면 오히려 화를 부를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의원이 도착한 것은 해가 뉘엿뉘엿 기울 무렵이었다. 마차에서 내린 의원은 잔뜩 예민한 얼굴로, 이런 시각에 이런 곳까지 불려온 것에 대한 불만을 얼굴 전체에 새겨두고 있었으나, 김덕수가 은근히 흘린 몇 마디에 표정이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돈의 힘이란 이런 것이었다. 의원이 한미령의 방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지켜보며, 그는 잠시 복도에 서서 숨을 골랐다. 진맥 소리와 낮은 대화가 문틈으로 새어 나왔지만, 정확히 무슨 말이 오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그 불확실함을 견디지 못하고 자리를 옮겼다.
응접실로 자리를 옮긴 그는 한소이를 마주 앉혔다. 낯선 저택, 낯선 가문의 응접실에 앉은 그녀는 잔뜩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는데, 등을 곧게 세우고 팔짱을 낀 채 방 안의 가구 하나, 벽에 걸린 그림 하나까지 훑어보는 눈빛에는 자신이 언제든 이곳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사가 담겨 있었다. 어머니가 치료받고 있다는 사실 하나가 그녀를 겨우 그 자리에 붙잡아두고 있는 셈이었다. "이런다고 제가 고마워할 거라고 생각하시면 오산이에요."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는 방어적인 날이 서 있었다. "고마워하지 않아도 좋소. 다만 당신 어머니가 낫는 걸 보고 싶을 뿐이오." 그가 담담히 답하자, 한소이는 미간을 좁히며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마치 그의 말 속에 숨겨진 다른 의도를 찾아내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대체 원하는 게 뭔데요. 이 정도 은혜를 베풀면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귀족은 없어요." 그 말은 정확했다. 그녀가 살아온 세상에서는, 아무런 대가 없이 베풀어지는 선의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잠시 대답을 미뤘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목이 처형대에 걸리지 않는 미래였으나, 그것을 그녀에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말한다 해도 그녀가 이해할 수 있는 종류의 두려움이 아니었다. "바라는 건 나중에 말하겠소." 그가 짧게 답하자, 한소이는 못마땅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창밖으로 저물어가는 햇살이 그녀의 옆얼굴에 얇게 걸려 있었고, 그 빛은 곧 사라질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그때, 문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의원이 방을 나서는 소리였다. 한소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고, 그 역시 등줄기를 곧게 세우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의원의 표정이 어떤 말을 전할지, 그것이 안도가 될지 절망이 될지 아무도 아직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