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박쥐야, 넌 괴물이 아니지?

1화

통장 잔고가 칠만 이천 원 남았을 때, 나는 처음으로 이력서에 거짓말을 적었다. 경력 사항에 없는 자격증을 두 줄 늘렸고, 대학교 중퇴라는 사실은 그냥 빼버렸다. 서른한 살, 무직, 부양가족 없음. 이력서를 채우는 칸마다 내 인생이 얼마나 헐거운지 새삼 확인하는 기분이었다. 스물여섯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나는 혼자였고, 혼자인 채로 오 년째 밥벌이를 전전하고 있었다. 방구석에 세워둔 기타는 먼지가 쌓여 있었다. 한때는 그걸로 뭔가 될 줄 알았다. 클럽 무대에 서고, 앨범을 내고, 그런 꿈. 하지만 스물아홉이 되던 해 겨울, 나는 기타 케이스를 닫으면서 조용히 그 꿈도 함께 닫았다. 손끝의 굳은살은 예전 같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엔 편의점 계산대의 바코드 리더기 소리와, 물류창고 지게차의 엔진 소리와, 콜센터 헤드셋의 잡음이 새겨졌다. 이력서는 스무 곳 넘게 넣었다. 서류에서 떨어지거나, 면접까지 가서 떨어지거나. 나는 이제 거절 문자를 받아도 놀라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게 서른한 살의 나였다. 구인 사이트를 넘기다가 그 공고를 본 건 새벽 두 시였다. 잠이 안 와서 스마트폰 화면만 들여다보던 시간. 방은 어두웠고, 화면 불빛만이 얼굴을 비췄다. 『청림시큐리티 — 야간 경비원 모집. 경력무관. 급여 상위 15퍼센트 보장. 24시간 출입통제구역 근무. 비밀유지 서약 필수.』 급여 조건에 눈이 갔다. 동종업계 평균보다 거의 두 배였다. 조건이 좋을수록 뭔가 있다는 걸 나도 모르지 않았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을, 나는 서른한 해를 살면서 몸으로 배웠으니까. 하지만 통장 잔고가 사람을 얼마나 순진하게 만드는지, 그날 나는 확실히 배웠다. 칠만 이천 원. 다음 달 월세는 사십만 원. 그 차액을 메울 방법이 내겐 없었다. 나는 이력서를 넣었다. 삼십 분도 안 돼서 문자가 왔다. 『이현우 님, 서류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내일 오전 열 시, 본사 방문 바랍니다.』 너무 빨랐다. 그게 첫 번째 이상한 점이었다. 보통 채용 절차라면 최소한 며칠은 걸려야 하는 것 아닌가. 서류를 검토하고, 회의를 하고, 순번을 매기고. 하지만 나는 그 의문을 오래 붙들지 않았다. 붙들 여유가 없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면접 장소는 도심 외곽의 회색 건물이었다. 간판도 없었고, 로비에는 안내데스크 직원 한 명뿐이었다. 그 직원조차 내가 다가가자 이름만 확인하고는 곧바로 엘리베이터를 가리켰다. 질문도, 안내도, 그 흔한 사원증 발급 절차도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나는 복도에 걸린 액자 하나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회사 로고도, 표어도, 흔한 채용 안내 포스터 한 장도 없었다. 그저 하얀 벽과 하얀 문뿐이었다. 병원 같기도 했고, 어딘가의 실험실 같기도 했다. 공기마저 서늘했다. 에어컨 때문이라기엔 온도가 너무 일정했다. 면접관은 사십 대로 보이는 여자였다. 안경을 쓰고 있었고, 책상 위에는 서류 한 장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명함도, 컴퓨터도, 심지어 볼펜 하나 놓여 있지 않았다. 방 전체가 마치 방금 지워진 칠판 같았다. "이현우 씨."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르며 서류를 내밀었다. 표정에 웃음기가 없었다. 사무적이라기보다는, 무언가를 견디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나는 그때는 그게 뭔지 알지 못했다. "경비 업무 경험은." "편의점 야간 알바 경력은 있습니다." "됐습니다." 말이 짧았다. 질문도 짧았다. 나는 뭔가 더 말해야 할 것 같아서 입을 열었지만, 그녀는 이미 다음 서류를 내밀고 있었다. "여기, 여기, 여기 서명하세요." 서류 세 장이었다. 나는 첫 장을 읽으려 했다. 글자가 빽빽했다. 비밀유지, 손해배상, 그리고 낯선 조항들. '근무 중 발생하는 모든 사고에 대해 회사는 면책된다'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손끝으로 서명란을 톡톡 두드렸다. "시간 없어요. 다음 지원자가 대기 중입니다." 나는 그 말에 이상함을 느꼈어야 했다. 대기실에는 나 말고 아무도 없었으니까. 의자 여섯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지만, 전부 비어 있었다. 다음 지원자라는 사람은 대체 어디 있었던 걸까. 하지만 잔고가 칠만 이천 원인 사람에게 논리는 사치였다. 나는 서명했다. 읽지도 않은 계약서에, 세 번. 볼펜 끝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급여는 매달 25일 입금됩니다. 근무지는 별도 통보하고요. 궁금한 거." 그녀가 말을 끝맺지 않았다. 궁금한 게 있으면 물으라는 건지, 없으면 나가라는 건지 애매한 침묵이었다. 나는 없다고 했다. 사실은 백 가지쯤 있었지만. 면접이 끝나고 나가는 길, 복도에서 스쳐 지나간 남자가 있었다. 회색 근무복을 입은 그가 나를 힐끗 보더니 시선을 피했다. 뭔가 말하려다 참는 듯한 표정.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가 다시 다물어졌다. 나는 그게 뭔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저 낯선 회사에서 마주친 낯선 사람의 습관적인 무관심이라고만 생각했다. 합격 통보는 그날 저녁에 왔다. 채용까지의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빨랐다는 걸, 나는 그때도 그저 운이 좋다고만 생각했다. 오히려 안도했다. 이제 월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 사실 하나에만 매달렸다. 첫 출근일, 나는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유니폼을 다렸다. 검은색 근무복이었다. 다림질을 하면서, 오랜만에 느껴보는 긴장이 손끝까지 전해졌다. 마지막으로 이런 기분을 느낀 게 언제였던가. 아마 첫 오디션을 보러 가던 날이었을 것이다. 그날도 이렇게 옷을 다렸고, 그날의 결과는 처참했다. 이번에는 다르길 바랐다. 배정된 근무지는 시내에서 한 시간 떨어진 산업단지 안쪽, 표지판도 제대로 없는 부지였다. 버스에서 내려 십오 분을 걸어야 했다. 주변에는 다른 공장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지만, 하나같이 셔터가 내려져 있거나 인적이 드물었다. 정문 앞에서 신분증 대조를 받고 들어가자 야트막한 콘크리트 건물 세 동이 나타났다. 창문이 하나도 없는 구조였다. 창문 없는 건물. 그 사실이 뒤늦게 목구멍에 걸렸다. 뭘 감추려고 창문을 다 없앴을까. 그곳에서 나는 박강일을 처음 만났다. 오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어깨가 벌어진 체격에, 눈빛이 유독 날카로웠다. 무장경비대원이라고 했다. 허리춤에 권총이 채워져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이 회사가 단순한 창고 관리업체는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일반 경비업체에서 권총을 소지한다는 건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현우 씨." 그가 내 이름을 확인하듯 되뇌었다. 목소리가 낮고 굵었다. 오랜 세월 명령을 내리는 데 익숙해진 목소리였다. "네." "오늘부터 B동 지하 3층을 맡습니다. 업무는 간단해요." 그는 태블릿 화면을 내게 보여주며 설명을 시작했다. 화면에는 건물 도면이 떠 있었다. 지하 3층 복도, 그리고 그 끝에 표시된 방 하나. "두 시간마다 한 번씩 순찰. 격리구역 앞 복도를 왕복하면서 이상 유무만 확인하면 됩니다. 문은 절대 열지 마세요. 안에 뭐가 있는지 궁금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빈 방 감시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빈 방. 그 단어가 묘하게 힘줘 발음됐다. 마치 스스로에게도 되뇌는 것처럼. "빈 방인데 왜 순찰이 필요합니까." 내 질문에 박강일의 눈이 잠깐 흔들렸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보았다. 그 눈빛 속에서 뭔가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망설임, 그리고 그것을 서둘러 지우는 표정. 마치 하지 말아야 할 생각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규정입니다." 그가 말을 끊었다. "규정에 이유를 묻지 않는 게 이 회사에서 오래 버티는 방법이에요." 그 말투는 조언 같기도 했고 경고 같기도 했다. 나는 더 캐묻지 않았다. 캐물을 처지가 아니었으니까. 통장에 찍힐 숫자를 생각하면, 이유 따위는 사치였다. 박강일은 태블릿을 접으며 덧붙였다. "근무 수칙은 세 가지뿐입니다. 하나, 문을 열지 말 것. 둘, 안에서 나는 소리에 반응하지 말 것. 셋, 이상이 있으면 나한테만 보고할 것. 다른 사람한테는 절대 말하지 말고." "다른 사람이라면." "경찰이든, 소방서든, 심지어 회사 본사든. 나한테만 말해요."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귓가에 남았다. 소리에 반응하지 말라니. 빈 방에서 무슨 소리가 난다는 걸까. 근무 첫날 밤, 나는 지하 3층 복도를 걸으며 그 말을 곱씹었다. 형광등이 일정한 간격으로 깜빡였다. 발소리가 콘크리트 벽에 부딪혀 이상하게 크게 울렸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소리는 벽을 타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나를 따라왔다. 복도는 길었다. 서른 걸음쯤 걸었을까, 끝에 철제 문 하나가 있었고, 그 문에는 작은 명패가 붙어 있었다. B-31. 숫자였다. 이름이 아니라. 이름이 없다는 게 왜 이렇게 마음에 걸렸을까. 물건에는 이름이 필요 없다. 사람에게는 이름이 필요하다. 그 방은 어느 쪽이었을까. 나는 그 앞에서 잠깐 멈췄다.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정해진 순찰 시간까지 아직 여유가 있었다. 문에 귀를 대볼까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그러다 문득 규정이 떠올라 손을 거뒀다. 문 너머에서 아주 희미하게, 뭔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사람의 숨소리 같기도 했고, 뭔가 끌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빈 방이라고 했으니까. 하지만 그 순간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서늘함은, 착각으로 넘기기엔 지나치게 생생했다. 마치 문 너머에서 누군가 나를 마주보고 서 있는 듯한 기분.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시선이 얽히는 듯한 감각. 나는 걸음을 옮겼다. 규정대로, 이유를 묻지 않고. 하지만 발걸음은 평소보다 빨라져 있었다. 두 번째 순찰, 세 번째 순찰. 시간이 지날수록 소리는 잦아드는 것 같기도 했고, 오히려 선명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때마다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빈 방이다. 규정이다. 이유를 묻지 않는다. 그날 밤 근무를 마치고 나오는 길, 박강일이 주차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담배를 태우던 그가 나를 보더니 담배를 발로 비벼 껐다. 담배 연기가 새벽 공기 속으로 흩어지는 걸 보며, 나는 그가 왜 굳이 나를 기다렸는지 궁금했다. "첫날 어땠어요." "조용했습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저 온전한 진실도 아니었을 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덧붙였다. "조용한 게 제일 좋은 겁니다. 여기서는." 그 말에는 뭔가 다른 뜻이 섞여 있었다. 단순한 격려나 안심이 아니라, 경고에 가까운 무게. 나는 그것을 그때는 정확히 읽어내지 못했다. "혹시." 내가 입을 열자 그가 나를 바라봤다.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뭡니까." "안에 사람이 있습니까." 정적이 흘렀다. 박강일의 표정에 아주 짧게, 뭔가가 스쳤다. 놀람인지, 경계인지, 혹은 다른 무엇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는 담배꽁초를 발끝으로 짓이기며 대답했다. "빈 방이라고 했잖아요." 그 대답은 대답이 아니었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더 물었다가는 이 일자리마저 날아갈 것 같은 예감이 들었으니까. 나는 그 말에 담긴 무게를 그때는 알지 못했다. 다만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계속 그 문 너머에서 들렸던 소리를 떠올렸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가로등 불빛이 일정한 간격으로 얼굴을 스쳤다. 착각이라고 몇 번이나 되뇌었지만, 확신은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버스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은 낯설게 굳어 있었다. 칠만 이천 원짜리 절박함으로 시작한 이 일자리가, 어쩌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무언가로 이어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 그 예감을 애써 밀어내며, 나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감은 눈 안쪽에서도, B-31이라는 숫자만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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