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정략혼 상대는 용의 기사였다

3화

왕궁의 정문은 서연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웅장했다. 붉은 기와와 황금빛 장식이 겨울의 눈빛에 익숙한 그녀의 눈을 어지럽혔다. 북두 가문에서 나고 자란 서연에게 궁궐이란 그림 속에나 존재하는 것이었다. 마차에서 내리는 순간 눈에 들어온 것은 처마 끝마다 매달린 풍경들이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낮게 울리는 소리가 마치 경고처럼 들렸다. '이곳이 앞으로 내가 살아갈 곳이구나.' 서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혼례 준비는 예상보다 조용하게 진행되었다. 요란한 잔치 소리도, 축하객들의 발걸음도 없었다. 서연은 궁 안의 별채에 머물며 왕실 예법을 배우는 나날을 보냈다. 절을 하는 각도, 수저를 드는 순서, 웃음소리의 크기까지도 정해진 규칙이 있었다. "고개는 딱 이 정도만 숙이시면 됩니다." 예법 선생이라는 늙은 상궁이 손으로 각도를 그려 보이며 말했다. "너무 낮추면 비굴해 보이고, 너무 세우면 방자해 보입니다." 서연은 그 미묘한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채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다 세웠다 반복했다. 왕궁이란 곳은 숨 쉬는 것 하나에도 격식을 요구하는 모양이었다. 태현과의 정식 대면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혼례 상대의 얼굴조차 모르고 예식 날짜만 다가온다는 사실이 서연에게는 낯설게 느껴졌다. "왕자님은 요즘 궁에 잘 안 계십니다." 시녀 하나가 조심스레 알려주었다. "용암도에 다녀오시는 일이 많아서요." "용암도요?" 서연이 물었다. 시녀는 순간 말을 삼켰다.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는 손끝이 살짝 떨렸다. "그,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그 섬이 어디에 있는지도요?" "위치는... 알고 있습니다만." 시녀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곳에서 왕자님이 무엇을 하시는지는, 저희 같은 사람이 함부로 입에 올릴 일이 아니라서요." 서연은 그 반응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모른다기보다는, 말하기를 두려워하는 낌새였다. 마치 그 이름 자체가 궁 안에서 금기어처럼 다뤄지는 것 같았다. '뭐가 있는 걸까.' 서연은 생각했다. 답을 얻지 못한 물음은 마음속에 작은 돌처럼 가라앉았다. *** 혼례식 사흘 전, 서연은 처음으로 태현을 보았다. 왕궁의 정원에서였다. 그날은 유난히 바람이 매서웠고, 정원의 나무들은 잎을 다 떨군 채 앙상한 가지만 드러내고 있었다. 그 황량한 풍경 속에 태현이 시종 하나 없이 홀로 연못가에 앉아 있었다. 은발이 겨울 햇살 아래 이상하리만치 희게 빛났다. 마치 눈이 그의 머리 위에만 내린 것 같은 색이었다. '저 사람이구나.' 서연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소문 속의 방탕아라기엔 표정이 너무나 조용했다. 방탕아라면 어딘가 나사가 풀린 웃음이라도 짓고 있어야 할 텐데, 그의 얼굴에는 웃음기라곤 조금도 없었다. 태현은 물속에 손을 담근 채 무언가를 오래 바라보고 있었다. 연못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었다. 서연은 그 순간 그의 눈빛에서 낯선 것을 읽었다—공허함이었다. 물결이 흔들릴 때마다 그의 얼굴도 함께 일그러졌다가 다시 맺혔다. 그는 그 흔들림을 몇 번이고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그 안에서 다른 누군가를 찾으려는 것처럼. 서연이 다가가려는 순간, 태현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것은 순식간이었지만, 서연은 그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굳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거기 누구지." 목소리는 낮았고, 경계심이 짙게 섞여 있었다. "북두 서연입니다." 서연이 담담히 답했다. 태현의 눈이 잠시 커졌다가,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그 짧은 순간의 동요를 서연은 분명히 보았다. "아, 그 혼인 상대." 흥미 없다는 듯한 말투였다. 마치 물건을 가리키듯 무심한 어조였다. "뵙게 되어 기쁩니다." 서연이 예법대로 예를 갖춰 말했다. "기쁘긴." 태현이 픽 웃었다. 그 웃음에는 비웃음도 자조도 아닌, 그저 지친 기색만 묻어 있었다. "곧 후회할 텐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서연이 물었지만. 태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 말 없이 정원을 떠나 버렸다. 서연은 그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젖은 손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그가 걸어간 자리마다 작은 흔적을 남겼다. '대체 무슨 뜻이었을까.' 서연은 그 짧은 문장을 곱씹으며 정원에 오래 서 있었다. 곧 후회한다는 말은, 협박인지 경고인지, 혹은 그저 습관적인 냉소인지조차 구분이 되지 않았다. *** 그날 밤, 서연은 우연히 왕비 태선의 처소를 지나다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엿들으려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발걸음을 옮기기엔 목소리가 너무 또렷했다. 복도의 등불이 낮게 흔들렸다. 서연은 걸음을 멈추고 벽에 몸을 붙였다. 자리를 피하기엔 이미 늦은 순간이었다. "태현이는 아직도 하린을 그리워하는구나." 태선의 목소리였다. 그 안에는 안타까움과 피로가 뒤섞여 있었다. "그 애가 그 애 어머니를 닮았으니까." 태강의 음성이 낮게 이어졌다. 씁쓸함이 짙게 배어 있었다. "볼 때마다 견디기가 힘들어." "그래서 용암도로 보낸 것이냐?" 대답이 없었다. 긴 침묵이 대신했다. 그 침묵이 오히려 어떤 말보다도 확실한 답이었다. "이제 곧 혼례를 치를 아이다." 태선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아이한테도 이 사실을 알려야 하지 않겠느냐?" "알려서 뭐가 달라지겠소." 태강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그저 하루라도 더 조용히 살게 해 주는 게 나을지도." 서연은 그 자리에서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심장이 이상하게 빨리 뛰었다. 방탕하고 위험하다던 그 왕자가, 실은 아버지에게조차 밀려난 채 홀로 슬픔을 견디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소문과 다르다.' 서연은 생각했다. '전혀 다르다.' 그가 연못을 그토록 오래 들여다보고 있던 이유도, 그 눈빛 속의 공허함도, 이제야 조금은 이해가 되는 듯했다. 그는 물속에서 자신의 얼굴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얼굴을 찾고 있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이 깨달음은 그녀에게 새로운 무게로 다가왔다. 단순한 정략혼인이라 여겼던 이 임무가, 실은 훨씬 위태롭고 복잡한 감정의 영역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라는 것을. 서연은 어둠 속에서 오래도록 그 사실을 곱씹었다. 복도의 등불은 여전히 낮게 흔들렸고, 태강과 태선의 대화는 그 뒤로도 한참 이어졌지만 서연의 귀에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이름만이 맴돌았다. 하린. 그리고 그 이름 뒤에 숨겨진, 아직 알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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