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다음 날 아침, 서연은 알람보다 먼저 눈을 떴다. 창밖은 아직 푸르스름했다. 새벽 공기가 창틀 사이로 스며들어와 방 안을 차갑게 식히고 있었다. 아름의 침대는 비어 있었다. 이불이 단정하게 정리된 걸 보니 이미 나간 모양이었다. 서연은 잠시 그 빈자리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방 안은 조용했다. 낯선 벽지, 낯선 책상, 낯선 냄새. 산골 집과는 다른 공기였다. 서연은 그 낯섦이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무도 자신을 알지 못하는 곳. 하지만 그 편안함 뒤에는 언제나 다른 감정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협탁 위 알약통을 열었다. 손끝으로 하나를 집어 삼켰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익숙한 씁쓸함. 그 감각이 오늘도 무사히 지나갈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서연은 물컵을 내려놓으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낯빛이 창백했다. 어젯밤 제대로 자지 못한 탓이었다.
'괜찮아. 오늘도 잘 넘길 수 있어.'
수건과 세면도구를 챙겨 방을 나섰다. 복도는 아직 인기척이 드물었다. 몇몇 방문 아래로 불빛이 새어 나오긴 했지만, 대부분은 조용했다. 공용 욕실은 복도 끝, 여러 개의 샤워칸과 세면대가 나란히 놓인 넓은 공간이었다. 타일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가 발끝을 스쳤다. 이른 시간이라 인기척이 없었다. 서연은 안도하며 가장 안쪽 칸으로 들어갔다.
철컥. 잠금장치를 걸었다.
옷을 벗는 손이 조심스러웠다. 상반신을 가리는 압박 브라를 벗겨내는 순간, 어깨가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여섯 해 동안 익숙해진 동작이었지만 여전히 낯선 곳에서는 긴장이 배가되었다. 손끝이 잠금장치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딸깍. 이상 없음을 확인한 뒤에야 몸을 완전히 풀었다.
따뜻한 물이 어깨를 타고 흘렀다. 눈을 감고 잠시 그 감각에 몸을 맡겼다. 산골 집의 낡은 욕조와는 다른 세계였다. 물줄기의 세기도, 온도의 균일함도, 이곳이 얼마나 다른 곳인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아무도 자신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안심이 되기도 했고, 동시에 불안하기도 했다. 익명성은 방패였지만, 동시에 언제 벗겨질지 모르는 얇은 막이었다.
그때 밖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또각또각. 슬리퍼 소리가 다가왔다. 서연은 몸을 움츠리며 물소리를 조절했다. 옆 칸으로 누군가 들어가는 소리, 그리고 또 다른 발소리가 이어졌다. 세면대 물이 흐르는 소리, 칫솔질 소리, 그 사이로 두 사람의 대화가 섞여 들려왔다.
— 신입생들 들어왔대. 몇 명이나 왔대?
— 몰라. 근데 412호에 진짜 조용한 애 왔다더라.
서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물소리를 조금 더 세게 틀었다. 손이 수도꼭지를 붙잡은 채 미세하게 떨렸다. 대화 소리가 웅웅거리며 사라졌다가 다시 가까워졌다 했다.
— 412호? 아, 그 방 원래 아름이 있던 방 아니야?
— 맞아. 룸메이트 새로 왔나 보지.
— 근데 그 애 목소리 되게 낮지 않았어? 어제 인사할 때.
숨이 멈췄다. 서연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들었나. 목소리를...' 낫표 속 문장이 심장을 옥죄었다. 물줄기가 등을 타고 흐르는 것도 잊은 채, 서연은 그대로 굳어 있었다. 몸이 차갑게 식어가는 것 같았다. 뜨거운 물속에서도 오한이 들었다.
— 아, 그건 원래 저음인가 보지. 신경 쓰지 마.
다른 목소리가 무심하게 대꾸했다. 대화는 그대로 흘러가 버렸다. 이어서 화장품 이야기, 어제 오리엔테이션에서 만난 선배 이야기로 넘어갔다. 서연은 벽에 이마를 기댔다. 물줄기가 이마 위로 쏟아졌다. 안도와 불안이 동시에 몸을 훑고 지나갔다.
'조심해야 해. 더, 더 조심해야 해.'
발소리가 멀어지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서연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후우—. 물속에서 손바닥을 펴 보았다.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샤워를 마치고 수건으로 몸을 감쌀 때,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옷을 다시 갖춰 입는 과정 하나하나가 평소보다 오래 걸렸다. 문을 열기 전, 밖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조용했다. 안심하며 문을 열었다.
세면대 앞에 낯선 여자가 서 있었다. 짧은 머리에 날카로운 눈매, 자세가 곧고 단정했다. 마치 오랫동안 훈련받은 사람처럼 등이 곧게 펴져 있었다. 서연을 발견한 여자의 시선이 아래에서 위로, 천천히 훑고 지나갔다.
— 처음 뵈네요. 신입생?
목소리가 낮고 단조로웠다. 서연은 수건을 몸에 더 세게 감싸며 고개를 끄덕였다.
— 네, 412호에... 한서연이에요.
— 조혜진이에요. 청람관 자치위원회 회장.
여자는 짧게 자신을 소개하고는 다시 세면대로 시선을 돌렸다. 손목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는 동작이 무심하면서도 절도 있었다. 그러나 다음 말이 서연의 발목을 붙잡았다.
— 여기 규칙 잘 알아둬요. 특히 이성 방문 금지. 위반하면 즉시 퇴사 조치니까.
— ...네.
— 그리고 밤 열두 시 이후엔 소등. 소음도 최소화해야 해요. 여긴 다들 예민한 사람들이 많아서.
서연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조혜진의 시선이 다시 한번 서연의 손목, 목선, 그리고 걸음걸이를 훑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서연은 그 시선의 무게를 온몸으로 느꼈다. 마치 저울 위에 올려진 것 같았다. 무엇을 재고 있는지 알 수 없어서 더 불안했다.
— 아, 그리고.
조혜진이 걸음을 옮기려다 다시 돌아섰다.
— 오늘 저녁에 환영회 있어요. 얼굴 비추는 게 좋을 거예요. 여긴... 눈에 띄지 않는 게 오히려 더 눈에 띄는 곳이라서.
말을 마친 조혜진은 더는 눈길을 주지 않고 욕실을 나섰다. 슬리퍼 소리가 복도를 따라 멀어졌다. 서연은 그 자리에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눈에 띄지 않는 게 오히려 눈에 띈다는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방으로 돌아온 서연은 문을 닫고서야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등에 식은땀이 배어 있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수건으로 머리를 감쌌다. 창밖은 어느새 완전히 밝아져 있었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었어.'
낫표 속 위로도 심장의 두근거림을 완전히 가라앉히지는 못했다. 서연은 협탁 위 알약통을 다시 만지며 손끝의 떨림을 겨우 눌러 앉혔다. 통 뚜껑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그 반복적인 동작이 마치 스스로를 다잡는 의식처럼 느껴졌다.
오전 시간은 그렇게 지나갔다. 서연은 짐을 풀며 방을 정리했다. 몇 벌의 옷, 몇 권의 책, 그리고 낡은 사진 한 장. 산골 집 마당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서연은 그 사진을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다.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흔적이었다.
오후가 되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안내문이 각 방에 배부되었다. 강당 집합, 학과 배정, 그리고 저녁에는 기숙사 자치위원회 주최 환영회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안내문 하단에는 굵은 글씨로 '전원 참석 필수'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서연은 그 문구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눈에 띄지 않는 게 오히려 눈에 띈다던 조혜진의 말이 그 위에 겹쳐졌다.
서연은 안내문을 접어 책상 위에 올려두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운동장에서 신입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웃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서연은 그 풍경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자신도 저 속에 섞여 들어갈 수 있을지, 아니면 언제까지고 창문 너머에서만 지켜봐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복도에서 누군가 다급하게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쿵쿵쿵. 발소리는 점점 더 커지며 정확히 이 방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서연은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문이 벌컥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