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월급날이 다가올수록 나는 조금씩 숨통이 트이는 걸 느꼈다. 통장에 찍힌 숫자를 확인하고 밀린 월세를 갚았을 때, 집주인 아주머니가 예전처럼 눈을 흘기지 않고 그저 고개만 끄덕여줬을 때, 나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었다. 휴대폰 요금도 밀리지 않고 냈고, 편의점 도시락 대신 슈퍼에서 콩나물이랑 두부를 사다가 된장국을 끓여 먹을 수 있게 됐다. 별것 아닌 변화였지만, 그 별것 아닌 게 얼마나 큰 안도감을 주는지는 나 말고는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금요일 오후, 청소를 거의 마무리하고 서재로 들어갔다. 책장 먼지를 닦다가 맨 위 칸에 꽂힌 서류철들을 정리하려고 손을 뻗었는데, 잘 정리되지 않은 채 삐뚜름하게 꽂혀 있던 서류철 하나가 손끝에 걸려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급히 무릎을 굽혀 주워 담으려는데, 그 틈에서 사진 몇 장이 스르륵 흘러나와 바닥에 흩어졌다.
숨이 턱 막혔다.
전에 옷장 서랍을 정리하다 우연히 봤던 그 여자아이 사진이었다. 이번엔 훨씬 커 보였다.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초등학교 교복을 입고 어색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볼이 통통하고, 앞머리를 삐뚜름하게 자른 게 누가 봐도 서툰 가위질의 흔적이었다. 뒷면을 뒤집어보니 작은 글씨로 '지은, 초등학교 졸업식'이라고 적혀 있었다.
손끝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나는 사진을 서둘러 서류철 안으로 밀어넣고, 처음 꽂혀 있던 자리와 똑같은 각도로 다시 꽂아두었다. 심장이 갓 잡은 활어처럼 펄떡였다. 몇 번을 다시 꽂아도 각도가 맞지 않는 것 같아서, 손바닥으로 서류철 겉면을 문지르듯 매만지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지은. 열 살. 초등학교 졸업식.
윤지수에게 딸이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어디서도 들은 적이 없었다. 이 집에서 일한 지 벌써 몇 달인데, 그녀는 단 한 번도 딸에 대해 입을 연 적이 없었다. 사진 속 아이의 웃는 얼굴이 눈앞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책장 정리를 마무리하는 척했지만, 손이 자꾸 서류철이 있던 칸으로 향하는 걸 겨우 참았다.
***
그날 저녁, 평소보다 훨씬 일찍 퇴근한 윤지수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구두를 벗는 소리도, 가방을 내려놓는 소리도 평소와 달리 조심스러웠다. 나는 마지막으로 주방 정리를 하고 가방을 챙기던 중이었는데, 거실 쪽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서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그녀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휴대폰 화면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었다. 조명 아래서 그녀의 옆얼굴이 유난히 하얗게 보였다. 화면 속엔 방금 전 내가 서재에서 봤던 그 여자아이가, 이제는 조금 더 자란 얼굴로 담겨 있었다. 교복이 아니라 사복을 입고 있었고, 표정도 좀 더 어른스러웠다.
그녀는 손끝으로 화면을 몇 번이나 문질렀다. 사진을 넘기는 것도 아니고, 그저 화면 위를 쓸어내리는 듯한 동작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몰래 지켜보다가, 뭔가에 이끌리듯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저……"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휴대폰 화면을 꺼버렸다. 마치 누군가에게 들켜서는 안 될 일을 하다가 걸린 사람처럼, 손이 순간적으로 떨리는 게 보였다.
"왜요."
목소리가 평소보다 날카로웠다.
"아니에요. 저 이제 가볼게요."
나는 서둘러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뭔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괜히 죄를 지은 사람처럼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녀는 잠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뭔가 말할 듯 입술을 살짝 벌렸다. 그러나 그 입술은 곧 다시 다물렸다.
나는 가방을 어깨에 메고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신발을 신으려고 몸을 숙이는데, 등 뒤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늘 씨."
나는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돌아섰다.
"네?"
그녀는 몇 초간 침묵했다. 그 짧은 침묵이 방 안 공기를 무겁게 눌렀고, 나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벽시계의 초침 소리가 이상하게 크게 들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가, 또 흔들렸다.
"……아니에요. 조심해서 가요."
그녀는 결국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인사를 하고 현관을 나섰지만, 계단을 내려가는 내내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방금 그 침묵 속에 무엇이 담겨 있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나에게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삼킨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
버스를 기다리며 휴대폰을 확인하니 민호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요즘 얼굴 좋아 보이네, 밥 한번 같이 먹자.'
나는 답장을 하려다가 문득, 민호에게라면 오늘 본 사진 이야기를 해도 될까 싶었다.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멈췄다. 자판을 몇 글자 적었다가 지우고, 또 적었다가 지웠다. 결국 나는 '그래, 시간 맞춰보자'는 짧은 답장만 보내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이건 내가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되는 비밀 같았다. 윤지수의 삶에서 내가 우연히 엿본 조각일 뿐인데, 그걸 다른 사람에게 옮겨 말하는 순간 뭔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버스가 도착하고 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동안에도, 지은이라는 이름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씻고 침대에 누워서도 그 아이의 사진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지은이라는 이름, 열 살쯤의 웃는 얼굴, 그리고 소파에서 그 사진을 볼 때 윤지수가 지었던 표정. 슬픔인지 그리움인지 구분할 수 없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늘 표정을 감추는 사람이었는데, 그 순간만큼은 감추지 못한 무언가가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천장을 바라보며 몇 번이나 몸을 뒤척였다. 왜 그녀는 딸에 대해 한 번도 말하지 않았을까. 어디에 있는 아이일까. 함께 살지 않는 걸까, 아니면 아예 연락이 끊긴 걸까. 온갖 생각이 머릿속에서 뒤엉켰지만, 답은 어디에도 없었다.
***
다음 날 아침, 평소와 같이 8시에 도착했다. 그런데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집 안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공기부터 무거웠다.
윤지수는 거실 한가운데 서서 통화를 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우아하게 앉아서 전화를 받았을 텐데, 오늘은 서 있는 채로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있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고 다급했다.
"……알았어요. 지금 갈게요."
그녀가 전화를 끊고 나를 돌아봤다.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늘 냉정하고 정돈되어 있던 그 눈빛이, 오늘은 마치 갈 곳을 잃은 사람처럼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다.
"저, 오늘은……."
그녀가 말을 하다 멈췄다.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을 쥐었다 펴는 동작을 반복했다. 나는 그녀가 이렇게 당황한 모습을 처음 봐서, 저도 모르게 다가섰다.
"무슨 일 있으세요?"
그녀는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마치 처음으로 진짜 얼굴을 보여주는 것처럼 낮게 말했다.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딸한테 일이 생겼어요."
그 한마디가 방 안의 공기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녀에게 딸이 있다는 걸 이제야, 그녀 스스로의 입으로 처음 듣는 순간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몰랐던 것처럼 행동해야 하는데, 이미 사진을 본 나로서는 그 말이 예상보다 훨씬 더 무겁게 다가왔다.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 손을 보며,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건지 감히 물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