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권력구도가 어느 정도 그려진 뒤로, 한서준은 부러 눈에 띄지 않게 움직였다.
큰댁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사랑채 근처에서는 걸음을 서둘렀다. 시종들이 모이는 우물가에서도 오래 머물지 않았다. 누군가 그를 눈여겨보기 전에 자리를 비켜야 했다.
'몸을 낮추는 것은 굴복이 아니다. 정보를 모으는 자의 위장이다.' 그는 그렇게 자신을 다독였다. 전생에도 그랬다. 증권사에서 살아남는 자들은 언제나 조용했다. 목소리를 높이는 자는 먼저 잘렸고, 숨을 죽인 자만이 정보를 쥐었다.
소은을 통해 큰댁의 하루 일정을 물었고, 덕구를 통해 시종들 사이의 뒷말을 들었다. 누가 가주의 신임을 받는지, 어느 방이 요즘 자주 열리고 닫히는지, 그런 것들이었다. 어느 것도 위험해 보이지 않는 질문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 위장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이, 폐물." 한태강이 뒷마당에서 그를 가로막았다. 곁에는 한태걸과 몇몇 시종이 함께였다. 뒷마당은 평소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우연히 마주친 것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기다렸구나.' 서준은 그렇게 판단했다. 등 뒤로는 담벼락이었고, 앞으로는 셋이 반원을 그리고 서 있었다. 도망칠 길이 없었다.
"요즘 여기저기 캐고 다닌다는 얘기를 들었다." 한태강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한서준은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소은과 덕구를 통해 물었던 것들이 이미 새어나간 모양이었다. 어디서부터 흘러나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이 세가에서는 벽에도 귀가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해졌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최대한 담담하게 답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배에 힘을 주었다.
"모르는 척은 잘하는구나." 한태걸이 그의 어깨를 툭 밀었다.
서준은 뒤로 밀려 몇 걸음 물러섰다. 몸이 균형을 잃었다. 발끝이 흙바닥을 헛디디며 미끄러졌다.
'저항해도 소용없다.' 그는 그렇게 판단했다. 내공도 없고, 체구도 열네 살 소년의 것이었다. 상대는 오 단의 내공을 지닌 열여섯 살이었다. 게다가 곁에 있는 시종들도 태강의 눈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이곳에서 그를 막아줄 사람은 없었다.
"큰집 서열이 궁금했으면 그냥 직접 물으면 될 걸, 뒤에서 살살거리는 게 딱 폐물다워." 한태강이 그의 옷깃을 잡아 세웠다.
옷깃이 목을 조여왔다. 서준은 숨을 짧게 삼켰다.
"제가 궁금한 게 있으면 형님께 여쭙겠습니다." 서준은 그렇게 대답했다. 말투는 여전히 존댓말이었다. 굽히지 않으려는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형님?" 한태걸이 코웃음을 쳤다. "폐물 주제에 말은 곱게 하는구나."
퍽!
둔탁한 소리가 마당에 울렸다. 한태걸의 발이 서준의 허리를 그대로 찼다.
서준은 숨이 턱 막혀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시야가 잠깐 흔들렸다. 흙먼지가 코앞까지 올라왔다.
'이 정도까지.'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이전까지의 조롱이 말로 그쳤다면, 이제는 손발이 실제로 움직이고 있었다.
"어, 도련님 넘어지셨네." 한태강이 웃으며 그의 어깨를 발끝으로 툭 밀었다. 서준의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가 다시 흙바닥에 손을 짚었다.
퍽!
한 번 더, 이번엔 한태강의 발이 등을 찍었다. 숨이 완전히 끊길 듯 막혔다. 눈앞이 하얗게 번졌다.
'소리 내지 마라.' 그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명령했다. 신음이 터지려는 순간 이를 악물고 삼켰다. 소리를 내는 순간 저들은 더 재미있어할 것이었다.
곁에 있던 시종 하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공자님, 이만하면 되었지 않겠습니까." 목소리에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큰댁의 눈에 나는 것을 걱정하는 기색이었다.
"넌 입 다물어." 한태강이 그쪽을 노려보자 시종은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서열은 여기서도 명확했다.
"오늘은 이쯤만 해두지." 한태강이 그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다음에도 살살거리면, 그날은 이걸로 안 끝날 거다." 그가 마지막으로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떴다. 한태걸과 시종들이 그 뒤를 따랐다. 웃음소리가 담장 너머로 멀어졌다.
한서준은 마당 바닥에 한동안 그대로 엎드려 있었다.
허리에서 올라오는 통증이 온몸을 관통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갈비뼈 안쪽이 찌르듯 아팠다. 그러나 그보다 더 아픈 것은 다른 곳이었다.
'이 몸이 되기 전, 나는 어떤 자리에서 무시당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증권사에서도, 서울대에서도, 그는 늘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쪽이었다. 후배들은 그의 말 한마디에 자세를 고쳤고, 상사들도 그의 판단을 함부로 무시하지 못했다.
지금은 정반대였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손으로 흙바닥을 짚고 무릎을 세우는 데만도 한참이 걸렸다. 옷을 털며 마당을 벗어났다. 걸음걸이가 평소보다 느렸다. 통증을 감추려 이를 악물었으나 다리가 저절로 절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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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에 돌아와 상처를 살피던 소은이 놀라 물었다.
"도련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그녀의 목소리에 걱정이 가득했다. 옷을 걷어 올리자 허리께에 벌써 검붉은 흔적이 올라오고 있었다.
"넘어졌어." 서준은 짧게 답했다.
"넘어져서 이렇게 될 리가 없잖아요." 소은이 젖은 수건을 가져와 조심스레 눌렀다. 서준은 순간 숨을 삼켰다. 통증이 다시 치솟았다.
소은은 그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지만, 더 캐묻지 않았다. 그것이 이 세가에서 살아가는 법이었다. 대신 그녀는 약초함을 뒤져 상처에 바를 것을 찾았다. 손끝이 조심스러웠다. 말은 삼켰지만 손길은 거칠지 않았다.
"이번엔 태강 공자님이시죠." 소은이 낮게 중얼거렸다. 대답을 바라는 물음이 아니었다.
서준은 여전히 답하지 않았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해가 서서히 기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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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이 그날 밤 몰래 그의 방에 들어왔다. 문틈으로 조심스레 얼굴을 내밀더니,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얼른 안으로 들어섰다.
"오라버니, 진짜 넘어진 거 아니지." 아이가 침상 옆에 앉아 그의 손을 잡았다. 손이 작고 차가웠다.
"태강이 형아 짓이지." 서영의 목소리가 떨렸다. 눈가가 벌써 붉어져 있었다.
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것이 대답이었다.
"내가 아까 봤어." 서영이 고개를 떨궜다. "마당 쪽에서 소리 들려서 가봤는데, 무서워서 숨어 있었어. 도와주지도 못했어."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었다." 서준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나섰으면 너도 다쳤을 거야."
"그래도." 서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크면, 오라버니 지켜줄게." 서영이 그렇게 말하며 그의 손을 꼭 쥐었다.
한서준은 그 손을 마주 잡으며 속으로 다짐했다.
'지켜줄 사람은 내가 되어야 한다.' 그는 그렇게 되뇌었다. 어린 동생의 손에 자신의 안전을 맡길 수는 없었다. 그것은 순서가 틀린 일이었다.
하지만 그 다짐과 현실 사이의 거리는 아득했다. 단전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고, 몸은 여전히 열네 살 소년의 것이었다. 서영이 방을 나간 뒤에도 그는 한참을 어둠 속에 누워 있었다. 통증은 가라앉을 기미가 없었고, 머릿속은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힘이 없다는 것.' 그는 그것을 곱씹었다. 전생에서는 지식과 인맥이 힘이었다. 이곳에서는 그것들이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내공이 없는 자는 그저 폐물이었다.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아무리 판단이 빨라도, 발끝 하나에 무릎을 꿇는 것이 이 세계의 법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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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그는 다시 걸음을 재촉해 세가 뒷산 자락으로 향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홀로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허리는 여전히 뻐근했지만, 걸을 수는 있었다.
산길을 오르며 그는 어제의 통증을 곱씹었다. 발을 뗄 때마다 옆구리가 당겼다. 그럴 때마다 어제 마당에서의 광경이 눈앞에 되풀이되었다. 한태강의 웃음소리, 한태걸의 발끝, 그리고 그 사이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시종들의 얼굴까지.
'맞고만 있을 수는 없다.' 그는 그렇게 결론지었다. 힘이 없다면 다른 무언가를 찾아야 했다. 세가 안에서는 답을 찾을 수 없었다. 큰댁의 눈이 닿지 않는 곳, 아무도 그를 감시하지 않는 곳에서라면 무언가 다를지도 몰랐다.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이 차가웠다. 산길은 인적이 드물어 잡초가 무성했다. 발밑에서 마른 낙엽이 바스락거렸다. 서준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계속 걸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발길이 이끄는 대로 더 깊이 들어갔다.
그리고 그날, 그 산자락에서 그는 처음으로 그것과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