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제겐 과분한 주인님

3화

목욕을 마친 뒤, 박여옥은 대야에 새 물을 받아 왔다. 물에서는 낯선 풀 냄새가 났다. 쓴 듯하면서도 향긋한, 상처에 발리는 약초 냄새였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앉아 내 발목부터 살피기 시작했다. 손끝이 상처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조 부인의 하녀들이 상처를 다룰 때와는 완전히 다른 손길이었다. 그들의 손은 늘 서두르거나, 아니면 아예 상처를 무시했다. 박여옥의 손은 느렸고, 지나칠 정도로 신중했다. 허벅지의 오래된 화상 흉터를 지날 때, 그녀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등의 채찍 자국을 지날 때는 잠시 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그리고 손목의 흉터 위를 지날 때, 그녀의 손이 완전히 멈췄다. "언제부터 이랬느냐." 질문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목소리에 이미 답을 짐작하고 있는 듯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답을 들어도 달라질 것은 없었으니까. 과거를 말한다고 흉터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동정을 산다고 배가 부른 것도 아니었다. 박여옥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붕대를 조심스럽게 감아주며 낮게 말했다. "이 저택에선 아무도 널 그렇게 만들지 않을 거다." 붕대를 감는 손길이 유독 꼼꼼했다. 마치 그 말을 손으로도 증명하려는 것처럼. 그 말이 진심인지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믿음이 아니라 확인일 뿐이다.' 나는 그 문장을 마음에 새겼다. 믿음은 값이 비싼 물건이었다. 지금 내게는 그런 걸 살 여유가 없었다. 다음 날, 이서윤이 나를 서재로 불렀다. 서재 안은 책 냄새로 가득했다. 낡은 종이와 가죽 장정이 섞인, 무겁고 조용한 냄새였다. 조 부인의 저택에서는 책이라는 물건을 본 적이 없었다. 책장은 천장까지 닿아 있었고, 그 위로 먼지 하나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매일 저 높은 곳까지 닦아낸다는 뜻이었다. 이서윤은 책상 앞에 서 있었고, 그녀 앞에는 서류 뭉치가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정리된 방식만 봐도 이 여자가 얼마나 꼼꼼한 성격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오늘부터 너는 내 개인 시녀다." 이서윤이 말했다. 간결하고 명확한 통보였다. 돌려 말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 같았다. "내 방을 관리하고, 내 옷과 서류를 정리하고, 필요할 때 곁에 있으면 된다." "…예, 주인님." 그 호칭이 입에서 나오는 순간, 이상하게 목이 막혔다. 조 부인을 부를 때와 같은 단어인데, 전혀 다른 무게로 느껴졌다. 조 부인 앞에서 그 말을 할 때는 그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도구였다. 지금은 그 말이 이상하게 진짜처럼 들렸다. 이서윤의 표정이 잠깐 흔들렸다. 마치 그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다시 담담한 얼굴로 돌아갔다. "이 저택의 규칙을 알려주지. 하인들은 오전 다섯시에 일어나고, 식사는 주방에서 정해진 시간에 한다. 네 방은 내 방 옆에 따로 마련해두었다." "청소는 매일 하되, 서류에는 손대지 마라. 순서가 바뀌면 곤란해진다." "내가 없는 시간에는 서재를 정리해도 좋다. 다만 책의 순서는 절대 바꾸지 마라." 규칙이 하나씩 늘어날수록 나는 속으로 그것들을 정리했다. '서류. 책. 시간. 전부 그녀에게 중요한 것들이다.' 이 여자는 질서가 흐트러지는 걸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개인 시녀에게 독방을 준다.' 조 부인의 저택에서는 노예 열댓 명이 마구간 옆 창고에서 함께 잤다. 바닥은 늘 습했고, 겨울에는 서로의 체온에 의지해야 했다. 독방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치였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해라." 이서윤이 덧붙였다. 나는 그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그냥 고개를 숙였다. '또 확인일 뿐이다.' 나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되풀이해서 말했다. 서재를 나온 뒤, 나는 저택 구조를 익히기 시작했다. 복도마다 다른 색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그것이 방의 용도를 구분하는 표시라는 걸 곧 깨달았다. 붉은 문양은 침실, 청색 문양은 서재나 응접실, 무색의 문양은 하인들이 쓰는 방이었다. '표시 하나로 위계를 나눈다.' 효율적인 방식이었다. 동시에 그만큼 이 저택이 사람을 구획해서 다루는 곳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주방 쪽으로 향하던 길에 다른 하인들과 마주쳤다. 세 명이었고, 모두 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봤다. 그들의 시선이 내 여우 귀에 오래 머물렀다. 조 부인의 저택에서는 익숙했던 시선이었다. 다만 이곳에서는 그 시선에 경멸보다 궁금함이 더 많이 섞여 있었다. "저 사람이 아가씨가 새로 데려온 애야?" 누군가 낮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수인이라던데. 진짜 귀가 움직이네." 다른 목소리가 이어졌다. 호기심 어린 어조였지만, 그 안에 옅은 거리감도 섞여 있었다. 나는 못 들은 척 걸음을 옮겼다. '이곳에서도 결국 나는 구경거리다.' 다만 그 구경거리의 종류가 달라졌을 뿐이었다. 조 부인의 저택에서는 밟아도 되는 물건으로서의 구경거리였다. 이곳에서는 낯선 존재로서의 구경거리였다. 둘 다 편하지 않았지만, 후자가 조금은 덜 아팠다. 주방 관리인은 나이가 지긋한 남자였는데, 나를 보자 별다른 말없이 식사량이 적힌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손등에 굳은살이 두껍게 박여 있었고, 소매는 걷어 올려져 있었다. 오랜 시간 주방 일을 해온 사람의 손이었다. "이건 아가씨 몫이고, 이건 네 몫이다." 내 몫으로 표시된 칸에도 정상적인 식사량이 적혀 있었다. 밥, 국, 나물 두 가지, 생선 한 토막. 조 부인의 저택에서는 노예 몫으로 남은 음식 부스러기만 던져줬었다. 그마저도 며칠에 한 번 걸러지는 게 일상이었다. '이게 정상이라는 건가.' 낯선 정상성이 오히려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좋은 것에는 항상 대가가 따랐다. 지금까지의 경험이 가르쳐준 규칙이었다. 공짜로 주어지는 친절은 없었다. 언젠가 이 모든 것의 청구서가 날아올 것이다. 그 청구서가 무엇일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저녁이 되어 배정받은 방에 들어섰을 때, 나는 침대 위에 놓인 새 옷 한 벌을 발견했다. 소박하지만 깨끗한 시녀복이었다. 옷감을 만져보니 질이 나쁘지 않았다. 바느질도 촘촘했고, 단추도 하나같이 반듯하게 달려 있었다. 조 부인의 저택에서 입던 걸레짝 같은 옷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 옆에는 작은 쪽지가 붙어 있었다. '불편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해라. — 이서윤.' 짧은 글씨였다. 필체는 각이 잡혀 있었고, 흘림 없이 정확했다. 이 여자의 성격이 글씨에도 그대로 드러났다. 나는 그 쪽지를 한동안 들여다보았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이었다. 주인이 노예에게 이렇게까지 신경 쓸 이유가 있던가. 값을 치르고 산 물건에게 옷을 새로 지어주고, 방을 따로 내주고, 쪽지까지 남기는 일은 흔치 않았다. '뭔가를 원하는 거다.' 그렇지 않다면 이 모든 배려가 설명되지 않았다. 문제는 그게 무엇인지 아직 짐작이 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창밖으로 저녁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새들이 지붕 어딘가에서 낮게 울었고, 멀리서 하인들이 오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낯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을 때, 나는 문득 이 평온함이 오히려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 부인의 저택에서는 어떤 밤도 이렇게 조용하지 않았다. 늘 누군가의 발소리, 누군가의 비명, 누군가의 신음이 벽 너머로 새어 들어왔다. 조용한 밤 뒤에는 반드시 뭔가 일이 벌어졌다. 그것이 매질이든, 갑작스러운 매매든, 혹은 더 나쁜 것이든. 그 습관적인 경계심을 떨쳐내지 못한 채, 나는 뒤척이며 잠을 청했다. 몸은 오랜만에 느끼는 따뜻한 이불 속에서 완전히 풀어졌지만, 머릿속 한구석은 끝내 잠들지 않았다. 이서윤이라는 여자. 박여옥이라는 여자. 이 저택 전체가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나는 아직 그 답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답을 알기 전까지는, 어떤 온기도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