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강원도 인제, 달빛계곡 캠핑장.
간판에 페인트가 반쯤 벗겨진 걸 보면 이름값을 못 한 지 오래라는 뜻이었다.
나는 뒷산 텃밭에 쭈그려 앉아 두릅을 꺾고 있었다.
'이 정도면 향은 살아있네.'
손끝으로 잎을 슥 비벼보고 코에 갖다 대는데, 이건 습관이라기보다 병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라면 하나를 끓여도 스프 넣는 타이밍에 목숨을 걸었고, 편의점 삼각김밥도 유통기한 몇 시간 남았는지부터 확인했다.
한번은 초등학교 소풍날, 김밥 옆구리가 터졌다고 반 애들 앞에서 진지하게 발표를 한 적도 있었다.
'그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리고... 10년을 이세계에서 구르다 왔더니 이 버릇이 더 심해졌다.
마왕성 지하실에서 발견한 정체불명의 버섯을 구워 먹겠다고 동료들 말리는 걸 뿌리친 게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그때 성기사 로엔이 울면서 말렸었다.
"주군, 그것은 필시 저주받은 버섯일 것입니다! 부디 재고하시지요!"
결과는? 존나 맛있었다.
물론 반나절 동안 배를 잡고 뒹굴긴 했지만, 그건 버섯 탓이 아니라 굽는 온도 조절 실패였다고 나는 지금도 믿고 있다.
"도현아! 밥 아직이냐!" 할아버지 목소리가 산 아래서 울렸다.
"내려가요!" 나는 소리치고 두릅 바구니를 들었다.
허리가 아프다면서도 목청은 여전히 쩌렁쩌렁한 할아버지, 이광수 씨.
캠핑장 사장이자 내 유일한 혈육이었다.
귀환하고 나서 헌터협회 등록 시험을 봤을 때, 나는 힘을 거의 다 숨겼다.
'괜히 눈에 띄어봐야 좋을 거 하나 없지.'
시험관이 내 스탯창을 보고는 하품을 하며 도장을 찍던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거 완전 노가다인데, 다음 분.'
그 무성의함이 나한텐 축복이었다.
결과는 F랭크.
최하위 판정을 받은 귀환자 취급을 받으며 조용히 살 수 있었다.
협회 게시판에 내 이름 석 자를 검색해봤자 나오는 거라곤 '이도현, F급, 특이사항 없음' 한 줄뿐이었다.
실력은 만렙인데 인지도는 완전 무명.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은퇴 생활 아닌가.
가끔 뉴스에서 유명 헌터들 인터뷰 나오는 거 보면서 '저 사람 나한테 한 방이면 훅 갈 텐데' 싶다가도, 그런 생각 자체가 피곤해서 금방 접었다.
이세계에서 십 년 구르는 동안 딱 하나 배운 게 있다면, 눈에 띄면 죽는다는 거였다.
몬스터한테든, 사람한테든.
그런 생각을 하며 산을 내려가던 중이었다.
발끝에 뭔가 걸렸다.
"어라."
덤불 사이로 시커먼 바위틈이 보였다.
어릴 때 여기서 술래잡기하면서 이 산을 안 뒤진 데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틈은 처음이었다.
'무너진 건가?'
나는 바구니를 내려놓고 틈 안을 들여다봤다.
서늘한 바람이 훅 끼쳐왔다.
여름인데 냉장고 문을 연 것 같은 온도였다.
손을 뻗어보니 팔뚝에 소름이 쫙 돋았다.
'이거 무슨 프리미엄 에어컨 바람도 아니고.'
바위틈 안쪽은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였는데, 이상하게 시선이 자꾸 그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치 뭔가가 안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그 순간, 눈앞에 낯익은 파란 글씨가 떠올랐다.
[미확인 던전을 발견하였습니다.]
[진입하시겠습니까?]
...
뭐?
나는 눈을 두어 번 껌뻑였다.
이세계에서나 보던 그 시스템 창이, 여기 강원도 뒷산 바위틈에서?
'귀환하면 이런 거 안 뜬다고 하지 않았나.'
분명 협회 오리엔테이션에서 그렇게 배웠다.
강사가 파워포인트까지 띄워가며 "귀환자 여러분은 더 이상 시스템의 개입을 받지 않습니다!"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했었는데.
그 말 믿고 나는 시스템 창 안 뜬다고 방심하고 살았다.
한국 땅에도 던전이 생긴다는 건 알고 있었다.
뉴스에서도 몇 번 봤으니까.
전국 각지에 게이트가 열리고, 협회에서 헌터들 파견하고, 아침 뉴스에 그런 소식이 나오면 할아버지는 혀를 끌끌 차며 채널을 돌리곤 했다.
"세상이 하 험해져서, 원." 그 말 뒤에는 항상 아침 드라마가 이어졌다.
근데 그게 하필 우리 할아버지 캠핑장 뒷산이라니.
이건 로또를 맞은 건지 사약을 받은 건지 감이 안 잡혔다.
한쪽으로는 심장이 벌렁거렸다.
'오랜만에 몸 좀 풀어볼까.'
또 한쪽으로는 등골이 서늘했다.
'이거 잘못 걸리면 또 그 아수라장 재현되는 거 아냐.'
"도현아! 국 식는다!"
다시 울리는 할아버지 목소리에 나는 얼른 창을 닫았다.
[진입을 보류합니다.]
메시지가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일단 밥부터 먹고 생각하자.'
나는 바구니를 챙겨 들고 다시 산길을 내려갔다.
그런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등 뒤가 자꾸 신경 쓰였다.
분명히 아무 소리도 안 나는데, 저 틈에서 뭔가 나를 부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냉장고 안에 아껴둔 마지막 삼겹살이 나를 유혹할 때처럼.
'참자, 참아. 오늘은 두릅전이나 부쳐 먹자.'
스스로를 다독이며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저길 안 가고는 못 배길 거라는 걸.
*
저녁상은 단출했다.
두릅전에 강된장, 그리고 어제 담근 열무김치.
프라이팬에서 두릅전이 지글거리는 소리가 부엌을 채웠고, 기름 냄새가 온 집안에 퍼졌다.
"이야, 이 두릅 향 죽인다!" 할아버지가 젓가락을 놀리며 감탄했다.
"그렇죠? 향이 딱 살아있잖아요." 나는 우쭐대며 대답했다.
'뭘 좀 아시네, 우리 할아버지도.'
솔직히 두릅 하나로 이렇게까지 흥이 나는 걸 보면, 나도 참 소박한 인간이구나 싶었다.
이세계에서는 용 심장 스튜니 불사조 알 오믈렛이니 온갖 진기한 요리를 먹어봤지만, 그중 어느 것도 지금 이 두릅전만큼 마음을 편하게 해주진 못했다.
식사를 하는 내내 낮에 본 그 파란 글씨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젓가락이 자꾸 허공에서 멈췄다.
"근데 할아버지, 뒷산에 원래 동굴 같은 거 있었어요?" 나는 슬쩍 물었다.
"동굴? 없지, 없어. 내가 거길 몇십 년을 다녔는데." 할아버지가 손사래를 쳤다.
"허리 아프기 전엔 산삼도 캐러 다녔었는데 말이야, 그런 건 못 봤어."
"진짜요? 이상하다..." 나는 국에 밥을 말며 딴청을 피웠다.
"왜, 뭐 봤냐?" 할아버지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뇨, 뭐, 그냥 궁금해서요. 옛날 만화에 그런 거 있잖아요, 산속에 비밀 동굴 있고 그 안에 보물 있고."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넘겼다.
'거짓말은 아니지, 실제로 보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할아버지는 별생각 없다는 듯 두릅전을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밥이나 먹어. 요즘 젊은 애들은 만화를 너무 많이 봐서 큰일이야." 툴툴거리면서도 웃는 낯이었다.
그럼 그렇지.
최근에 생긴 게 확실했다.
한국에도 던전이 종종 생긴다는 뉴스는 봤지만, 설마 내 앞마당에 생길 줄이야.
'신고를 해야 하나?'
협회에 신고하면 조사관들이 들이닥칠 거고, 던전 등급 매기고 봉쇄하고 난리가 날 게 뻔했다.
그럼 나는 다시 그 시끄러운 세계로 끌려 들어가게 된다.
인터뷰 요청, 스카우트 제의, 어디 소속 길드에서 눈독 들이는 시선들.
생각만 해도 벌써 피곤했다.
조용히 F랭크로 숨어 살던 계획이 물거품이 되는 거였다.
'일단은... 나 혼자 좀 봐야겠다.'
밥그릇을 비우며 나는 결심했다.
어차피 던전 하나쯤이야, 옛날에 씹어 먹던 몬스터들에 비하면 별거 아닐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도 한몫했다.
"할아버지, 저 내일 아침에 산 좀 더 둘러보고 올게요."
"뭐 하러? 위험하게." 할아버지가 눈을 흘겼다.
"운동 좀 하려고요! 요즘 살쪘잖아요." 나는 배를 두드리며 웃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살은 진짜 좀 쪘으니까.
다만 목적은 완전히 달랐을 뿐이었다.
"그래, 그래. 젊을 때 몸 관리 잘해둬라." 할아버지는 별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참, 국 더 줄까?"
"네, 주세요!" 나는 그릇을 냉큼 내밀었다.
이렇게 태연하게 거짓말하는 나 자신이 좀 뻔뻔하다 싶었지만, 어쩌겠는가.
할아버지 걱정시키느니 이게 나았다.
설거지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와서도 머릿속은 온통 그 바위틈 생각뿐이었다.
'등급이 얼마나 될까.'
'몬스터가 나온다면 뭐가 나올까.'
'혹시 마석 같은 거라도 있으면...'
이런 계산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이 좀 웃겼다.
몇 시간 전만 해도 조용히 살자고 다짐했으면서, 벌써 던전 안에서 뭘 챙길지 궁리하고 있으니.
그날 밤, 나는 이불 속에서도 계속 그 파란 글씨를 떠올렸다.
[미확인 던전을 발견하였습니다.]
이세계에서 마왕을 때려잡던 몸으로, 다시 던전을 마주하게 되다니.
'설레는 걸 보니 나도 참 어쩔 수 없는 인간이구나.'
식탐 다음으로 내가 좋아하는 게 바로 이거였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뭐가 있는지 확인하는 것.
그리고 그 안에 혹시 맛있는 재료가 있진 않을지 상상하는 것.
어쩌면 희귀한 약초라도 자생하고 있을지 모른다.
이세계에서 봤던 그 반짝이는 열매들, 한 입 베어 물면 온몸에 힘이 도는 그런 것들이.
'아니, 그것보다... 위험한 놈이 있으면 어떡하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등에 식은땀이 살짝 배었다.
혼자 들어가는 게 맞나 하는 의문도 잠깐 스쳤지만, 협회에 알리는 순간 모든 게 복잡해진다는 결론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눈을 감으며 다짐했다.
내일 아침, 아무도 모르게 저 던전에 들어가 보기로.
그게 이 조용한 시골 생활의 마지막 평화가 될 줄은, 그때는 전혀 몰랐다.
창밖에서 부엉이 우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그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에 빠져들었다.
내일이면 알게 될 것이다.
저 바위틈 너머에 뭐가 기다리고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