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내공 3단, 두뇌는 만렙

3화

삼 일 뒤, 서준은 삼촌 한광호를 찾아갔다. 그동안 서준은 방 안에 틀어박혀 몸을 살폈다. 단전이 있어야 할 자리에 손을 얹고 몇 번이나 내력을 끌어올려 보았지만, 매번 같은 결과였다. 텅 빈 자리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벽을 두드리는 것과 같았다. 소리는 나지만 그 벽 너머에는 아무도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도 이제 접어야겠지.' 서준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가 삼촌을 찾아간 것은, 확인해야 할 것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광호는 이 세가 안에서 유일하게 그의 편이라 부를 수 있는 어른이었다. 임씨가 늘 그의 이름을 신뢰 있게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세가 안에서 어른 대접을 받는 사람 중에 이 몰락한 방계 소년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이는 그가 유일했다. 서재는 조용했다. 책장에 빽빽이 꽂힌 서책들 사이로 오래된 종이 냄새가 배어 있었다. 한광호는 그 안에서 서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단전이 완전히 상했다고 들었다." 한광호가 그를 서재에 앉히며 말했다. 목소리에는 걱정이 배어 있었다. "제가 봐도 그런 것 같습니다." 서준이 담담하게 답했다. "봐도 안다고?" 한광호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서준은 순간 말을 조심해야 함을 깨달았다. 이 세계의 열네 살 소년이 그런 식으로 말할 리가 없었다. 단전이 상했는지 아닌지를 스스로 진단할 만한 지식과 감각을 가진 소년은 흔치 않았다. 게다가 그 소년은 지금껏 무공을 제대로 배운 적조차 없었다. "...느껴집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 그는 급히 말을 고쳤다. 한광호는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듯했다. 대신 그의 손목을 잡고 눈을 감았다. 손끝이 맥을 짚는 자리를 오래도록 눌렀다. "내력을 조금 흘려 넣어보마. 막힌 길이 있다면 뚫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가 말했다. 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는 크지 않았지만, 시도해보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밑져야 본전이었다. 한광호의 손끝에서 미약한 열기가 흘러들었다. 서준은 그것을 느끼려 애썼다. 눈을 감고 숨을 낮추며, 몸속 어딘가에서 반응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처음에는 손목 어딘가에서 따뜻한 기운이 스미는 것이 느껴졌다. 그 기운은 팔을 타고 천천히 내려갔다. 서준은 그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나 아무리 감각을 곤두세워도, 그 열기는 단전 근처에서 그대로 흩어져 사라졌다. 마치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같았다. 흘러드는 순간 사라지고, 다시 흘러들어도 다시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무엇을 채워도 남지 않는 공백만이 있었다. 한광호의 이마에 땀이 배어났다. 그는 몇 번이나 더 내력을 밀어 넣었다. 그러나 결과는 매번 같았다. "...안 되는군." 한광호가 손을 떼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내렸다. "단전의 그릇 자체가 깨진 것 같다. 이렇게 완전히 무너진 경우는 나도 본 적이 없다." 그가 말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보통은 그릇에 균열이 있어도 조금씩은 담기는 법이다. 헌데 네 것은... 담기는 순간 전부 새어 나가는구나. 그릇 자체가 없는 것처럼." 서준은 그 말을 들으며 속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그릇이 깨졌다.' 전생의 그가 쌓아온 모든 것과, 이 몸이 원래 지녔던 모든 것이 한꺼번에 부서진 자리에 그가 들어와 앉은 것이었다. 그릇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릇이 통째로 바뀐 것이라고 해야 정확했다. 다만 그 사실을 여기서 설명할 수는 없었다. 한광호는 그런 서준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레 덧붙였다. "너무 낙심하지는 마라. 세상에는 별의별 방법이 다 있는 법이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작 한광호 본인의 얼굴에서도 희망의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서준은 그 얼굴을 보며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위로보다는 사실이 더 필요했다. +++ 그 소식은 오래지 않아 사랑채까지 퍼졌다. 세가 안에서 소문은 발보다 빨랐다. 특히 몰락한 방계의 폐물에 관한 소문이라면, 굳이 퍼질 필요도 없이 저절로 퍼져나갔다. "광호 숙부님이 손을 대셨는데도 안 됐다는군." 한태강이 마당에서 그를 마주치며 비웃었다. 그의 뒤에는 늘 그렇듯 몇몇 수하 격의 아이들이 따라붙어 있었다. 한태강은 서준보다 두 살이 많았고, 세가 안에서 가장 유력한 후계자로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그의 걸음걸이에는 이미 그 자신이 세가의 주인이라도 된 듯한 여유가 배어 있었다. "이제 정말 답이 없는 모양이야." 한태걸이 거들었다. 한태걸은 한태강의 사촌으로, 늘 그의 곁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인물이었다. 주변에서 지나던 몇몇 어른들도 낮게 웃었다. 그중 하나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충식이 그 사람 아들이 이렇게 될 줄이야." 또 다른 하나가 맞받았다. "핏줄은 못 속인다지만, 그래도 저 정도면... 쯔쯔." 그 말들 속에는 동정도 아니고 조롱도 아닌, 그저 흥밋거리를 대하는 무심함이 배어 있었다. 사람이 무너지는 것을 구경하는 데에 익숙한 자들의 태도였다. 한서준은 그 말들을 하나도 흘리지 않고 새겨들었다. 정보로 삼기 위함이었다. '저 웃음 속에 힘의 서열이 다 드러난다.' 그는 그렇게 판단했다. 누가 누구 곁에 서는지, 누구의 말에 누가 고개를 끄덕이는지, 그 작은 몸짓들 하나하나가 곧 이 세가의 지형도였다. 증권가에서 그가 배운 것 중 하나는, 정보는 결코 대놓고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늘 흘러나오는 부산물 속에 숨어 있었다. 사람들의 무심한 말 속에, 웃음의 방향 속에, 시선이 머무는 자리 속에. 그날부터 그는 조용히 세가 안의 구조를 살피기 시작했다. 대놓고 묻고 다닐 수는 없었으므로, 소은과 덕구를 통해 조금씩 정보를 모았다. +++ "도련님, 그런 건 왜 물으세요?" 소은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소은은 서준의 방을 담당하는 시녀였다. 나이는 서준과 비슷했지만, 몸집이 작고 목소리가 낭랑해서 늘 더 어리게 보였다. "그냥... 궁금해서." 서준이 얼버무렸다. 소은은 별 의심 없이 대답해주었다. 그녀는 원래 이 몸의 주인에게 정성을 다하던 아이였고, 그 정성이 지금의 서준에게도 이어지고 있었다. 소은에게는 서준이 어떤 사람인지보다, 자신이 모시는 도련님이라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큰댁 도련님은 내공이 벌써 오 단이래요. 세가에서 그 나이에 오 단은 흔치 않다고 하더라고요." 소은이 말했다. 그녀는 손짓까지 곁들이며 신이 나서 설명을 이었다. "그리고 무공 실력도 남다르시대요. 사범님들도 몇 년 안에 큰댁 도련님을 못 이길 거라고들 하시고요." "족장 어르신 자리도 이번엔 큰댁 도련님이 이어받을 거라고들 해요." 그녀가 덧붙였다. 한서준은 그 말을 마음속에 저장했다. '한태강, 내공 오 단, 족장 후보.' 그는 그렇게 정리했다. 그리고 소은의 말투에서, 큰댁을 향한 이 세가 사람들의 시선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함께 읽어냈다. 존경이라기보다는 이미 정해진 결말에 대한 순응이었다. "그럼 한태걸 도련님은요?" 서준이 넌지시 물었다. "그분은 큰댁 도련님이랑 늘 같이 다니시는 분이니까, 아마 다음 자리 정도는 하시겠죠." 소은이 별생각 없이 답했다. '한태걸은 그와 가까운 서열의 다음 자리.' 그는 그렇게 그림을 그려나갔다. +++ 덕구를 통해서는 다른 종류의 정보가 들어왔다. 덕구는 세가의 마당을 관리하는 하인이었는데, 나이가 서준보다 훨씬 많았고, 세가 안에서 오래 일한 만큼 눈치가 빨랐다. 그런 덕구가 서준에게만은 조금 다르게 대했다. 이유는 몰라도, 그는 서준의 아버지 한충식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이 세가에는 우리 같은 사람들 눈에도 안 보이는 서열이 또 있습니다." 덕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주변을 한 번 살핀 뒤에야 말을 이었다. "큰댁, 우리 댁, 그리고 셋째댁. 세 갈래로 나뉘는데, 우리 댁이 가장 힘이 약합니다. 도련님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로는 더욱요." 그가 말을 이었다. "셋째댁은 어떤 곳입니까." 서준이 조용히 물었다. "셋째댁은 원래 큰댁과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헌데 우리 댁만큼 약하지도 않죠. 그러니 지금 세가 안은 큰댁이 우리 댁을 누르고, 셋째댁이 그 틈을 넘보는 형국입니다." 덕구가 설명했다. 서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곱씹었다. '힘없는 갈래의 폐물 조카.' 그는 자신의 위치를 그렇게 정리했다. 냉정할 만큼 정확한 요약이었다. 셋째댁이라는 이름이 그의 머릿속에 새로운 변수로 자리 잡았다. 큰댁 하나만 있는 판이 아니었다. 힘의 균형이라는 것은 언제나 셋 이상의 변수가 얽혀야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하는 법이었다. 그는 증권가에서 시장을 볼 때도 늘 그렇게 배웠다. 하나의 절대 강자만 존재하는 시장은 없다고. 하지만 그 냉정함 밑에서, 다른 감정이 조용히 자라고 있었다. '서열의 밑바닥에서 시작해도, 판을 읽는 자가 결국 이긴다.' 그는 증권가에서 몇 번이나 그것을 증명해 보인 적이 있었다. 다만 그때는 검을 들 필요가 없었다. 그때는 정보와 숫자만으로 판을 뒤집을 수 있었고, 몸이 상하는 일은 드물었다. 이 세계에서는 다를 것이라는 예감이, 그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방 안으로 돌아온 서준은 창밖으로 내려앉는 어둠을 바라보았다. 단전이 무너진 몸으로, 서열의 가장 밑바닥에서, 그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아직 답은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는 알게 되었다. 그날 밤, 그는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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