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천 원짜리 퇴역 용사

2화

다음 날 아침, 나는 해가 뜨자마자 뒷산으로 향했다. 할아버지는 아직 주무시는 눈치였다. 코 고는 소리가 마당까지 울리는 걸 보니 최소 한두 시간은 더 주무실 것 같았다. '좋아, 지금이 기회다.' 나는 슬리퍼 대신 등산화를 챙겨 신고, 혹시 몰라 배낭에 밧줄이랑 손전등까지 욱여넣었다. 이세계에서 몸에 밴 습관이었다. '준비성 없이 던전 들어갔다가 뒤진 놈들을 몇 명이나 봤는데.' 바위틈 앞에 서니 어제 봤던 그 시커먼 어둠이 여전히 나를 반겼다. 손을 대보니 서늘한 기운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마치 여름날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훅 끼치는 냉기 같았다. [미확인 던전을 발견하였습니다.] [진입하시겠습니까?] 어제와 똑같은 메시지였다. '하루 지났다고 없어질 리가 없지.'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손을 뻗었다. "진입."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순간, 시야가 확 뒤바뀌었다. 어두컴컴한 동굴 안이었는데, 벽면에서 은은한 청록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마치 무슨 지하 콘서트장 조명 같았다. '조명 담당자 누구야, 색감 하나는 인정.' 바닥은 축축했고, 발을 디딜 때마다 물기 밴 소리가 났다. 찌걱, 찌걱. [던전 정보: 미확인] [위험도: 측정 불가] 측정 불가? 협회 시스템에서 이런 표시는 흔치 않았다. 보통은 F부터 S까지 등급을 매기는데, 아예 측정이 안 된다는 건 둘 중 하나였다. 너무 약해서 시스템이 무시하거나, 너무 강해서 시스템이 감당을 못 하거나. '후자면 곤란한데.' 혹시나 해서 협회 앱을 켜봤지만, 여기는 신호조차 잡히지 않았다. 당연했다. 정식으로 등록되지 않은 던전이니까. 나는 걸음을 옮기며 옛 기억을 떠올렸다. 10년 전, 나는 고등학교 수학여행 버스에서 갑자기 빛에 휩싸여 이세계로 끌려갔다. 그때 버스 안에서 다들 비명을 지르고 난리였는데, 나는 그냥 창밖 풍경 구경하다가 정신 차려보니 낯선 초원 한복판이었다. '그때만 해도 이게 애니메이션 설정인 줄 알았지.' 그리고 그곳에서 용사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마왕의 군세와 싸우고, 성기사단과 함께 대륙을 횡단하고, 결국 마왕성 최심부까지 밀고 들어가 그 자식의 목을 땄다. 그 과정에서 동료 셋을 눈앞에서 잃었고, 몇 번은 나도 죽는 줄 알았다. 특히 마왕성 3층에서 만난 그 빙결룡인가 뭔가 하는 놈은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돋았다. '그때 왼팔 잘릴 뻔했던 거, 아직도 팔에 흉터 남아 있는데.' 돌아오는 문이 열렸을 때 나는 스물여덟이었다. 한국 나이로는 서른을 코앞에 둔 몸이지만, 신체 능력만큼은 인간이라 부르기 민망한 수준으로 성장해 있었다. 협회 검사관이 내 근력 수치를 재고 눈이 튀어나올 뻔했던 게 아직도 기억난다. 그 검사관 아저씨, 안경 벗겨질 뻔했지. 하지만 나는 그 수치를 조작했다. 아니, 정확히는 '억눌러서' 낮게 나오게 했다. '이 세계에서까지 싸우고 싶진 않았거든.' 동료들 절반이 죽고, 마왕성 문턱에서 몇 번이나 죽을 뻔했던 그 10년을 겪고 나니, 더는 전투 같은 건 꼴도 보기 싫었다. 그래서 시골로 내려왔다. 할아버지 캠핑장 일이나 도우면서 조용히 늙어가자, 그게 내 계획이었다. 그런데 뒷산에서 던전이 튀어나올 줄이야. 인생 참 얄궂었다. 동굴을 따라 십여 분쯤 걸었을까, 길이 갑자기 넓어지면서 커다란 공동이 나타났다. 천장이 얼마나 높은지, 손전등을 위로 비춰도 끝이 안 보였다. 그리고 그 안에서 뭔가가 움직였다. 크르릉... 덩치가 어른 황소만 한 짐승이었다. 몸통은 사슴을 닮았는데 뿔이 황금빛으로 번쩍이고, 눈은 시뻘겋게 타올랐다. '무슨 게임 보스 몬스터도 아니고.' [몬스터 발견: 황금뿔사슴] [등급: B] B급이라니. 한국 헌터협회 기준으로 B급이면 지역 헌터팀이 통째로 출동해야 하는 수준이었다. 뉴스에서 B급 몬스터 토벌하는데 헌터 스무 명이 붙었다는 얘기를 본 적이 있었다. 그때 다친 헌터가 몇 명이라던가, 인터뷰하던 팀장 얼굴이 반쯤 넋 나가 있었던 것도 기억난다. 짐승이 나를 발견하고 콧김을 뿜었다. 프쉬이익. 침이 바닥에 튀는 게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크아앙! 놈이 달려들었다. [경고: 위협 감지] 아니, 이건 진작 알았거든. 시스템도 참 뒷북이다. 쿵! 쿵! 쿵! 땅이 울릴 정도로 묵직한 발소리였다. 발밑에서 흙먼지가 튀어 오를 정도였다. 나는 옆으로 살짝 몸을 비틀었다. 슈아아악! 놈의 뿔이 허공을 가르며 내 옆구리를 스칠 뻔했다. 머리카락 몇 가닥이 잘려 나가는 게 느껴졌다. '아, 이거 이발비 굳었네.' '이 정도 속도면...' 솔직히 마왕성 정문 지키던 문지기 골렘이 더 빨랐던 것 같은데. 나는 손을 뻗어 놈의 뿔을 붙잡았다. 콰직! 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짐승이 그대로 옆으로 나가떨어졌다. 쿠당탕! 동굴 벽에 부딪혀 돌 부스러기가 우수수 떨어졌다. 힘을 반의반도 안 썼는데 이 꼴이었다. [전투 종료] [사냥 성공: 황금뿔사슴] [획득: 황금뿔사슴 고기 x1, 황금뿔 x1] 나는 쓰러진 짐승을 내려다보며 잠깐 멍하니 서 있었다. '이거... B급 맞아?' 마왕성 근처 잡몹들도 이거보단 셌던 것 같은데. 그때 잡몹 중에 뿔 달린 놈들은 최소 이거 세 배는 빨랐고, 뿔에 독까지 발려 있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이 들었다. 방금 내가 한 짓, 만약 CCTV나 목격자가 있었다면? F랭크 등록 헌터가 B급 몬스터를 맨손으로 때려눕혔다. 이게 협회에 알려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안 봐도 뻔했다. 조사, 재심사, 스카우트 제의, 아니면 의심에 의심을 더한 감시. 카메라 들이대는 기자들, 인터뷰 요청, 그러다 어느 순간 국가 소속 헌터 명단에 이름이 올라가겠지. '절대 안 돼.' 조용히 살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건데, 다시 그 시끄러운 세계로 끌려 들어갈 순 없었다. 나는 짐승의 사체를 내려다보며 고민에 빠졌다. 버리고 갈까, 아니면 챙겨 갈까. 코를 킁킁거려 보니 고기 냄새가 예사롭지 않았다. 훈제향 비슷한 것도 살짝 섞여 있는 게, 이건 손질만 잘하면 최고급 스테이크감이었다. '아니, 이건 챙겨야지.' 식탐이 이성보다 한 발 빨랐다. 나는 이세계에서 배운 해체 기술로 재빨리 부위별로 손질했다. 등심, 안심, 그리고 황금빛 뿔까지. 칼질 몇 번에 부위가 깔끔하게 갈라지는 걸 보고 스스로도 좀 감탄했다. '10년 동안 몬스터만 잡고 다녔더니 이런 데서 써먹네.' [아이템 획득: 황금뿔사슴 등심, 안심, 황금뿔] 등급이 뜨는 걸 보니 이거 팔면 꽤 값이 나갈 것 같았다. 하지만 팔 생각은 없었다. 이건 오늘 저녁 캠핑장 손님 상에 올릴 재료였다. 머릿속에 벌써 메뉴판이 그려졌다. 황금뿔사슴 등심 스테이크, 안심 구이, 그리고 곁들일 감자. '이 정도면 별점 다섯 개는 그냥 받겠는데.' 짐을 챙겨 동굴 밖으로 나오는 길, 나는 스스로 규칙을 세웠다. 첫째, 힘을 절대 남 앞에서 드러내지 않는다. 둘째, 던전은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는다. 셋째, 재료만 챙겨서 조용히 나온다. 계단식으로 규칙을 쌓으니 그럴싸한 결심이 됐다. '좋아, 이걸로 캠핑장을 살려보자.' 망해가던 할아버지 캠핑장을, 던전 식재료로 되살린다. 말도 안 되는 계획이지만 왠지 될 것 같았다. 동굴 입구로 나오는데 등 뒤에서 뭔가 낮게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르릉... 방금 놈보다 훨씬 낮고 굵은 울림이었다. 동굴 전체가 살짝 떨리는 느낌마저 들었다. 돌아보니 방금 잡은 놈보다 훨씬 더 큰 그림자가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크기만 봐도 방금 그 사슴 세 마리는 합쳐놓은 듯했다. '이건 또 뭐야.'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뭐가 있든, 그건 다음에 확인하기로. 나는 배낭을 고쳐 메고, 뒤도 안 돌아본 채 동굴 밖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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