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십칠만 년 전, 나는 아직 새로 즉위한 옥황상제였다.
즉위식이 끝난 지 사흘째 되던 날, 나는 대전 가장 안쪽 방에 홀로 앉아 있었다.
금으로 세공된 아홉 마리 봉황이 새겨진 옥좌였고, 그 아래로 백옥 계단이 아흔아홉 개 놓여 있었다.
계단 하나하나에는 팔괘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즉위식 날 예관이 그 뜻을 설명해줬지만 나는 절반도 기억하지 못했다.
대전은 넓었지만 그 안에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기둥 사이로 향 연기가 흘러다녔고, 그 향은 침향목으로 만든 것이라 했는데 향이 진할수록 나는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신하들은 하루에 세 번 문안을 올리고 물러났고, 그 외에는 누구도 내 곁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첫 번째 문안은 인시, 두 번째는 오시, 세 번째는 유시였는데, 나는 그 세 번의 문안 사이 시간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몰랐다.
권력자의 곁은 늘 텅 비어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옥좌에 앉아 있으면 시야 끝까지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 때가 있었고, 그럴 때마다 나는 손끝으로 옥좌의 팔걸이를 문질렀다.
그 팔걸이에는 이미 내 손자국이 옅게 남아 있었다.
그날 저녁, 나는 대전 뒤편 연못가를 걷고 있었다.
연못은 둘레가 백 걸음쯤 됐고, 그 주변에는 백일홍이 심어져 있었지만 아직 꽃이 피지 않은 계절이었다.
연못 물은 유리처럼 맑았고, 물속에서 검은 형체 하나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것을 내려다봤다.
물속의 그림자는 처음엔 물고기인가 싶었는데, 크기가 내 팔뚝만 했다.
"뭐냐, 넌." 내가 물었다.
물속의 형체가 천천히 솟아올랐다.
작은 흑룡이었다.
비늘 하나 없이 매끈한 몸통에, 눈동자만 유난히 붉은 새끼 용이었다.
몸통은 먹물을 풀어놓은 듯 새까맸고, 물기가 마르지 않아 연못가 돌바닥에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렸다.
"나는 당신의 감정이다." 그것이 말했다.
"내 감정?" 내가 되물었다.
"칠정육욕, 당신이 억누르고 산 것들이 뭉쳐서 나온 게 나야." 흑룡이 대답했다.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즉위한 지 사흘밖에 안 된 옥황상제 앞에 나타나 저런 말을 하는 짐승이라니, 믿을 도리가 없었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흑룡은 그날부터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연못에서 나와 내 소매 속으로 파고들었고, 나는 그것을 굳이 쫓아내지 않았다.
소매 속에서 꼼지락거리는 그 작은 몸뚱이가 신경 쓰였지만, 뿌리쳐 낼 만큼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외로웠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옥황상제가 외롭다는 말을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으니, 그 말을 나 자신에게 하는 데만도 계절이 몇 번 바뀌었다.
며칠 후, 흑룡은 내게 이름을 지어달라고 했다.
"이름 같은 거 없어도 되잖아." 내가 말했다.
"그래도 있으면 좋잖아, 다른 신선들도 다 이름이 있는데." 흑룡이 대답했다.
"넌 신선이 아니잖아." 내가 지적했다.
"신선이 아니어도 이름은 있어야지." 흑룡이 우겼다.
나는 한참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묵룡, 검은 용이니까 묵룡이라고 하자."
"단순하네." 묵룡이 말했다.
"싫으면 다른 걸로 지어줄까?" 내가 물었다.
"아니, 그냥 그걸로 할래." 묵룡이 대답했다.
이름을 정한 뒤로 묵룡은 그 이름을 몇 번이나 스스로 되뇌었다.
"묵룡, 묵룡."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소매 속에서 들렸다.
그때부터 나는 조금씩 묵룡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다른 신하들 앞에서는 절대 하지 않던 말들이었다.
"오늘 회의에서 남해 용왕이 또 헛소리를 했다." 내가 말했다.
"헛소리 아니고 사실은 네가 그 자리에서 아무 말도 못 한 거잖아." 묵룡이 대꾸했다.
"뭐라고?" 내가 언성을 높였다.
"화나면 화내라고 몇 번을 말해, 억누르지 말고." 묵룡이 말했다.
나는 그 말에 아무 대꾸도 못 하고 옥좌 팔걸이를 손끝으로 두드리기만 했다.
묵룡은 그런 나를 놓치지 않고 계속 몰아붙였다.
"봐, 지금도 그러잖아. 화났으면서 손가락으로 나무만 두드리고 있잖아." 묵룡이 지적했다.
"...알겠다." 내가 짧게 대답했다.
묵룡은 내 앞에서만큼은 눈치를 보지 않았다.
그게 처음엔 불편했지만, 곧 편해졌다.
누군가 내 앞에서 솔직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오랫동안 잊고 지낸 감각이었다.
신하들은 내 앞에서 눈을 내리깔고 말을 골랐지만, 묵룡은 눈을 똑바로 뜨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
그 낙차가 나에게는 오히려 위로가 됐다.
한 달쯤 지났을 무렵, 나는 밤마다 묵룡과 대전 뒤뜰을 걸었다.
뒤뜰에는 오래된 계수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는데, 나이가 삼천 년쯤 됐다고 전해지는 나무였다.
나무 둘레는 어른 다섯이 손을 맞잡아야 겨우 감을 수 있을 정도였고, 가지 끝에는 은방울 같은 잎이 무성했다.
그 나무 아래 앉아 나는 묵룡에게 내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이 자리에 앉을 운명이었다." 내가 말했다.
"그래서 뭐가 어때서." 묵룡이 물었다.
"누구도 나한테 뭘 하고 싶냐고 묻지 않았다는 게 문제지." 내가 대답했다.
묵룡은 그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만 내 무릎 위로 올라와 몸을 웅크렸다.
그 작은 몸이 무릎 위에서 체온을 나눠주는 게, 그동안 대전에서 느끼지 못했던 온기였다.
나는 손바닥으로 묵룡의 매끈한 등을 쓸어내렸다.
비늘이 없어 매끄러웠지만, 그 아래로 심장이 뛰는 게 손끝에 느껴졌다.
'이 조그마한 것도 심장이 뛰는구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날 이후로 묵룡은 내 곁에서 유일하게 허락된 존재가 되었다.
대전에서는 여전히 권위 있는 옥황상제였지만, 그 뒤뜰에서만큼은 그저 외로운 존재였다는 걸, 묵룡만이 알았다.
다른 신선들은 내 앞에서 고개를 숙였지만, 묵룡은 내 앞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 차이가 나에게는 컸다.
옥좌에 앉아 있을 때 나는 모두의 위에 있었지만, 계수나무 아래에서는 그 누구의 위에도 있지 않았다.
오히려 묵룡 앞에서는 내가 더 어린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렇게 수백 년이 흘렀다.
천상계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과 다르게 흘렀고, 나는 그 세월 동안 조금씩 묵룡에게 마음을 열었다.
계수나무는 그 사이 또 한 뼘쯤 자랐고, 연못의 백일홍은 몇 번이나 피고 졌다.
나는 여전히 하루 세 번 문안을 받았고, 여전히 옥좌에 앉아 남해 용왕의 헛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밤이 되면 뒤뜰로 나가 묵룡과 나란히 앉는 그 시간만은 변하지 않았다.
그 시간이 없었다면 나는 그 긴 세월을 버티지 못했을 거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하지만 그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다.
묵룡이 천상계의 규율을 어긴 사건이 벌어진 건, 그로부터 그리 오래지 않아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