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내공 3단, 두뇌는 만렙

5화

산길로 접어든 지 얼마 되지 않아, 낌새를 먼저 느낀 것은 서준이었다. 발밑의 흙냄새가 바뀌었다. 습한 기운이 코끝에 스쳤다. 사람이 다니지 않는 길일수록 냄새가 짙어진다는 것을, 그는 전생에서 익힌 바 있었다. '이 길은 인적이 드물다.' 그는 그렇게 판단했다. 증권가에 있던 시절, 그런 판단은 몸에 새겨진 습관이었다. 낯선 산길에서는 냄새와 소리로 먼저 위험을 가늠하고, 그다음에야 발을 내딛는 것이 순서였다. 부스럭- 덤불 사이로 뭔가 작고 하얀 것이 움직였다. 서준은 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낮췄다. 손은 이미 옆구리의 칼자루로 향해 있었다. 산짐승이라면 멧돼지나 살쾡이일 가능성이 높았고, 둘 다 방심하면 사람을 해칠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덤불 사이에서 드러난 것은 뜻밖에도 작은 몸뚱이였다. 새끼 돼지였다. 온몸이 새하얗고, 눈동자는 유난히 검었다. 털에는 흙과 나뭇잎이 엉겨 있었지만, 그 아래로 비치는 살빛은 갓 태어난 짐승답게 여렸다. '이런 산속에 웬 돼지가.' 그는 그렇게 의아해했다. 산돼지라면 검거나 갈색이어야 정상이었다. 이렇게 백색인 새끼 돼지는 흔치 않았다. 더군다나 이런 깊은 산중에서, 어미도 무리도 없이 혼자 돌아다니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다가가 보니, 뒷다리 하나가 가시덤불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고 있었다. 몸부림친 흔적이 주변 풀에 남아 있었다. 꽤 오랫동안 갇혀 있었던 모양이었다. 서준은 잠시 갈등했다. '괜한 것에 휘말리지 말자.' 전생의 습관대로라면 지나쳐야 했다. 위험이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는 일에 손을 대는 것은 비효율적이었다. 증권가에 있던 시절, 상사는 늘 그렇게 가르쳤다. '쓸데없는 동정은 화를 부른다. 산길에서 마주치는 것들 중 절반은 함정이고, 나머지 절반은 그 함정의 미끼다.' 그 말을 떠올리며 서준은 발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새끼 돼지의 눈이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겁먹은 눈빛이었다. 도망칠 힘도 없어 그저 눈으로만 애원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한 번만.' 그는 그렇게 마음을 바꿔 쪼그려 앉았다. 상사의 가르침이 틀린 적은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예외로 두기로 했다. 새끼 짐승 하나를 구하는 일이 무슨 큰 화를 부를까 싶은 마음도 있었다. 가시덤불을 조심스레 걷어내며 다리를 빼내려 애썼다. 가시는 억세고 촘촘했다. 손끝에 가시가 몇 번 박혔지만 참았다. 따끔한 통증이 손목까지 올라왔지만, 소리 내어 티를 내지 않았다. 한참을 씨름한 끝에, 마침내 다리가 빠졌다. 새끼 돼지가 그의 손을 벗어나 몇 걸음 뛰어갔다. 다리를 절뚝이면서도 제법 빠르게 움직이는 모습이 신기했다. 그러더니 다시 돌아와 그의 발밑을 맴돌았다. 마치 서준의 존재를 확인하듯, 코를 킁킁대며 다리 주위를 빙빙 돌았다. "고맙다는 건가." 서준이 낮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새끼 돼지는 그 손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손바닥에 코를 비비듯 가까이 다가왔다. 따뜻한 콧김이 손바닥에 훅- 닿았다. '이상하게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군.'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야생에서 자란 짐승이라면 사람의 손길을 피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이 새끼 돼지는 마치 사람에게 길들여진 듯 태연했다. 그 점이 묘하게 마음에 걸렸지만, 서준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돼지는 잠시 그의 곁을 맴돌다가, 갑자기 코를 벌리며 매운 기운을 훅- 뿜어냈다. "으윽!" 서준이 눈을 감싸며 뒤로 물러났다. 콧속이 얼얼했다.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매운 기운이었다. 마치 고춧가루를 정면으로 뒤집어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게 무슨...' 그가 미처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돼지는 그 틈을 타 산속으로 뛰어들었다. 절뚝이던 다리가 언제 그랬냐는 듯 재빠르게 움직였다. "어디 가는 거야!" 서준이 눈을 비비며 뒤를 쫓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발이 저절로 움직였다. 방금까지도 '괜한 것에 휘말리지 말자'고 생각했던 그였는데, 지금은 그 다짐이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게 뒤를 좇고 있었다. '나답지 않다.' 그는 뛰면서도 그렇게 자문했다. 평소의 그라면 이쯤에서 멈췄을 것이다. 하지만 발은 멈추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에 이끌리듯, 몸이 먼저 반응하고 있었다. 돼지는 익숙한 길인 듯 좁은 바위틈 사이로 사라졌다. 서준이 뒤따라 다가가 보니, 그 안쪽에 어두운 동굴 입구가 보였다. 바위틈은 사람 하나가 겨우 통과할 만큼 좁았고, 안쪽에서는 서늘한 공기가 흘러나왔다. 서준은 잠시 멈춰 섰다. '따라 들어가는 게 맞나.' 그는 그렇게 자문했다. 처음 보는 산짐승을, 굴 속까지 쫓아갈 이유는 없었다. 더군다나 방금 매운 기운을 뿜어 자신을 따돌린 짐승이었다. 그런 것을 쫓아 어두운 굴속까지 들어가는 것은, 냉정히 따지면 무모한 일이었다. '여기서 그만두는 게 옳다.' 그는 그렇게 판단을 내리려 했다. 그러나 발밑에서 다시 매운 냄새가 훅- 피어올랐다. 돼지가 동굴 안에서 그를 부르듯 콧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 기척만으로도 마치 안으로 오라는 손짓처럼 느껴졌다. '묘하게 사람을 유인하는 것 같다.' 그는 그렇게 느꼈지만, 발은 이미 동굴을 향해 있었다. 이성은 멈추라고 말하는데, 몸은 반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 어긋남이 낯설었지만, 서준은 굳이 저항하지 않았다. 동굴 안은 생각보다 좁았다. 허리를 굽혀야 겨우 지날 수 있는 통로였다. 벽에서는 축축한 물기가 배어 있었고, 발밑의 바닥은 미끄러웠다. 서준은 벽을 짚으며 조심스레 나아갔다. 손끝에 닿는 돌의 감촉이 차가웠다. 어둠 속에서 돼지의 하얀 형체만이 앞서 움직였다. 그 형체마저 없었다면, 방향조차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짙은 어둠이었다. '이런 곳에 들어와서 무엇을 얻겠다고.'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몸이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통로가 갑자기 넓어졌다. 발밑의 땅이 미묘하게 기울어 있었다. 그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는 발밑의 경사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고, 앞서가는 돼지에게 신경이 쏠려 있던 탓이었다. 앞서가던 돼지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옆으로 사라졌다. "...어디." 서준이 그것을 좇아 발을 내딛는 순간, 발밑의 흙이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발밑이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함정.' 그는 그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늦었다. 상사의 말이 뒤늦게 머릿속을 스쳤다. '산길에서 마주치는 것들 중 절반은 함정이고, 나머지 절반은 그 함정의 미끼다.' 그 말을 떠올리는 순간에도, 몸은 이미 균형을 잃고 있었다. 쿠구궁- 발밑이 완전히 꺼졌다. 몸이 허공으로 떨어졌다. 순간적으로 손을 뻗어 무언가를 붙잡으려 했지만,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렇게 죽는 건가.' 그는 떨어지는 와중에도 이상하게 차분한 생각을 했다. 죽음의 위기가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미 한 번 죽어본 자의 여유였을까. 어느 쪽이든, 지금 상황에서 그런 여유가 도움이 될 리는 없었다. 어둠이 그를 삼켰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바람이 옷깃을 세차게 때렸다. 옷자락이 펄럭이는 소리가 귓가에 요란하게 울렸다. 귓가에 무언가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그것이 자신의 목소리인지, 저 앞서 사라진 돼지의 울음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떨어지는 그 짧은 순간에도 스쳐 지나갔다. '끝까지 알 수 없는 놈이군.'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도 몸은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속도는 점점 빨라졌고, 바람 소리는 더욱 거세졌다. 이대로라면 바닥에 닿는 순간 뼈가 부서질 것이 분명했다. 그의 몸은 그렇게, 정체를 알 수 없는 산곡의 어둠 속으로 끝없이 곤두박질쳐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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