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시한부 마법사의 각성

3화

문을 열었을 때 처음 든 생각은, 여기 생각보다 넓다는 거였다. 창고처럼 물건이 산더미로 쌓여 있는데 끝이 안 보였다. 천장은 눈에 안 들어올 만큼 높았고, 벽은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서 끝나는지 짐작도 안 됐다. 형광등 같은 건 당연히 없었는데도 방 전체가 뿌옇게 밝았다. 빛이 어디서 오는지 궁금했지만 이내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여기서 논리를 따지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것 같았다. 낡은 갑옷, 부서진 지팡이, 라벨도 안 붙은 마법서, 심지어 어디서 온 건지 모를 낡은 침대까지. 침대 프레임에는 녹이 슬어 있었고, 매트리스는 반쯤 꺼져 있었다. 저기서 누가 잤을까 싶다가, 그 생각 자체가 소름 끼쳐서 얼른 다른 데로 눈을 돌렸다. 전부 누군가가 한때 필요했다가 버려진 것들이었다. "진짜 있었네." 혼자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방 안에서 이상하게 울렸다. 벽에 부딪혀 돌아오는 게 아니라, 방 자체가 내 목소리를 흡수했다가 조금 다른 톤으로 뱉어내는 느낌이었다. 기분이 나빴다. 그래도 나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발밑에서 먼지가 뽀얗게 일었다. 몇 년, 아니 몇십 년은 쌓인 먼지 같았는데, 이상하게 재채기는 안 나왔다. 딱히 뭔가를 찾으려는 목적은 없었다. 그냥 벽이 문이 되는 걸 봤으니 확인은 해봐야겠다는 정도였다. 이런 거 그냥 넘어가면 나중에 후회한다는 걸, 지금까지 겪은 일들로 충분히 배웠으니까. 물건 더미를 몇 개 지나쳤다. 부서진 검, 손잡이만 남은 도끼, 표지가 다 뜯긴 책들. 값이 나갈 것 같은 물건도 간간이 보였다. 저건 팔면 얼마나 받을까, 하는 생각이 스치는 순간 스스로가 좀 한심해졌다. 지금 이 상황에 시세 계산이라니. 그런데 몇 걸음 걷다 보니 이상하게 시선이 한 방향으로 끌렸다. 물건 더미들 사이, 낮은 상자 위에 뭔가가 놓여 있었다. 무지개빛 구슬이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에, 표면이 계속 색을 바꿔가며 빛났다. 빨강이었다가 초록이었다가 파랑으로 넘어가는데, 색이 바뀌는 속도가 일정하지 않았다. 어떤 색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고, 어떤 색은 한참을 머물렀다. 마치 그 안에 뭔가가 살아서 숨을 쉬는 것처럼. 주변에 다른 물건들은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는데, 그 상자와 구슬만은 유독 깨끗했다. 마치 누가 방금까지도 신경 써서 닦아놓은 것처럼.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발이 그쪽으로 향했다. 나는 그 앞에 멈춰 섰다.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감각이 팔뚝까지 타고 내려왔다. 위험하다는 감이 왔다. 살면서 이런 감이 틀린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게 뭔데 여기 혼자 있어." 필요의 방에 있는 물건들은 누군가가 필요로 했던 것들이라고 했다. 그러면 이 구슬은 누가 필요로 했을까. 그리고 왜 아무도 안 가져갔을까. 저렇게 반짝거리고 예쁜 걸, 이 창고 안에서 값나가는 걸 알아볼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진작 챙겼을 텐데. 답을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위험한 건 보통 아무도 안 건드리니까 남아 있는 거다.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몸이 말을 안 들었다. 그런데도 나는 상자 앞에 쭈그려 앉아 구슬을 눈높이까지 들여다봤다. 가까이서 보니 구슬 안쪽에 미세한 균열 같은 게 있었다. 균열을 따라 색이 스며들고 빠져나가는 게, 마치 그게 구슬의 혈관 같았다. 손을 뻗으면 만져질 것 같은 거리였다. 만지지는 않았다. 그 정도 판단력은 남아 있었다. 구슬 표면에 내 얼굴이 비쳤다. 색이 계속 바뀌는 표면이라 얼굴도 계속 색이 바뀌었다. 빨간 얼굴, 초록 얼굴, 파란 얼굴. 웃기지도 않은데 잠깐 웃음이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는 것도 어지간히 정신이 나갔다는 증거였다. 그러다 한 순간, 색이 전부 멈췄다. 투명해졌다. 그 안에서 뭔가가 나를 마주 보고 있는 게 보였다. 형체는 정확하지 않았다. 그저 눈 같은 게 있었고, 그게 나를 정확히 바라보고 있다는 확신만 들었다. 눈이라고 하기도 애매했다. 눈동자도 없고 흰자도 없이, 그냥 그 자리에 시선이 고정돼 있다는 느낌만 있었다. 숨이 턱 막혔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지만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진짜 위험한 순간에는 사람이 이렇게 얼어붙는구나, 하는 쓸데없는 감상까지 스쳤다. 이럴 때 몸이 얼어붙는 건 다큐멘터리에서나 보는 줄 알았는데, 직접 겪어보니 그냥 개 같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는데 정작 손끝은 차갑게 식어갔다. 이상한 균형이었다. 안에서는 뜨겁고 밖에서는 차가운. 그 순간,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하준아." 놀라서 돌아봤다. 박두석 아저씨였다. 문가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표정이 이상했다. 반가움이나 걱정이 아니라, 뭔가를 견디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이를 악물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숨을 참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저씨. 여기 어떻게···" "거기서 떨어져." 목소리가 낮고 갈라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무릎이 삐끗해서 넘어질 뻔했지만 그럭저럭 버텼다. 그런데 그의 시선은 나를 보는 게 아니라 내 등 뒤, 그 구슬을 향해 있었다. 마치 내가 아니라 그 구슬한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저게 뭔데요?" "몰라도 돼. 그냥 나와." "몰라도 되는데 이렇게 뛰어오셨어요?" 말이 곱게 안 나갔다. 이 상황에 대한 짜증, 아니면 두려움, 아니면 둘 다가 섞여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아저씨의 눈이 잠깐 흔들렸다. "아저씨가 여기 있는 이유는요?" "···" 그는 대답 대신 문가에서 한 발짝도 더 들어오지 않았다. 이상했다. 위험하다고 말하면서 정작 나를 끌고 나가지도 않았다. 진짜 위험하면 뛰어들어와서 팔을 잡아채야 정상 아닌가. 그런데 그는 문틀을 붙잡은 채로, 마치 그 선을 넘으면 뭔가 큰일이 난다는 듯이 딱 그 자리에서만 서 있었다. 감옥에서 나온 뒤로 그가 보인 행동들이 전부 이런 식이었다. 다가오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놓는 것도 아닌, 애매한 거리. 밥은 챙겨주면서 눈은 안 마주치고, 안부는 물으면서 대답은 짧게 끝내고. 처음엔 그냥 어색해서 그런가 했는데, 이제는 확실히 알겠다. 어색함이 아니라 뭔가를 억누르고 있는 거였다. "아저씨." 한 걸음 다가가려 했더니 그가 뒤로 물러섰다. 정확히 내가 다가간 만큼, 그도 물러섰다. 그 반응이 답이었다. 그는 나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내 근처에 있는 뭔가를 두려워했다. 가슴 한쪽이 이상하게 뻐근해졌다. 두려움도 서러움도 아닌, 그 중간쯤 되는 감정이었다. 이름 붙이기도 애매한. "저 구슬 때문이에요? 저것 때문에 요즘 저 피하신 거예요?"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 말과 표정이 안 맞았다. 상관없다는 사람이 저런 얼굴을 할 리 없었다.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을 리도 없고. "상관없는 일인데 왜 그렇게 겁먹은 얼굴을 하고 계세요." "하준아." 그가 낮게 이름을 불렀다. 경고하는 투였다. 하지만 그 경고가 나를 향한 건지, 아니면 내 등 뒤의 뭔가를 향한 건지 헷갈렸다. 그때 등 뒤에서 온도가 바뀌는 게 느껴졌다. 구슬 쪽에서였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방 안의 공기가 미세하게 무거워졌고, 목덜미의 털이 곤두섰다. 그것이 우리 대화를 듣고 있었다. "두석 씨." 낮고 이상한 목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사람 목소리가 아니었다. 여러 겹으로 울리는, 오래된 것 같은 소리였다. 마치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동시에, 서로 다른 속도로 같은 말을 하는 것 같은 소리였다. 등에 소름이 쫙 끼쳤다. 도망치고 싶은데 다리가 여전히 말을 안 들었다. 박두석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원래도 하얗던 얼굴이 아예 종이처럼 변했다. 입술까지 하얘지는 걸 눈으로 봤다. 그가 처음으로 나를 향해 소리쳤다. "당장 이리 나와, 하준아!" 목소리가 갈라지면서 거의 비명처럼 들렸다. 감옥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 후로 몇 번을 마주쳤을 때도 저런 목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게 오히려 더 무서웠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는 걸 그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다. 구슬이 내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그 어떤 말보다 선명하게 다가왔다. 내가 이름을 말한 적도, 이 방에 들어온다고 누구에게 알린 적도 없었다. 그런데 저 안의 것은 이미 나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등 뒤에서 색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빨강, 초록, 파랑, 그리고 다시 투명. 그 눈 같은 것이 다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엔 더 가까워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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