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하준아."
대부가 부르는데도 발이 안 움직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냥 낡아빠진 창고인 줄 알았던 이 방이, 문을 여는 순간부터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을 온몸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먼지가 켜켜이 쌓인 선반들, 다 삭아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물건들 사이로, 딱 하나 멀쩡한 게 있었다. 탁자 위에 놓인 구슬. 손바닥만 한 크기에, 색이 계속 바뀌었다. 붉은색에서 푸른색으로, 다시 검은색으로.
구슬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내 이름을 다시 불렀다. 이번엔 훨씬 가까이서.
[이하준.]
귓속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직접 울리는 소리였다. 그 순간 나는 도망칠 생각조차 못 했다. 정확히 말하면, 도망칠 필요가 없다는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마치 오래 알던 사람이 부르는 것 같은, 그런 착각. 이게 얼마나 위험한 논리인지는 나중에야 깨달았다.
"뭐, 뭔데."
입에서 나온 목소리가 스스로도 놀랄 만큼 떨렸다. 목구멍이 바싹 말라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다. 박두석은 문가에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뭔가 외치려는데, 발이 문턱을 넘지 못했다. 정말로 넘지 못하는 건지, 넘을 용기가 없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나조차 대부가 저렇게 얼어붙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저 인간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겁을 안 먹어본 게 없을 것 같은 인물인데.
"대부, 뭐예요, 저거."
대답이 없었다. 입만 벌린 채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너는 나를 원했다.]
"내가 언제요? 방금 처음 봤는데요."
목소리가 침착하게 나온 게 스스로도 의아했다. 사실은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는데, 몸이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네가 이 문을 열기 전에 바랐다. 몸이 나았으면 좋겠다고. 힘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소름이 확 끼쳤다. 서쪽 탑 복도에서 벽 앞에 서서 혼자 중얼거렸던 그 말을, 이게 어떻게 알고 있나. 그때는 정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해서, 혼자 넋두리하듯 뱉은 말이었다. 필요의 방이 필요를 읽어서 물건을 만들어낸다는 게 그냥 전설이 아니라 진짜였구나, 하는 생각과 동시에 등줄기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그거 그냥 혼잣말이었어요. 진짜로 뭘 어떻게 해달라는 게 아니었고···"
말을 하면서도 손발이 저려오는 게 느껴졌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감각. 이건 협상이 아니었다. 이미 결론이 나 있는 상황에서 형식적으로 내 의견을 물어보는 자리, 딱 그런 느낌이었다.
[상관없다. 필요는 필요다.]
"아니 그런 게 어디 있어요. 혼잣말도 계약이 되면 세상에 사기꾼이 왜 있어요. 그냥 다들 혼잣말로 소원 빌고 끝내지."
말이 헛나왔다. 이 상황에서도 입은 살아서 삐딱한 소리를 뱉어내고 있었다. 습관이라는 게 이렇게 무섭다.
구슬의 색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빛이 방 전체를 채웠고, 나는 눈을 제대로 뜨기도 힘들었다. 그 빛이 눈꺼풀을 뚫고 들어오는 것처럼 뜨거웠다. 뒤에서 박두석이 뭔가를 외치는 소리가 들렸는데, 내용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명 때문인지, 아니면 그 소리를 구슬이 삼켜버린 건지.
"만지지 마라!"
그 말만은 분명히 들렸다. 대부의 목소리가 그렇게 갈라지는 것도 처음 들었다. 문제는 이미 내 손이 구슬을 향해 뻗어가고 있었다는 거였다. 스스로 움직인 게 맞는지도 확신이 안 갔다. 몸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마치 누군가 내 팔을 뒤에서 붙잡고 조종하는 것처럼, 손가락 하나하나가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뻗어나갔다.
멈추라고, 손을 붙잡고 뇌가 소리치는데도 손끝은 계속 나아갔다. 이게 될 리가 없는데, 하는 생각이 들 때 이미 손바닥이 구슬에 닿아 있었다.
구슬을 쥔 순간, 세상이 하얗게 지워졌다.
고통이 발끝에서 시작해 정수리까지 관통했다. 뼈가 안에서부터 부서지는 감각, 피가 거꾸로 흐르는 감각, 심장이 두 배로 빨리 뛰다가 아예 멈춰버릴 것 같은 감각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비명을 지르려 했는데 목에서 소리가 안 나왔다. 성대가 얼어붙은 건지, 아니면 무언가가 억지로 목을 틀어막은 건지 구분이 안 됐다.
코에서 뜨거운 게 흘렀다. 손으로 닦을 새도 없이 입안 가득 피 맛이 퍼졌다. 쇠 맛, 짜고 비릿한 맛이 혓바닥을 채웠다. 이게 진짜 죽는 건가, 라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는데, 그 생각조차 다음 고통에 밀려 흩어졌다.
[드디어···]
목소리가 이제는 머릿속이 아니라 몸속에서 울렸다. 심장 근처, 정확히는 심장 그 자체에서 말하는 것 같았다. 마치 심장이 입이 되어 말을 뱉어내는 느낌. 이런 감각을 설명할 단어가 있으면 누가 좀 알려줬으면 좋겠다.
[오랜만이구나, 그릇이여.]
"그릇? 무슨···"
말을 끝맺기도 전에 다시 고통이 몰아쳤다. 이번엔 시야가 아예 새하얗게 지워졌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 상태에서 고통만 남아 있는 게, 오히려 더 무서웠다. 눈을 뜨고 있는지 감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멀리서 박두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뭔가를 외치는 것 같았는데, 그 말이 도와달라는 건지 도망치라는 건지 구분이 안 됐다. 발소리가 가까워지는 것 같기도 했다. 문턱을 넘는 소리, 아니면 그냥 내 착각.
바닥에 쓰러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등이 차가운 돌바닥에 부딪혔는데 이상하게 그 통증조차 다른 고통에 묻혀 버렸다. 몸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통증 덩어리가 되어버린 것 같아서, 등에 부딪힌 부위 하나쯤은 그냥 잡음 수준이었다.
[너를 찾는 데 오래 걸렸다.]
목소리가 이번엔 더 낮고 느리게 울렸다. 마치 오래 참아온 뭔가를 이제야 토해내는 것처럼.
"내가 뭔데···"
턱이 덜덜 떨려서 말이 자꾸 끊겼다. 이 상황에서도 질문은 해야 한다는 이상한 오기가 남아 있었다. 뭔지도 모르고 죽는 건 너무 억울하니까.
[네가 아니어도 됐다. 다만 네가 나를 원했다. 그러니 너다.]
말이 이상했다. 나여도 되고 아니어도 됐다는 게, 대체 무슨 자격 조건인가. 아무나 걸리면 그냥 잡아먹겠다는 거잖아, 이건. 억울했다. 억울해할 정신이 남아 있다는 것도 웃겼다.
하지만 그 의문을 더 이어갈 정신이 없었다. 눈앞이 점점 어두워졌고, 그 어둠 속에서도 심장이 뛰는 소리만은 이상하게 선명하게 들렸다. 내 심장인지 아닌지도 이제는 헷갈렸다.
마지막으로 본 건 박두석이 결국 문턱을 넘어 나에게 달려오는 모습이었다. 그 표정이 뭔가를 말하려는 것 같았는데, 무슨 말인지는 끝까지 듣지 못했다.
그리고 그 뒤로 모든 게 캄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