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딸랑, 하는 소리도 없이 눈이 떠졌다. 천장에 매달린 조명이 낯설었다. 은은한 간접등이 방 전체를 감싸고 있었는데, 그 부드러운 빛조차 낯설어서 나는 잠시 내가 어디 있는지조차 가늠하지 못했다. 손끝으로 이불을 더듬어보니 감촉이 지나치게 부드러워,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런 이불을 덮어본 적이 있던가. 우리 집 이불은 십 년 넘게 쓴 낡은 극세사 담요라 보들거리기는커녕 뭉치고 눌려서 딱딱했는데, 이건 그야말로 구름 같았다.
나는 몸을 일으키다가 관자놀이를 뒤흔드는 통증에 다시 베개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머릿속에서 누군가 북을 치는 것 같았다. 어젯밤 마신 술의 양이 얼마였는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아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소주였는지 와인이었는지, 아니면 둘 다였는지조차 헷갈렸다.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시트가 아직 온기를 품고 있는 걸 손등으로 느끼며, 나는 그제야 여기가 내 방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강남의 어느 바, 서은이라는 여자가 먼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웃음이 많고 목소리가 큰 여자였다. 술을 사주겠다며 옆자리를 권했고, 나는 그날 밤 외로움에 잡아먹혀 순순히 따라 앉았다. 그리고 그 옆에 앉아 있던 여자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눈빛이 기억났다. 말은 거의 없었지만, 시선만으로도 사람을 얼어붙게 만드는 그런 눈빛이었다. 겨울바람처럼 시리면서도 묵직한 향이 났다. 향수인지 체취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자연스럽게 몸에서 풍겨 나오는 그 냄새가, 이상하게도 자꾸 코끝에 맴돌았다.
술기운 때문인지 외로움 때문인지, 그날 나는 이름조차 제대로 묻지 않고 그녀를 따라나섰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택시 안이었고, 창밖으로 지나가는 불빛들이 흐릿하게 번져 보였다. 그 뒤로는 기억이 뚝뚝 끊겨서 이어지지 않았다.
침대 헤드보드에 등을 기대고 앉아 방 안을 둘러보니 옷장 하나가 방 세 개짜리 우리 집 전체보다 커 보였고, 그 사실이 나를 더 작게 만들었다. 벽에 걸린 그림 한 점은 액자만으로도 내 월세 몇 달치는 될 것 같았다.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어지러운 건지, 이 방 자체가 주는 위압감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옷을 챙겨 입고 조용히 현관을 나설 때까지 아무도 나를 붙잡지 않았다. 신발을 신는 순간까지도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집 안은 조용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서운했던 것 같기도 하다. 문을 열고 나서면서 나는 뒤를 한 번 돌아봤는데, 그 넓은 거실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왜인지 가슴 한구석을 시큰거리게 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벽에 붙은 거울에 내 얼굴이 비쳤다. 푸석하고 눈 밑이 퀭했으며, 어제와 오늘 사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뒤통수를 때렸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휴대폰을 꺼내 통장 잔액을 확인했다. 이십만 원도 남지 않았다. 이번 달 월세는 벌써 열흘이 지났는데도 못 냈고, 휴대폰 요금 독촉 문자가 매일 아침 알람처럼 울렸다. 오늘도 어김없이 문자 한 통이 와 있었다. '요금 미납으로 서비스가 일부 제한될 수 있습니다.' 나는 화면을 끄고 한숨을 삼켰다.
1층에 도착해 로비를 걸어 나가는데, 대리석 바닥에 내 낡은 운동화 밑창이 닿는 소리만 유난히 크게 울렸다. 경비원이 나를 힐끗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시선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지하철에서 내려 골목을 걷는 동안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반지하 계단을 내려가자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 냄새는 아무리 익숙해져도 매번 새롭게 속을 뒤집었다. 문 앞에 붙은 노란 종이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3차 통보. 미납 시 강제 퇴거 조치.' 손끝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나는 그 종이를 떼어내 손에 쥐고 한참을 문 앞에 서 있었다.
죽을 것 같아.
그 말이 입 밖으로 새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삼켰다.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열쇠를 찾는 손이 계속 허둥댔다.
"하늘 씨, 또 밤새 안 들어왔어요?"
계단 위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옆집에 사는 준호, 다들 민호라고 부르는 그가 쓰레기봉투를 들고 서 있었다. 그는 나를 몇 년째 봐온 사람답게 걱정과 잔소리가 반쪽씩 섞인 표정을 지었다. 손에 든 쓰레기봉투에서 나는 냄새가 은근히 코를 찔렀지만, 그보다 그의 눈빛이 더 신경 쓰였다.
"그냥…… 친구 만나서요." 나는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거짓말이 입에 붙는 게 익숙해서 스스로도 놀랐다.
"밥은 먹었어요?" 그가 물었을 때 나는 대답 대신 웃었는데, 그 웃음이 얼마나 텅 비어 보였을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민호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더 캐묻지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 쓰레기봉투가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골목에 울렸다.
실직한 지 석 달째, 이력서는 백 통 넘게 넣었지만 면접까지 간 곳은 세 곳뿐이었고, 그마저도 다 떨어졌다. 마지막으로 일했던 편의점은 사장이 야반도주하듯 문을 닫으며 두 달치 급여를 떼먹었다. 그날 편의점 문에 붙어 있던 '임시휴업'이라는 종이를 보며,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던 기억이 있다. 사장님한테 전화를 걸어도 없는 번호라는 안내 음성만 반복해서 흘러나왔다. 그날 이후로 나는 사람을 믿는 일에 서툴러졌다.
방에 들어와 노트북을 켰다. 화면이 뜨는 몇 초 사이에도 손끝이 차가워지는 게 느껴졌다. 방바닥에 앉아 벽에 등을 기대고, 노트북을 무릎 위에 얹은 채로 구직 사이트에 접속해 지역을 좁히고 조건 없이 아무거나 눌러보았다. 이미 몇 번이나 눌러본 공고들이 대부분이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 물류센터 상하차, 콜센터 상담원. 어느 것 하나 내 상황을 나아지게 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가사관리사 구인, 강남구, 숙식 협의 가능, 즉시 채용'이라는 짧은 공고 하나가 눈에 걸렸다. 경력 무관, 성실성 우선. 월급은 지금 내 상황을 생각하면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높았다. 나는 몇 번이나 그 숫자를 다시 확인했다. 혹시 잘못 읽은 게 아닐까 싶어서.
연락처를 클릭하니 낯익은 주소가 떴다. 강남 그 동네, 어젯밤 내가 몰래 빠져나온 그 아파트와 같은 단지였다.
심장이 갓 잡은 활어처럼 펄떡였다. 설마. 나는 화면을 다시 확인했다. 우연일 거라고 되뇌면서도 손이 떨려 마우스를 제대로 쥘 수 없었다. 주소를 몇 번이나 확대해서 읽어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같은 단지, 같은 동. 심지어 동 번호까지 눈에 익었다.
이게 정말 우연일까.
나는 화면 속 공고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지난밤 그 시린 향과 침묵을 다시 떠올렸다. 손끝이 마우스 위에서 멈춘 채 움직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