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서연은 메시지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손끝이 저릿하게 떨렸다.
'지우가... 여기 있어.'
낫표 속 문장이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화면의 불빛이 어둠 속에서 유독 밝게 느껴졌다. 서연은 이불 속에서 휴대폰을 꽉 쥐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났다.
답장을 보내는 손가락이 자꾸 미끄러졌다. 지우, 라는 이름 세 글자를 입력하는 데도 몇 번이나 오타가 났다. 겨우 412호라고 타이핑해 보냈다. 전송 버튼을 누르는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몇 초 뒤 답이 왔다.
'나 옆동. 잠깐 나올 수 있어?'
서연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소리에 아름이 힐끗 돌아봤지만, 이미 이어폰을 끼고 캔버스에 몰두해 있던 그녀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붓끝이 화면 위를 오가는 소리만 사각사각 들려왔다.
서연은 조심스럽게 겉옷을 걸쳤다. 지퍼를 올리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아름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 어디 가?
—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
목소리가 너무 빨리 나온 것 같아 서연은 스스로도 놀랐다. 아름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캔버스로 시선을 돌렸다. 다행히 별다른 의심은 없어 보였다.
복도는 늦은 시각이라 조용했다. 형광등 불빛이 깜박거리며 벽을 훑었다. 발소리가 유독 크게 울려 서연은 발끝으로 조심스럽게 걸었다. 비상계단 문을 여는 순간 삐걱, 소리가 났다. 심장이 철렁했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마다 차가운 공기가 스며들었다. 건물 뒤편으로 나가는 문을 밀자 밤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서연은 잠시 눈을 감고 숨을 들이켰다.
가로등 아래, 익숙한 실루엣이 서 있었다.
주황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주근깨가 흩어진 얼굴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서연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 서연아.
지우가 먼저 다가와 팔을 벌렸다. 서연은 몇 걸음 만에 그 품에 안겼다. 오랜만에 맞닿은 체온이 낯설고도 익숙했다. 지우의 어깨에 얼굴을 묻자 그동안 참아왔던 긴장이 조금씩 풀어지는 듯했다.
— 진짜... 같은 학교였어?
— 나도 오늘 알았어. 신입생 명단 보다가 네 이름 봤을 때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니까.
지우가 서연의 얼굴을 살피며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 끝에는 걱정이 묻어 있었다. 눈동자가 서연의 얼굴 구석구석을 살피듯 움직였다.
— 얼굴이 많이 상했다. 잠은 제대로 자고 있어?
— ...조금.
— 서연아.
지우가 서연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가만히 감쌌다. 손바닥이 차가웠다. 그 냉기가 오히려 서연의 마음을 진정시켰다.
— 여기서 잘 지내고 있어? 약은 잘 챙겨 먹고?
— 응, 잘 챙기고 있어.
서연이 짧게 대답했다. 지우는 그 대답에 만족하지 못한 듯, 서연의 손목을 가만히 잡았다. 손목을 감싸는 손가락에 미세한 힘이 들어갔다.
— 목소리는 진짜 조심해야 해. 여기 사람들 눈치 빠르잖아.
— 알아.
— 아니, 몰라. 여긴 산골이 아니야.
지우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도시라는 단어를 말할 때 입술이 살짝 떨리는 것이 보였다.
조혜진의 시선이 떠올랐다. 서연은 잠시 머뭇거리다 낮은 목소리로 오늘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욕실에서의 시선, 환영회에서의 질문. 하나씩 말을 꺼낼 때마다 지우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 목욕할 때 그렇게 뚫어지게 봤다고?
— 그냥... 눈이 마주친 것뿐이야.
— 그게 그냥일 것 같아?
지우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서연은 흠칫 놀라 뒤로 반걸음 물러섰다. 그 모습에 지우가 아차 싶은 얼굴로 서연의 손을 다시 잡았다.
— 미안.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 그냥... 걱정돼서 그래.
— 알아.
— 그 조혜진이라는 사람, 완전히 너 의심하는 거잖아.
— 확실친 않아. 그냥... 규칙에 예민한 사람일 수도 있고.
— 서연아.
지우가 서연의 두 손을 감싸 쥐었다. 손바닥의 온도가 그대로 전해졌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온기가 퍼졌다.
— 무슨 일 생기면 무조건 나한테 먼저 말해. 알겠지? 너 혼자 감당하지 마.
그 말에 서연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여섯 해 동안 늘 혼자였던 시간들이 순간 겹쳐 지나갔다. 도망치듯 옮겨 다녔던 마을들, 낯선 이름으로 스스로를 소개해야 했던 밤들. 지우만이 유일하게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아는 사람이었다.
— 넌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
서연이 물었다. 지우는 잠시 시선을 내렸다.
— 너 찾으려고 왔지. 다른 이유가 뭐가 있겠어.
— 그것 때문에 대학까지...
— 뭐, 겸사겸사. 나도 공부는 해야 하잖아.
지우가 가볍게 웃었지만 그 웃음 뒤에 숨은 진심을 서연은 알고 있었다. 6년이라는 시간 동안 지우는 단 한 번도 서연을 놓은 적이 없었다.
— 고마워.
짧은 말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결코 짧지 않았다. 지우는 서연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가만히 맞댔다. 두 사람의 숨결이 가까이서 섞였다.
— 여기서도 내가 지켜줄게. 약속했잖아, 그때.
그때. 산골 마을의 겨울, 얼어붙은 손을 맞잡고 나눴던 약속. 그 기억이 서연의 가슴 깊은 곳에서 다시 살아났다. 손끝이 다 갈라지도록 차가웠던 그날, 지우가 자신의 목도리를 풀어 서연의 목에 감아주며 했던 말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지켜줄게.'
그 말 한마디가 여섯 해를 버티게 한 힘이었다.
두 사람은 잠시 그렇게 서 있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서로의 숨소리만이 밤공기를 채웠다. 지우의 손이 서연의 뺨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손끝이 뺨의 윤곽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 여기, 이성 방문 금지라며. 우리는 어떻게 만나야 하지.
지우가 낮게 웃으며 말했다. 서연도 따라 웃었다. 웃음 속에는 불안과 설렘이 함께 뒤섞여 있었다.
— 방법을 찾아야지. 어떻게든.
— 그래. 어떻게든.
— 밤마다 이렇게 몰래 나올 수는 없잖아.
— 그럼 낮에는? 캠퍼스에서 마주치는 척 하면 되지.
— 그것도 위험해. 조혜진이 눈치가 빠르다며.
지우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궁리하는 얼굴이었다. 서연은 그런 지우의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산골 마을에서도, 낯선 도시로 도망치던 밤에도, 지우는 늘 이런 얼굴로 방법을 찾아냈었다.
— 일단은... 메시지로 연락하고, 진짜 필요할 때만 이렇게 만나자.
— 그래. 그게 안전할 거야.
지우가 서연의 손을 다시 꽉 쥐었다. 그 순간 서연은 처음으로 이 낯선 도시가 조금은 덜 무섭게 느껴졌다. 손을 맞잡은 온기가 몸 전체로 퍼져 나가는 것 같았다.
— 서연아.
— 응?
— 무슨 일이 있어도... 알지?
지우가 말끝을 흐렸다.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아는 것들이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헤어져 각자의 건물로 돌아가려던 그 순간, 비상계단 쪽에서 낯익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또각, 또각.
구두 소리였다. 서연의 등줄기가 얼어붙었다. 지우도 그 소리를 들은 듯 몸이 굳었다.
조혜진이었다. 그녀는 이미 건물 뒤편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고, 서연과 지우가 서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기 직전이었다.
서연은 숨을 삼켰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