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정략혼 상대는 용의 기사였다

1화

용암도는 이름 그대로 검은 화산암으로 뒤덮인 섬이었다. 파도가 부딪히는 절벽 아래로는 늘 유황 냄새가 떠돌았고, 하늘은 잿빛 구름에 가려 해가 드는 날이 드물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재 냄새가 코를 찔렀고, 그 냄새에 익숙해지는 데만 석 달이 걸렸다. 태현은 그 섬의 유일한 거처인 낡은 탑 꼭대기에 앉아 사슬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발목에 감긴 그것은 은으로 만든 것이었으나, 붉은 문양이 새겨져 있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용의 힘을 억누르는 봉인구였다. 손끝으로 문양을 따라 그리던 태현은 문득 손을 멈췄다. 문양이 미세하게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착각인지 실제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다섯 달을 겪었는데도 여전히 헷갈렸다. '또 하루가 갔군.' 태현은 손끝으로 사슬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했다.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이미 다섯 달째, 매일 똑같은 풍경을 보고 있었으니까. 해가 뜨는 방향도, 파도가 부서지는 자리도, 구름의 색조까지도 매일 같았다. 탑 아래에서 날개를 접은 채 웅크리고 있는 적염이 낮게 울었다. 붉은 비늘이 어둠 속에서도 은은하게 빛났다. 몸통 하나가 성벽만큼 거대했지만, 지금은 그저 주인 곁에 얼굴을 묻은 커다란 짐승일 뿐이었다. "너도 답답하지." 태현이 중얼거렸다. 적염이 대답 대신 콧김을 내뿜었다. 뜨거운 김이 탑 벽을 데웠다. 벽에 붙은 이끼가 그 열기에 슬쩍 오그라들었다. 태현은 그 모습을 보며 옅게 웃었다. 웃음이라기엔 너무 짧아서 남들이 봤다면 눈을 의심했을 정도였다. 아버지 태강이 이곳에 그를 보낸 이유는 간단했다. 왕궁에서 벌인 소란—정확히는 연회 도중 귀족 자제의 얼굴에 술잔을 던진 사건—때문이었다. 그날 밤 연회장에서 있었던 일을 태현은 또렷이 기억했다. 귀족 자제가 술기운에 어머니를 두고 조롱하는 말을 뱉었고, 태현은 별다른 말없이 잔을 들어 그자의 얼굴에 던졌다.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사람들의 비명이 뒤섞였다. 그리고 다음 날, 태현은 이 섬으로 보내졌다. 하지만 태현은 알고 있었다. 그것이 진짜 이유가 아니라는 것을. 진짜 이유는 그가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이었다. 눈매도, 입가의 곡선도, 심지어 화가 났을 때 턱을 살짝 치켜드는 버릇까지도. 그리고 그 사실이 아버지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하린.' 태현은 어머니의 이름을 속으로 불러 보았다. 얼굴은 이제 흐릿했다. 다만 웃음소리만은 또렷이 남아 있었는데, 그것마저 언젠가는 사라질 것 같아서 무서웠다.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그를 안아 주었던 날의 온기도, 손끝의 감촉도 이제는 기억 속 어딘가에서 흐릿하게 흩어지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에도 겉으로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그야말로 별명이 아깝지 않은 성격이었다—사람들은 그를 두고 '웃음도 눈물도 모르는 용의 아들'이라 부르곤 했으니까. 적염이 고개를 들어 태현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눈동자 안에 탑 위의 작은 인간이 비쳤다. 태현은 그 눈을 마주 보며 손을 뻗어 적염의 콧등을 쓸어 주었다. "곧 다섯 달이 끝나면, 뭐가 바뀌긴 할까." 태현이 물었으나 대답을 바라는 물음은 아니었다. 적염은 그저 눈을 한 번 깜박였을 뿐이었다. *** 같은 시각, 설한성에서는 정반대의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북두 서연은 마당 한복판에 서서 짐마차에 실리는 자신의 물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검, 갑옷, 몇 벌의 옷가지. 그것이 전부였다. "이게 다야?" 곽태산이 짐을 확인하며 물었다. 거대한 체구의 기사였고, 목소리는 산이 무너지는 소리처럼 우렁찼다. "검 하나면 충분해요." 서연이 짧게 답했다. 곽태산이 껄껄 웃었다. "남부 놈들이 보면 놀라겠군. 신부가 예복보다 검을 먼저 챙겼다고." "예복은 이미 마차 안에 있어요." 서연이 덧붙였다. "그것도 세 벌이나." "그럼 검은 왜 챙겼나?" "입고 있는 옷이 찢어질 상황도 있으니까요." 곽태산은 그 말을 듣고 다시 껄껄 웃었다. 신부라는 사람이 혼례복이 찢어질 상황을 상상하고 있다는 게 우스웠던 모양이었다. 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들어 설한성의 성벽을 바라보았다. 하얀 눈이 성벽 위에 두껍게 쌓여 있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 눈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눈 냄새,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 겨울마다 성벽 위로 부는 칼바람까지—전부 몸에 새겨진 것들이었다. '남부라니.' 서연은 속으로 되뇌었다. 용을 타는 자들의 나라, 태룡가. 그곳으로 시집을 간다는 것이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남부는 사시사철 더운 곳이라 들었다. 눈이라는 것 자체를 본 적 없는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그런 곳에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갈지, 서연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오빠 진혁이 마당으로 나왔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짐마차를 노려보고 있었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정말 가야 하나." 진혁이 낮게 물었다. "아버지가 결정하신 일이에요." 서연이 답했다. "그 왕자란 놈이 어떤 놈인지도 모르면서." 서연은 어깨를 슬쩍 들썩였다. "만나 보면 알겠죠." 진혁의 얼굴이 더 어두워졌다. "소문이 좋지 않아. 술과 여자와 싸움질밖에 모른다더군. 심지어 용을 타고 하늘에서 사람을 위협했다는 이야기도 있어." 서연은 눈을 깜박였다.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어떤 위협이요?" 서연이 물었다. "자세한 건 몰라. 다만 그놈 손에 다친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고 하더군." 진혁이 목소리를 낮췄다. "심지어 지금은 어느 섬에 갇혀 있다는 소문도 있어. 죄를 지어서 쫓겨났다는 거지." "섬에요?" "용암도라던가. 나도 정확힌 몰라." 진혁이 짐마차의 바퀴를 발로 툭 찼다. "그런 사람에게 널 보내겠다는 거야." 서연은 잠시 침묵했다. 짐마차의 바퀴가 이미 눈길 위에서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마부가 말고삐를 손에 쥔 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오빠." 서연이 입을 열었다. "저도 좋은 신랑감을 만나서 시집가고 싶었어요. 하지만 북두 가문의 딸로 태어난 이상, 이런 날이 올 거란 건 각오하고 있었어요." "각오했다고 해서 다 받아들여야 하는 건 아니야."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어요." 서연이 조용히 말했다. "지금이 그때고요." "어떤 사람이든." 서연이 마침내 다시 입을 열었다. "북두 가문을 위한 일이라면 해야죠." 진혁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짐마차에 오르는 동생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서연의 등은 곧고 단단했다. 그 모습이 오히려 더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리고 이 결심이 앞으로 그녀가 겪을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서연은 아직 그것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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