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천 원짜리 퇴역 용사

5화

서지우. 그 이름을 듣자마자 나는 십 년도 더 된 기억 하나가 뇌리를 스쳤다. 초등학교 시절, 여름방학마다 이 캠핑장에 놀러 오던 여자애가 있었다. 계곡에서 물고기를 잡겠다고 우기다가 미끄러져 빠지고, 나한테 건져달라고 악을 쓰던 그 애. 그때도 지금처럼 목소리가 컸던가. 기억은 흐릿한데 목청은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어... 혹시 그때 물에 빠졌던?"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나 아니면 어쩌나 싶어서 반쯤은 도망갈 준비를 하고 던진 질문이었다. "아니, 그건 좀 오래된 얘기 아니에요?" 지우가 눈을 흘기며 팔짱을 꼈다. '맞구나.' 부정하는 방식 자체가 인정하는 거였다. 어릴 때부터 저랬나. "근데 오빠는... 오빠 맞죠? 도현 오빠?" 지우가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물었다. "어, 맞아. 오랜만이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십 년 넘게 못 봤으니 서로 알아보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었다. 솔직히 나는 SNS 프로필 사진을 미리 봤으니 반칙이었지만. "저 이번에 대학 방학이라서 왔는데, 예약이 다 찼다고 해서 깜짝 놀랐어요." 지우가 캐리어 손잡이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연박으로 있고 싶은데 자리 있어요?" "어... 확인해볼게." 나는 예약 장부를 뒤적였다. 손가락으로 날짜 칸을 짚어가며 훑는데, 다행히 하루짜리 취소가 하나 눈에 들어왔다. '이건 운명인가, 아니면 그냥 우연인가.' 어느 쪽이든 자리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자리 났어. 대신 하루는 텐트 위치가 좀 애매할 수도 있는데." "괜찮아요! 저 원래 텐트 구석 자리 좋아해요." 지우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짐을 텐트에 부리며 캠핑장을 이리저리 둘러보는 그 뒷모습이, 어릴 때 뛰어다니던 모습이랑 겹쳐 보였다. 키만 훌쩍 컸을 뿐, 걸음걸이는 그대로였다. "여기 진짜 오랜만이다. 할아버지는 잘 계세요?" "그럭저럭. 허리가 좀 안 좋으셔서." 나는 대답했다. "입원까지는 아니고, 그냥... 무리하면 안 되는 정도야." "에휴, 어른들 몸은 다 그렇죠, 뭐." 지우가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근데 오빠, SNS에서 봤는데 여기 등심구이가 그렇게 맛있다면서요?" "아... 그거." 나는 살짝 당황했다. '설마 이 애까지 그거 때문에 온 건가.' 캠핑장 이름보다 등심구이 이름이 먼저 검색되는 시대라니. 할아버지가 알면 섭섭해하실지, 아니면 좋아하실지 감이 안 잡혔다. "저도 먹어보고 싶어서요! 오늘 되나요?" 지우가 기대에 찬 눈으로 물었다. 강아지 같은 눈빛이었다. 거절하기 어려운 종류의. "오늘은 재료가 다 떨어져서..." 나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아직 잡아 오지 못해서'였을 뿐. "에이, 그럼 내일은요?" 지우가 아쉬운 듯 물었다. "내일 한번 봐야지." 나는 애매하게 대답했다. '내일 던전 가서 뭐라도 잡아야 하나.' 속으로는 이미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시세, 부위, 그리고 오늘 밤 뭘 먹였는지에 따라 등심 맛이 달라지는 그 몬스터의 습성까지. 전생에 요리사였던 것도 아닌데, 어쩌다 보니 식자재 수급 계획까지 짜고 있는 나 자신이 조금 웃겼다. * 다음 날 새벽, 나는 지우 몰래 뒷산으로 향했다. 새벽 공기는 차가웠고, 발밑에서 밟히는 낙엽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혹시 누가 듣나.' 괜히 뒤를 한 번 돌아보고 나서야 걸음을 옮겼다. 동굴 입구에 서서 심호흡을 하고 손을 뻗었다. [미확인 던전에 진입합니다.] 익숙한 메시지였다. 이제는 이 문구를 보면 출근 카드 찍는 느낌마저 들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이번엔 다른 통로가 눈에 띄었다. 전에 봤던 공동 옆으로 좁은 길이 새로 열려 있었다. '저번에 그 그림자가 있던 쪽인가.' 동굴은 매번 조금씩 표정을 바꿨다. 마치 게임 맵이 업데이트되듯이.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는데,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심장이 쿵, 떨어지는 소리가 실제로 들리는 줄 알았다. 돌아보니 지우가 동굴 입구에 서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손전등도 없이, 후드티 하나만 걸친 채로. "여, 여기서 뭐 해?" 나는 최대한 태연하게 물었다. 목소리가 살짝 갈라진 건 눈치채지 못했길 바랐다. "그건 내가 물어봐야 할 거 같은데요." 지우가 팔짱을 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산책 나왔다가 이상한 바위 틈이 있길래 따라와 봤더니, 오빠가 여기로 들어가는 거예요." '하필 새벽에 산책을...' 나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런 전개는 내가 예상한 시나리오 중에 없었다. 가장 그럴듯한 시나리오는 '조용히 등심 재료 구해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돌아오기'였는데. "이거 던전이죠?" 지우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알아?" 나는 얼떨결에 인정해버렸다. 부정할 타이밍을 완전히 놓쳤다. "뉴스에서 몇 번 봤어요, 이런 파란 빛 나는 통로. 그리고 오빠 등심구이... 저거 몬스터 고기죠?" 지우가 다그치듯 물었다. 말투에서 확신이 뚝뚝 떨어졌다. 부정할 수가 없었다. "...맞아." 나는 한숨을 쉬며 사실대로 말했다. 지우의 눈이 커졌다. "미쳤어요? 등록 안 된 던전에서 몬스터 잡아다 요리해서 손님한테 판다고요?" 그녀가 목소리를 높였다. "불법인 거 알죠?" "...알아." 나는 순순히 시인했다. '변명할 방법이 없네.' 내가 생각해도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범죄 현장이었다. 지우는 한참 나를 노려보다가 갑자기 표정을 바꿨다. 노려보던 눈빛에서 호기심 쪽으로 스위치가 넘어가는 게 보였다. "근데... 오빠 이거 혼자 잡은 거예요? 여기 위험도 측정 불가라고 들었는데."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 뭐... 어찌어찌." 나는 얼버무렸다. '실은 그냥 손으로 뿔 잡아서 던졌다고 하면 믿을까.' 아마 안 믿을 거다. 나도 그때 상황을 다시 떠올리면 안 믿기니까. 지우가 잠시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치 오래된 물건에 숨겨진 흠집을 찾는 감정사처럼. "오빠 뭔가 이상해요. 그냥 평범한 사람 아니죠?" 예리했다. 어릴 때부터 눈치가 빠른 애였다는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물고기 잡다 빠져서 울면서도, 나중에 보니 자기가 어디서 넘어졌는지 정확히 손가락으로 짚어내던 애였다. "그건... 나중에 얘기하자." 나는 말을 돌렸다. 지금 여기서 각성이니 뭐니 설명하다가는 새벽이 다 지나갈 것 같았다. "할아버지 캠핑장 살리려고 하는 거예요, 그거 하나는 맞죠?" 지우가 팔짱을 풀며 물었다. "어, 그건 확실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만큼은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지우가 한참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결심한 듯 말했다. "좋아요, 대신 저도 껴줘요." "뭐?"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예상 시나리오 목록에 이것도 없었다. "저 대학에서 마케팅 동아리 하고 있어요. SNS 관리나 사진 찍는 건 제가 도와줄게요. 대신 이 던전 일은 저한테도 알려주고요." 지우가 조건을 걸었다. 말투는 가벼웠지만 눈빛은 진심이었다. '이거 완전 공범 만들기인데.' 하지만 손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었다. 할아버지 몸도 안 좋고, 나 혼자 던전에 재료 채집에 손님 응대까지 다 하려니 하루가 스물네 시간이 아니라 마흔여덟 시간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좋아, 대신 절대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나는 조건을 걸었다. "협회에 걸리면 그날로 캠핑장 문 닫는 거야. 알지?" "알아요, 알아. 저 그렇게 입 가벼운 사람 아니에요." 지우가 씩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콜." 나는 그 손을 마주 잡았다. 그렇게 조건에 합의하고 나자 지우가 맞잡은 손을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그런데 오빠한테 계속 존댓말 쓰려니까 이상하다. 예전처럼 말 놔도 되지?" "마음대로 해." "그럼 이제부터 놓는다." 지우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손을 맞잡고 있는데, 그 손이 생각보다 차가웠다. 새벽 공기 탓인지, 아니면 긴장한 탓인지. 그렇게 얼떨결에 협력자가 생겼다. 동굴 안쪽에서 다시 그 낮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르릉... 지우가 흠칫 놀라며 내 팔을 붙잡았다. 손톱이 살짝 파고들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저, 저건 뭐야?" 그녀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글쎄, 그건 나도 아직 몰라."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나도 저 안쪽에 뭐가 있는지 아직 확인 못 한 상태였으니까. '오늘은 저 안쪽까지 확인해봐야겠는데.' 다만 지우가 옆에 붙어 있는 이상, 오늘 계획은 조금 수정이 필요할 것 같았다. * 같은 시각, 서울 헌터협회 본부. 강태호는 사무실 소파에 앉아 태블릿으로 SNS 기사를 훑고 있었다. 화면 속에는 캠핑장 마당에서 연기를 피우며 구워지는 등심 사진과, "이 맛 실화냐"는 댓글들이 줄줄이 달려 있었다. "강원도 인제 캠핑장이라..." 그가 중얼거렸다. "등록 안 된 몬스터 재료 유통 의혹이라니, 재밌군." 옆에 있던 후배 헌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태호 선배님, 이거 저희 쪽에서 조사 나가나요?" "아니, 아직은." 강태호가 태블릿을 내려놓으며 미소 지었다. 느긋한 표정이었지만, 눈빛은 이미 뭔가를 파악하고 있는 사람의 것이었다. "근데 이 캠핑장 위치가 낯이 익은데." 그가 화면을 확대해 보다가 문득 미간을 좁혔다. 지도 위에 표시된 작은 점, 그 주변으로 이어진 산세가 어딘가 기억 한구석과 겹쳐지고 있었다. "이도현…… 잊고 있던 이름이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그가 협회 데이터베이스에 이름을 입력했다. 검색 결과는 단출했다. 랭크 F. 헌터 활동 이력 거의 없음. 특이사항 없음.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눈에 띄는 이력이었다. 같은 시기에 협회에 등록했지만 F랭크라는 이유로 조용히 묻혀 있던 남자. 협회 시절부터 이상하게 신경 쓰였던 그 이름이, 뜻밖의 장소에서 다시 강태호의 눈앞에 나타났다. 강태호는 잠시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손가락으로 턱을 쓸며 낮게 웃었다. "이거... 한번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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