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숨긴 몸, 허락된 밤

1화

삼월의 서울은 강원도보다 훨씬 빨리 봄이 왔다. 고속버스 창밖으로 스쳐 가는 가로수마다 여린 초록이 돋아 있었다. 그러나 한서연은 그 온기를 느낄 새가 없었다. 버스가 고속도로를 벗어나 도심으로 들어설 때부터 심장이 조금씩 빨라졌다. 낯선 건물, 낯선 간판, 낯선 사람들의 걸음걸이. 모든 것이 서연을 밀어내는 것 같았다. 터미널에 내려서자 매캐한 매연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산골에서 나던 흙냄새와는 전혀 다른 공기였다. 캐리어 바퀴가 보도블록 틈에 걸릴 때마다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몇 번이나 걸음을 멈추고 지도를 확인했다. 손끝이 떨리는 게 추위 때문인지 다른 이유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청람관 정문 앞에 서서는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건물은 회색 벽돌로 지어진 오층짜리 기숙사였다. 창문마다 커튼 색이 달랐다. 어느 창에는 알록달록한 인형이 매달려 있었고, 어느 창은 텅 비어 있었다. 어디선가 음악 소리가 새어 나왔다. 낮은 베이스음이 벽을 타고 울렸다. 서연은 가방 속 손을 넣어 작은 알약통을 만졌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삼켜온 억제제였다. 뚜껑을 열지도 않았는데 손끝이 이미 차가웠다. '괜찮아. 아무도 몰라.' 낫표 속 문장을 몇 번이고 되뇌며 로비로 들어섰다. 로비는 생각보다 넓었다. 우편함이 벽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게시판에는 신입생 환영회 공지가 붙어 있었다. 접수대 직원이 서류를 내밀었다. 이름, 방 번호, 룸메이트 이름이 순서대로 적혀 있었다. 412호. 윤아름. 서연은 그 이름을 눈으로 몇 번이나 따라 읽었다. 낯선 이름이었다. 낯선 사람과 방을 나눠 써야 한다는 사실이 새삼 무겁게 다가왔다. 엘리베이터는 좁고 낡았다. 문이 닫히는 순간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사층에서 문이 열리자 복도에 낡은 카펫 냄새가 배어 있었다. 복도 끝 방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안에서 시디플레이어 소리가 흘러나왔다. 서연은 캐리어를 세워두고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문을 두드렸다. — 들어와요. 무심한 목소리였다. 서연은 문을 밀고 들어섰다. 방 안은 절반쯤 캔버스와 물감통으로 채워져 있었다. 물감 냄새가 진했다. 창가 침대 위에 보라색 곱슬머리를 늘어뜨린 여자가 앉아 있었다. 은색 테두리 안경 너머로 시선이 서연을 훑었다. 위에서 아래로, 캐리어부터 서연의 얼굴까지. 그 눈빛은 차가웠지만 무례하지는 않았다. — 윤아름이에요. 저쪽이 당신 자리. 손가락으로 창문 반대편 침대를 가리켰다. 이불도 없이 매트리스만 덜렁 놓인 자리였다. 서연은 짐을 내려놓으며 짧게 고개를 숙였다. — 한서연이에요. 잘 부탁해요. 대답 대신 아름은 캔버스로 시선을 돌렸다. 붓끝이 색을 섞는 소리만 방 안을 채웠다. 서연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방 안을 둘러보았다. 벽 한쪽에는 완성된 그림들이 세워져 있었다. 대부분 사람의 형체였지만 얼굴이 없었다. 눈, 코, 입이 뭉개진 자리에 색만 뒤엉켜 있었다. 서연은 그 그림들을 보다가 황급히 시선을 거두었다. 캐리어를 열고 옷가지를 옮기기 시작했다. 손이 떨렸다. 속옷과 브래지어를 옷장 안쪽, 가장 깊은 칸에 밀어 넣었다. 그 위에 두꺼운 니트를 겹겹이 쌓았다. 그리고 그 위에 다시 겨울 외투를 덮었다. 마치 무언가를 파묻는 사람처럼, 손끝이 조급했다. 그때 아름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 되게 조심스럽게 짐 싸시네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서연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옷을 정리하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손등에 식은땀이 배어났다. — 원래... 정리벽이 좀 있어서요. 말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름은 대꾸 없이 다시 캔버스를 바라보았다. 붓이 캔버스를 긁는 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서연은 숨을 몰래 내쉬었다. '들킨 건 아니겠지.' 낫표 속 물음이 가슴을 스쳤다. 옷장 문을 닫는 손끝이 여전히 차가웠다. 서연은 남은 짐을 서둘러 정리했다. 책 몇 권, 필기구, 그리고 협탁 위에 조심스레 올려둔 알약통. 그것만은 눈에 잘 보이는 곳에 두어야 했다. 시간을 놓치면 안 되니까. 짐 정리를 마친 서연은 침대에 걸터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건물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좁았다. 산골에서 보던 하늘과는 전혀 다른 색이었다. 그곳의 하늘은 산등성이를 따라 넓게 펼쳐져 있었는데, 이곳의 하늘은 건물과 건물 사이에 겨우 끼어 있었다. 서연은 그 좁은 틈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 저기. 아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서연은 몸을 살짝 굳혔다. — 저는 밤늦게까지 작업할 때가 많아요. 불빛이 신경 쓰이면 말해줘요. 예상 밖의 말이었다. 서연은 눈을 깜빡였다. 방금까지 무심하던 목소리에 실린 온도가 낯설었다. — 아, 괜찮아요. 저도... 늦게까지 깨어 있는 편이라. — 그래요. 짧은 대답이 오간 뒤 방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붓질 소리와 서연이 짐 정리하며 내는 부스럭거림만이 공기를 채웠다. 서연은 그 침묵이 나쁘지 않다고 느꼈다. 적어도 아름은 캐묻지 않았다. 산골 마을에서는 모두가 서연의 걸음걸이 하나까지 눈여겨보았다. 여기서는 아무도 그러지 않을 것 같은, 얕은 기대가 스쳤다. — 짐 정리 다 했으면, 편의점 위치라도 알려줄까요. 아름이 붓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서연은 고개를 저었다. — 아니요, 괜찮아요. 조금 쉬고 싶어서요. — 그래요. 필요하면 말해요. 아름은 다시 캔버스로 돌아갔다. 서연은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보라색 머리카락이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이상하게 짙어 보였다. 저녁이 되자 복도에서 소란스러운 발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렸다. 신입생들이 삼삼오오 몰려 다니며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누군가는 큰 소리로 이름을 부르고, 누군가는 방문을 두드리며 장난을 쳤다. 서연은 방문을 살짝 열어 바깥을 살폈다. 낯선 얼굴들 사이에서 익숙한 존재를 찾는 눈이었지만, 아직은 보이지 않았다. '지우는 언제 올까.' 낫표 속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가슴 한쪽이 저릿했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게 언제였는지 헤아려보다가 그만두었다. 헤아릴수록 마음이 더 아려왔다. 서연은 문을 닫고 다시 방 안으로 들어섰다. 아름이 여전히 그림에 몰두해 있었다. 캔버스 위에는 얼굴 없는 사람의 실루엣이 번져가고 있었다. 색은 짙은 보라와 회색이 뒤섞여 있었다. 붓이 지나갈 때마다 그 실루엣의 윤곽이 조금씩 흐트러졌다. 서연은 그 그림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무언가 자신과 닮은 느낌이 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얼굴이 없다는 것.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것. 그 모호함이 이상하게도 편안하게 느껴졌다. — 마음에 들어요? 아름이 붓을 쥔 채 물었다. 서연은 흠칫했다. — 아, 그냥... 색이 예뻐서요. — 다들 우울하다고 하던데. 아름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걸렸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서연은 그 웃음이 낯설면서도 어딘가 안심이 되었다. 밤이 깊어지자 복도의 소음도 조금씩 잦아들었다. 아름은 조명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서연도 이불을 덮었다. 어둠 속에서 눈을 감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낯선 천장, 낯선 냄새, 낯선 숨소리. 옆 침대에서 들려오는 아름의 규칙적인 숨소리마저 낯설었다. '여기서도 숨겨야 해. 아무도 알면 안 돼.' 손끝으로 이불깃을 꼭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억제제 알약통이 협탁 위에서 조용히 놓여 있었다. 서연은 어둠 속에서도 그 위치를 가늠할 수 있었다. 손을 뻗어 통을 한 번 더 확인하고서야 눈을 감았다. 통 안에서 알약이 서로 부딪는 작은 소리가 났다.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들이쉬고, 내쉬고. 그 리듬에 맞춰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그러나 낯선 곳에서의 첫밤은 쉽게 잠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복도 저편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처음엔 멀고 희미했던 그 소리가 점점 또렷해졌다. 방문 앞에서 잠시 멈추는 소리. 서연은 눈을 번쩍 떴다. 문 밖에서 낯익은 웃음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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