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이서윤의 방을 정리하던 중, 서랍 안에서 낡은 상자를 발견했다.
나무 상자였다.
모서리가 닳아 있었고, 오래된 손길이 여러 번 스쳐 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오래 만져진 물건에는 반드시 사연이 있는 법이다.
열려는 순간, 나는 손을 멈췄다.
'주인의 물건에 함부로 손대면 안 된다.'
조 부인의 저택에서 배운 첫 번째 규칙이었다.
그 규칙을 어기면 손등에 매가 떨어졌고, 두 번 어기면 밥을 굶었다.
몸이 먼저 반응해 손을 뒤로 뺐다.
하지만 상자는 이미 살짝 열려 있었고, 안에 든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은으로 만든 작은 목걸이였다.
체인이 가늘었고, 펜던트 부분에 작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조 부인의 저택에서 빼앗겼던 것과 비슷한 모양이었다.
순간 심장이 세게 뛰었다.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설마 내 것과 같은 물건인가.'
손끝이 저절로 상자 쪽으로 움직였다.
자세히 보니 문양이 달랐다.
내가 알던 매화의 곧은 다섯 잎이 아니라, 둥글게 말린 넝쿨 무늬였다.
다행히도, 아니 어쩌면 아쉽게도, 내 것이 아니었다.
내 약혼 목걸이는 청림국의 매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 목걸이는 대선제국의 문양이었다.
'그렇다면 이건 이서윤의 것이겠지.'
이서윤이 대선제국 출신이라는 것을 이제야 새삼 깨달았다.
이 저택에서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얼마나 적은지도.
나는 조용히 상자를 원래대로 닫았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닫는 소리마저 크게 들릴까 봐, 뚜껑을 아주 천천히 눌렀다.
선재.
오랜만에 그 이름을 떠올렸다.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그 이름은 늘 가슴 어딘가에 박혀 있었다.
청림국이 무너지던 날, 그도 어딘가로 끌려갔을 것이다.
궁이 불타던 그 밤, 나는 마지막으로 그의 등을 보았다.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삼 년이 지나도록, 단 한 번도 소식을 듣지 못했다.
우리가 나눈 약혼 목걸이는 조 부인의 손에 넘어갔다.
그녀는 그것을 자랑하듯 목에 걸고 다녔다.
손님들 앞에서, 다른 하녀들 앞에서, 심지어 내 앞에서도.
'그 목걸이를 볼 때마다 나는 무너졌다.'
가슴 한복판이 칼로 그은 듯 갈라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도 표정을 바꿀 수 없었다.
표정을 바꾸는 순간, 그녀는 더 즐거워했으니까.
이제는 그 목걸이조차 곁에 없었다.
조 부인의 저택을 떠나던 날, 그녀는 그것마저 팔아버렸다고 웃으며 말했다.
남은 것은 기억뿐이었다.
선재가 마지막으로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 있어."
그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선명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는 지금까지 버텨왔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왔다.
수없이 되뇌었던 문장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 이유였을까.
어쩌면 그저 죽을 용기조차 없었던 건 아닐까.
손목의 흉터를 낼 때마다, 나는 죽고 싶은 것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감각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다.
칼끝이 살을 가를 때, 오히려 숨을 쉴 수 있었다.
그 구분이 스스로에게도 명확하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창밖에서 바람이 불었다.
커튼이 살짝 흔들리며 방 안으로 서늘한 공기가 들어왔다.
나는 정리하던 옷장을 마저 닫으며 생각을 밀어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이런 생각에 잠기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이서윤이 문가에 서 있는 것을 그제야 발견했다.
얼마나 오래 지켜보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상자를 본 걸까, 표정을 본 걸까.
"괜찮으냐."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 있었다.
"…예, 괜찮습니다."
나는 재빨리 표정을 정리했다.
오랜 습관이었다.
감정을 드러내면 늘 대가가 따랐다.
조 부인의 저택에서는 눈물 한 방울에도 매가 떨어졌다.
이서윤은 더 캐묻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와 책상 앞에 앉았다.
그녀는 상자가 있던 서랍 쪽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알고 있는 걸까.'
물어볼 수는 없었다.
"오늘 저녁에 손님이 온다. 준비를 도와야 한다."
"예, 주인님."
목소리에 특별한 긴장은 없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지시였다.
나는 서둘러 손님방 정리를 시작했다.
침구를 새로 갈고, 창문을 닦고, 향을 피울 화로를 준비했다.
일을 하는 동안만큼은 다른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손을 바쁘게 움직이는 것, 그것이 지난 삼 년간 내가 배운 또 다른 생존법이었다.
생각이 많아질수록 몸을 더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면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숨을 쉴 수 있었다.
저녁 준비를 마치고 잠시 정원에 나왔을 때, 나는 문득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이런 친절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
이서윤은 오늘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고, 손을 든 적도 없었다.
그 사실이 오히려 낯설었다.
조 부인은 늘 내게 말했다.
너는 쓸모없는 물건이라고, 누구도 너를 좋아할 리 없다고.
그 말들이 몸에 새겨진 흉터처럼 마음에도 새겨져 있었다.
흉터는 시간이 지나면 흐려지기도 한다는데, 이 말들은 오히려 더 짙어지는 것 같았다.
이서윤의 친절이 진심이라 해도,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좋은 주인을 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
그 생각이 뿌리처럼 깊게 박혀 있었다.
뽑아내려 해도 뽑히지 않는 뿌리였다.
그래도 나는 결심했다.
적어도 이곳에서는, 도망치지 않고 버텨보기로.
선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든, 다른 이유에서든, 그것은 지금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오늘을 넘기는 것, 그리고 내일을 맞이하는 것이었다.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은 지금의 나에게는 사치였다.
정원의 나무 사이로 저녁 바람이 지나갔다.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그 바람 속에서 나는 아주 오랜만에, 살아 있다는 감각을 다른 방식으로 느꼈다.
흉터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냥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러나 그 평온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정원 저편에서 마차 바퀴 소리가 들려왔다.
바퀴가 자갈길을 밟는 소리, 말발굽 소리, 마부의 낮은 외침.
저녁 무렵, 저택 대문 앞에 도착한 손님의 마차 문양을 본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조 부인의 가문 문양이었다.
붉은 바탕에 새겨진 매의 형상, 그것을 잊을 리 없었다.
수백 번, 수천 번 마주했던 문양이었다.
그 문양이 새겨진 마차가 지금, 이서윤의 저택 대문 앞에 멈춰 서고 있었다.
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왜 여기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도망칠 곳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