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정략혼 상대는 용의 기사였다

4화

혼례를 마친 지 열흘이 지났지만, 태현과 서연 사이에는 대화가 거의 없었다. 왕궁의 예법에 따라 같은 처소를 쓰긴 했으나, 그것은 그저 이름뿐인 동거였다. 태현은 대부분의 시간을 밖에서 보냈고, 방 안에 그의 물건이 놓여 있다는 사실 외에는 그가 이곳에 산다는 증거를 찾기 힘들었다. 서연은 그의 부재를 굳이 캐묻지 않았다. 캐묻는다고 해서 돌아올 대답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밤이면 서연은 넓은 침상의 절반을 차지한 채 나머지 절반을 바라보았다. 그 자리는 항상 비어 있었다. 처음 며칠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이런 것도 결혼이라고 부르는구나.' 서연은 생각했다. 씁쓸한 웃음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궁 안을 떠도는 소문은 서연의 귀에 계속 들어왔다. 시녀들은 서연이 왕자비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정작 그 앞에서는 입을 다물었다가 그녀가 지나가고 나면 다시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왕자님이 또 용암도에 가셨대요." 세탁실 앞에서 시녀들이 소곤거렸다. "이번엔 사흘째 안 돌아오신다던데." "거기서 뭘 하시는지 아무도 모른다잖아요. 그저... 벌을 받는 곳이라고만." "벌이라니, 무슨 죄를 지으셨길래?" "그걸 누가 알겠어요. 왕족의 일인데." 서연은 그 대화를 지나치며 발걸음을 늦추었다. 굳이 멈춰 서서 듣는 척은 하지 않았지만, 귀는 저절로 그쪽으로 기울어졌다. '벌이라니.' 이상한 표현이었다. 죄인이나 노예에게 쓰는 말을, 어째서 왕자에게 붙이는 것일까. 궁의 복도는 늘 조용했지만, 그날은 유독 그 침묵이 무겁게 느껴졌다. 서연은 처소로 돌아가는 내내 그 단어를 곱씹었다. 벌. 벌. 마치 입 안에서 굴리는 돌멩이 같았다. *** 그날 밤, 서연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유 없이 가슴이 답답했다. 마치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예감이 자꾸만 마음을 두드렸다. 창밖에서 바람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고, 서연은 몇 번이나 몸을 뒤척이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밖으로 붉은 빛이 스쳐 지나갔다. 서연은 숨을 멈추고 창문으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처음엔 눈의 착각이라 여겼다. 하지만 붉은 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커지며 하늘 한쪽을 물들이고 있었다. 멀리, 궁궐 뒤편 산등성이 너머로 거대한 그림자가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 크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지붕 위로 드리운 그림자만으로도 마당 전체를 덮을 것 같았다. 용이었다. '저게 적염인가.' 서연은 그 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붉은 비늘이 달빛에 번쩍이며 산등성이 너머로 사라졌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서연은 등줄기에 서늘한 기운이 스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한 공포가 아니었다. 오히려 뭔가에 압도당한 듯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서연은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붉은 빛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창밖의 어둠을 응시하며 움직이지 않았다. 궁녀들의 소곤거림 속에 있던 그 '벌'이라는 말과, 지금 눈앞에서 사라진 거대한 용의 그림자가 자꾸만 겹쳐졌다. '그이가 저것과 관련이 있는 걸까.' 그 생각이 들자 서연은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서연은 결심을 굳혔다. 더는 소문에만 기대어 남편을 짐작하고 있을 수 없었다. 밥상을 앞에 두고도 숟가락을 들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시녀가 걱정스레 안색을 살폈지만, 서연은 괜찮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 서연은 왕비 태선을 찾아갔다. 태선의 처소는 궁 안에서도 유난히 조용한 곳이었다. 정원에는 이름 모를 붉은 꽃들이 가득 피어 있었고, 그 사이로 시녀들이 조심스럽게 오가고 있었다. 서연은 그 정원을 지나며 잠시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른 뒤, 문 앞에서 예를 갖췄다. "태현 왕자님을 뵈러 용암도에 가고 싶습니다." 서연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태선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부드럽게 웃었다. 그 웃음에는 단순한 놀라움 이상의 것이 담겨 있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예상하고 있던 질문을 받은 사람의 표정 같았다. "그 아이를 직접 보러 가겠다는 것이냐?" "소문만으로는 남편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소문이라." 태선은 낮게 되뇌었다. "그래, 소문이라는 것이 늘 그렇지. 진실의 절반은 가리고, 나머지 절반은 부풀리기 마련이니까." 서연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왕비님께서는... 용암도가 어떤 곳인지 아십니까?" 태선의 얼굴에서 웃음이 잠시 사라졌다. "안다고 할 수도, 모른다고 할 수도 있겠구나." 그 대답은 오히려 서연의 궁금증을 더 부추겼지만, 태선은 더 이상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대신 서연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뭔가 기대와 걱정이 섞여 있었다. "쉽지 않은 길이 될 것이다. 그 아이는... 다가오는 사람을 밀어내는 데 익숙하니까." "그래도 가겠습니다." 태선은 잠시 침묵하다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태산에게 배를 준비하라 이르겠다." "감사합니다, 왕비님." "감사할 일인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 태선은 낮게 웃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향한 방향은 정확히 용암도가 있는 산등성이 쪽이었다. *** 서연이 방을 나서기 전, 태선이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서연아." "네." "그 아이가 밀어내더라도, 물러서지 말아라. 그것이 태현이 사람을 시험하는 방식이니까." 서연은 그 말을 마음에 새겼다. 왕비의 말투에는 단순한 조언 이상의 무게가 있었다—마치 자신도 그런 시험을 겪어본 사람의 말투였다. "왕비님께서도... 그런 시험을 겪으셨습니까?" 태선은 그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다만 오래된 기억을 더듬는 듯한 눈빛으로 잠시 허공을 응시했을 뿐이었다. 서연은 더 묻지 않았다. 대답을 강요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을 나선 서연의 발걸음은 전보다 빨라져 있었다. 처음으로, 이 혼인이 단지 가문을 위한 의무가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나선 일이 되어 있었다. 그 사실이 낯설면서도, 동시에 이상하게 마음을 가볍게 만들었다. 궁의 복도를 지나며 서연은 다시 그 붉은 그림자를 떠올렸다. 하늘을 가로지르던 거대한 용의 몸짓. 그리고 그 아래 어딘가에 있을, 자신이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하는 남편의 모습. 배는 사흘 뒤에 준비될 것이라 했다. 그 사흘 동안 서연은 몇 번이나 창밖을 내다보며 붉은 빛이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렸지만, 하늘은 조용하기만 했다. 하지만 서연은 아직 알지 못했다. 용암도로 가는 배 위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단순한 재회가 아니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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