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눈떠보니 벌레 여자였다

2화

머릿속이 하얗게 타들어가는 동안 나는 그저 눕혀진 자세로 눈만 굴렸는데, 이게 꿈이라면 언제쯤 깨는 게 맞는 건지 계산이 서지 않아서였다. 등에 닿는 흙바닥은 축축했고, 코끝으로는 낯선 풀냄새가 스며들었으며, 그 냄새가 진짜라는 사실이 오히려 나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꿈이라면 이렇게 구체적일 필요가 없잖아. 발가락 하나까지 감각이 살아있는데, 이게 꿈이라고 우기는 게 더 억지스러운 거 아닌가. 선우, 아니 선우였던 존재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자기 손을 내려다보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손가락 사이로 희미하게 빛이 새어 나오는 것 같기도 했는데, 착각인지 아닌지 확인할 정신도 없어 보였다. "이거, 씨발, 이게 뭐야." 그가 낮게 내뱉었는데, 목소리는 분명 선우의 것이었으나 그 안에 뭔가 낭랑하고 맑은 울림이 섞여 있어서 원래 목소리와는 조금 다르게 들렸다. 나는 그 목소리를 듣고서야 저게 정말 선우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얼굴을 보고도 못 알아봤는데 목소리로 알아본다는 게 좀 웃기긴 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를 되짚어보려면 그 전에 벌어진 일들부터 순서대로 정리해야 했다. 청림교도소 3동 독방, 나와 선우는 같은 방을 쓰게 된 지 보름 정도 된 사이였다. 나는 이 년째 그곳에 복역 중이었고, 죄목은 폭행치사였는데, 정확히 말하면 어린 시절부터 나를 짓밟았던 새아버지라는 인간을 견디지 못해 손찌검을 했다가 그대로 숨이 끊긴 사건 때문이었다. 재판정에서 판사는 정당방위를 일부 인정했지만 형은 형이었고, 나는 그 안에서 매일 밤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내가 정말 남자로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감방 안에서까지 나는 여자가 되고 싶다는 말을 삼켰고, 그저 조용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버텼다. 그 좁은 방에서 유일하게 위안이 되었던 건 밤마다 창틀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바람 소리였는데, 그것마저 이제는 그리운 기억이 되어버린 셈이었다. 선우는 나보다 늦게 들어온 사람이었는데, 죄목은 특수폭행이라고 했다. 정확히 뭔 일이 있었는지는 서로 묻지 않는 게 이 안의 불문율이었다. 다만 선우가 밤마다 손목의 흉터를 만지작거리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었고, 그 흉터가 자해였는지 아니면 다른 폭력의 흔적이었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서로 말을 섞은 적도 별로 없었다. 밥 먹을 때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까딱하는 정도, 그게 우리 관계의 전부였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밤에 잠이 안 올 때면 옆 침상에서 들리는 그의 숨소리가 신경 쓰였다. 이런 감정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는 몰랐지만, 적어도 미워하는 감정은 아니었다. 그런 우리가 어느 밤 갑자기 빛에 휩싸였고, 정신을 잃었다가 여기, 이 낯선 숲에 떨어졌다. 빛이 방 전체를 삼킬 때 나는 분명 눈을 뜨고 있었는데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그 순간 몸이 붕 뜨는 감각과 동시에 속이 뒤집히는 듯한 어지러움이 몰려왔었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 꼴이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은 아니었다. 개연성이 없어도 너무 없는 상황이었지만, 몸이 이 지경으로 변해버린 걸 보면 오히려 초자연적인 설명 말고는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없었다. 누가 이런 상황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나 지금 엘프냐." 선우가 자기 귀를 만지려다 말고 멈췄는데, 그 손끝이 닿기 직전에 뭔가 이상한 걸 눈치챈 표정이었다. 실제로 귀가 길쭉하게 뻗어 있는 게 멀리서도 보였다. "넌 뭔데, 그 갑각은." 그가 나를 향해 눈을 돌렸다. 나는 그 시선을 받으면서 얼굴이 화끈거렸는데, 이 몸이, 이 낯선 겉모습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 오히려 낯설지 않다는 이질감 때문이었다. 몸통은 확실히 여성의 곡선을 그리고 있었고, 팔다리는 은백색 갑각에 뒤덮여 있었으며, 얼굴은 아직 만져보지 못했지만 손끝의 촉감으로 미루어 사람의 것과는 다른 구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손가락 끝으로 뺨을 더듬어보니 매끈한 각질 같은 게 느껴졌는데, 그 감촉이 이상하게 익숙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 몸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그런데 이상하게도, 겁이 나기보다 뭔가 마음 한구석이 놓이는 감각이 있었다. 이게 정상인가. 평생 남자 몸에 갇혀 살면서 답답했던 걸 생각하면, 이 갑각 몸뚱이가 오히려 더 나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게 정상은 아닐 텐데. "몰라, 나도." 나는 짧게 대답하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 순간 등 뒤에서 뭔가 스르륵 펼쳐지는 느낌이 들었는데, 확인할 새도 없이 선우가 놀란 눈으로 내 등 뒤를 가리켰다. "뭐야, 너 등에 그거." 나는 고개를 꺾어보려 했지만 역시 시야가 닿지 않았다. 대신 손을 뒤로 뻗어 만져보니, 얇고 넓은 막 같은 게 접혀 있었다. 표면은 얇았지만 만졌을 때 단단한 뼈대 같은 게 안에서 느껴졌고, 손끝으로 문지르자 옅게 파르르 떨리는 게 마치 살아있는 감각기관처럼 반응했다. 날개, 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입 밖으로 꺼내기엔 너무 비현실적이라 삼켰다. 이걸 날개라고 부르는 순간부터 진짜 돌이킬 수 없어질 것 같았다. "여기 어딘지 알아?" 선우가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목소리에 떨림이 묻어 있었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려는 게 눈에 보였다. 거대한 나무들, 인광을 뿜는 이끼, 청록빛과 주황빛이 뒤섞인 하늘. 지구의 어떤 숲도 이런 모양새는 아니었다. 나무 둥치의 지름만 해도 사람 대여섯 명이 팔을 벌려도 감싸지 못할 정도였고, 그 표면에는 이상한 문양 같은 균열이 자연스럽게 새겨져 있었다. "모르지, 당연히." 나는 대답하면서도 발밑에 남은 흙 자국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커다란, 사람 발이 아닌 발자국들이 우리 주위를 여러 겹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하나의 발자국 크기만 해도 내 상체보다 클 것 같았는데, 그 깊이로 보아 발자국을 남긴 존재의 무게가 상당하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이거 발자국 맞지? 사람 건 아니고." 선우가 쭈그려 앉아 발자국 하나를 손끝으로 눌러보며 물었다. 손이 살짝 떨리는 게 보였다. "당연히 아니지, 이 크기를 봐." 나는 대답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발자국들이 향하는 방향이 일정하지 않았다. 마치 여러 개체가 이 자리를 지나갔거나, 혹은 한 개체가 여러 번 왔다 갔다 한 것처럼 보였다. 어느 쪽이든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그 순간 어디선가, 낮고 길게 끄는 울음소리가 숲 전체를 울렸다. 그 소리는 낮은 진동처럼 발밑까지 전해져왔고, 근처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뭔가가 놀란 듯 푸드덕 날아오르는 소리가 뒤이어 들렸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선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는데, 나 역시 온몸의 털, 아니 갑각 표면이 곤두서는 감각을 느꼈다. 이런 게 위험을 감지하는 감각이라는 건가. 몸이 먼저 반응하고 머리가 나중에 이해하는 순서라니, 이것도 이 몸의 새로운 기능인가 싶었다. 우리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그 정적 속에서 나는 이 숲이 결코 평범한 곳이 아니라는 확신만 굳혀갈 뿐이었다. 울음소리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조금의 간격을 두고 다시 한번, 이번엔 조금 더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와 뭔가 무거운 것이 땅을 딛는 진동이 연달아 이어졌는데, 그 방향이 점점 우리 쪽으로 좁혀오는 것 같았다. 선우가 벌떡 일어서며 내 팔을 붙잡았다. "야, 저거 우리 쪽으로 오는 거 아냐?" 그의 손끝이 떨리고 있었는데, 이번엔 확실히 착각이 아니었다. 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그저 숲의 어둠 속을 응시했고, 그 어둠 너머에서 뭔가 거대한 형체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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