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말단 킬러의 육아일지

2화

"협상이라고 하셨는데요." 나는 최대한 사무적인 톤으로 되물었지만, 속으로는 이 새끼 방금 여덟 명 잃고 협상이라는 말을 잘도 뱉네 싶어 어이가 없었다. 계단참에는 부하들이 널브러져 있었는데, 하나는 팔이 꺾인 채로 신음도 못 내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아예 정신을 잃은 건지 눈알만 반쯤 뜬 채 꿈쩍도 안 했다. 양복을 입은 남자는 그 광경을 힐끗 보고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는데, 그 무심함이 오히려 이 자가 사람 목숨을 숫자로만 취급한다는 걸 확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저는 김가 조직의 김태오입니다." 놈이 이름을 밝혔고, 나는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왜 하필 오늘 이런 규모의 습격이 왔는지 대략 이해가 됐다. 인천항 인근 조직들 사이에서 김가 조직은 규모로만 따지면 한주혁 조직보다 세 배는 컸다. 최근 몇 년간 황금삼각지에서 넘어오는 화물의 통관 경로를 두고 베트남 계열 조직과 은밀히 손을 잡았다는 소문이 돌던 참이었다. 한주혁의 조직이 관리하던 인천항 3번 게이트는 그 항로의 최종 검문 지점이었으며, 그 게이트 하나가 통째로 김가 조직의 손에 넘어가면 화물의 흐름 자체가 바뀌게 된다는 게 업계에서 도는 얘기였다. 쉽게 말해서 이 게이트는 그냥 문짝이 아니라 돈줄이었고, 오늘 밤 여기 온 여덟 명은 그 돈줄을 열기 위한 첫 삽질에 불과했던 셈이다. 그 삽질이 나 하나한테 부서졌다는 게 놈들 입장에서는 좀 짜증날 노릇이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냥 당연한 결과였다. "조건은 간단합니다." 김태오가 서아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아이를 넘기시고, 회장님께 이 항구를 넘기라는 말을 전해주시죠. 그럼 여기 있는 두 사람은 오늘 밤 편하게 잘 수 있을 겁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웃음이 나왔다. 진짜로, 소리 내서 웃었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는 건지, 아니면 이 상황이 너무 우스워서 웃음이 나는 건지 나조차도 정확히는 몰랐다. 다만 확실한 건 지금 이 웃음이 저 새끼 눈에는 상당히 거슬리게 보였을 거라는 점이었다. "지금 그걸 협상이라고 부르시는 거예요?" 내가 그렇게 되묻자 김태오는 처음으로 표정을 살짝 굳혔는데, 아마 열일곱짜리 애가 저렇게 웃을 거라고는 예상 못 했던 모양이었다. "부하 여덟을 여기 뉘어놓고, 이제 와서 넘기라는 게 협상이면 세상 협상이 참 쉽겠네요." 나는 계단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기 누워 계신 분들한테 물어보고 오세요. 협상이라는 게 원래 이렇게 시작하는 거냐고." "버릇없는 애구나." 김태오가 혀를 찼고, 나는 그 말투에서 이 인간이 열일곱짜리를 그냥 애새끼로만 보고 있다는 걸 확신했다. 하-. 좋다, 그럼 그 착각을 좀 오래 즐기시라고 해야겠다. 사람이 자기가 뭘 상대하고 있는지 모를 때가 제일 재밌는 순간이라는 걸, 이 자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싫다고 하면요?" 내가 그렇게 되묻자 놈은 재킷 안쪽에서 권총을 꺼내며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미소가 참 여유로워 보였는데, 그 여유가 몇 초 뒤에 완전히 사라질 거라는 걸 놈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럼 오늘 밤 여기서 둘 다 못 나가는 거지." 그 순간, 나는 서아의 손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조금 더 주었다. "삼촌 뒤에 딱 붙어 있어." 작게 속삭이자 서아는 아무 말 없이 내 셔츠 자락을 꽉 움켜쥐었고, 나는 그 조그만 손아귀의 힘을 느끼면서 오늘 이 새끼를 그냥 보내주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서아의 손은 떨리고 있었지만, 그 떨림 속에서도 나를 놓지 않으려는 힘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그 손을 느끼는 순간 내 안에서 뭔가가 딸깍 소리를 내며 스위치를 켠 것 같았다. 협상이 결렬됐다. 정확히 말하면 협상이라는 게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그저 통보와 위협이 있었을 뿐이었다. 김태오라는 인간은 협상이라는 단어의 뜻조차 제대로 모르는 것 같았다. 협상이란 최소한 서로 잃을 게 있어야 성립하는 건데, 이 새끼는 처음부터 나와 서아만 잃을 게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으니까. 김태오가 총을 들어 올리는 순간, 나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후웅-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렸을 땐 이미 내 손이 놈의 손목을 잡고 있었고, 총구를 위로 꺾어 올리며 무릎으로 놈의 명치를 찍어 올린 게 그다음이었다. 컥- 숨이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놈의 몸이 뒤로 꺾였지만 나는 거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지금까지는 억눌러왔다. 창고에서 일하는 열일곱짜리 기계공, 그 위장을 지키기 위해 항상 힘의 육 할 정도만 쓰면서 살았는데, 오늘은 그 육 할을 지킬 이유가 사라졌다. 서아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이 순간엔 오히려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 애는 내가 뭘 하는 사람인지 언젠가는 알게 될 테니까. 김태오의 팔을 완전히 꺾어 부러뜨리며 나는 계단 아래로 놈을 내던졌고, 놈의 몸이 계단참 두 개를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콰르르릉 울리는 동안 나는 창고 밖으로 뛰어나가 지원 병력을 향해 곧장 몸을 던졌다. 캬아아악- 첫 번째 놈은 목을 잡고 벽에 그대로 박아버렸고, 두 번째 놈은 총을 뽑기도 전에 관절을 꺾어 무기를 놓치게 만들었다. 세 번째와 네 번째는 거의 동시에 달려들었는데, 나는 그 둘 사이로 파고들어 각각의 턱을 팔꿈치와 무릎으로 정확히 가격했다. 퍼억-, 퍽-. 연달아 터지는 타격음이 창고 앞마당을 울렸고, 나머지는 그 소리를 듣고도 도망치지 못한 채 하나씩 바닥에 쓰러져갔다. 누군가는 총을 쏘려 했지만 방아쇠를 당기기도 전에 손목이 꺾였고, 누군가는 도망치려 했지만 그러기엔 이미 다리 힘이 풀려 있었다. 그 이후로 정확히 몇 명이 더 왔는지는 세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건, 오 분쯤 지나고 나서 그 창고 앞마당에 서 있던 건 오직 나 하나였다는 것이었다. 바람이 불어와 흙먼지를 날렸고, 그 먼지 사이로 쓰러진 그림자들이 낙엽 떨어지듯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숨을 고르며 손등으로 이마를 닦던 순간, 내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격전 뒤에 오는 흥분 때문인지, 아니면 서아가 그 모든 걸 지켜봤다는 사실 때문인지 나로서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때 내 휴대폰이 울렸다. 박기범이었다. "도현아."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는데, 그 목소리 하나만으로 나는 오늘 밤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평소의 박기범이라면 이렇게 목소리가 갈라질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이렇게 무너진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올 이유는 딱 하나뿐이었다. "회장님이... 회장님이 당하셨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을 몇 초간 그냥 바라보고만 있었다. 서아의 손이 여전히 내 셔츠 자락을 움켜쥐고 있다는 것도, 창고 앞마당에 쓰러진 놈들이 아직 숨을 쉬고 있는지 아닌지도, 그 순간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한주혁이 죽었다. 오늘 밤, 이 시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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