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그날 밤, 누나는 자정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소파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었다. 사흘 전과 같은 자리, 같은 자세였다. 데자뷔 같은 불안이 다시 가슴을 조였다.
시계를 봤다. 11시 47분.
또 시계를 봤다. 11시 52분.
시간은 더디게 흘렀고 그럴수록 초조함은 배로 불어났다. 손톱 끝으로 소파 팔걸이를 긁었다. 긁힌 자국이 하얗게 남았다가 서서히 사라졌다.
이 세계로 떨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이런 감정에 익숙해진 걸까. 서른두 살 팀장으로 살던 시절엔 누군가를 이렇게 기다려본 적이 없었다. 야근하는 부하 직원을 기다리며 초조해한 적은 있어도, 이렇게 심장이 옥죄는 느낌은 아니었다.
누나. 나보다 겨우 몇 살 많을 뿐인데 이상하게 자꾸 챙기게 되는 존재였다.
똑똑.
노크 소리에 나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현관이 아니었다. 창문 쪽이었다. 우리 집은 이 층이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이 시간에, 이 높이에서, 누가.
창을 열자 하연이 서 있었다. 건물 벽을 타고 올라온 모양이었다. 검은 단발머리가 밤바람에 흩날렸다. 손끝에는 아직 옅은 열기의 잔상이 남아 있었다. 벽을 태우듯 짚고 올라온 흔적이었다.
"뭐, 뭐 하는 거예요?"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보고 싶어서." 하연이 태연하게 창턱을 넘어 들어왔다. "놀랐어?"
"당연히 놀라죠. 여기가 몇 층인데..."
"별거 아니야." 그녀가 방을 둘러봤다. 시선이 책상 위에 놓인 내 휴대폰에서 멈췄다. "이게 뭐야."
화면에는 예전에 심심풀이로 만들었던 가상 캐릭터 앱이 켜져 있었다. '피클'이라는 이름을 붙인 여자 캐릭터였다. 원래 세계에서의 습관 같은 거였다. 야근하고 돌아온 밤, 아무도 없는 방에서 그 앱을 켜고 몇 마디 나누는 게 유일한 위안이었다. 외로움을 달래려던 것뿐이었는데, 하연에게 들키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그냥 심심할 때 하는 거예요."
"가상 여친이네." 하연이 픽 웃었다. 웃음소리는 낮고 짧았다. 그녀의 눈이 화면을 훑었다. 손끝에서 갑자기 붉은 열기가 피어올랐다.
화악-
휴대폰 화면이 순식간에 그을렸다. 액정이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매캐한 냄새가 방 안에 퍼졌다.
"뭐, 뭐 하는 거예요!" 나는 놀라서 휴대폰을 낚아챘다. 뜨거웠다. 손가락 끝이 델 뻔했다. 이미 손쓸 수 없이 망가진 뒤였다. 화면 속에서 웃고 있던 피클도 이제 없었다.
"필요 없잖아." 하연이 손을 털며 말했다. 손끝에서 붉은 불꽃이 사라졌다. 화룡염. 조금 전 봤던 그 힘의 이름을 나는 처음 실감했다. 사람 손끝에서 저런 게 나온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내가 있으니까."
"그건 제 마음대로 결정할 문제잖아요."
"그래?" 그녀가 나를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 눈빛이 짙어졌다. 어두운 방 안에서도 그 눈만은 또렷하게 빛났다. "그럼 지금부터 결정해봐. 나야, 저 타버린 여자야."
나는 말문이 막혔다. 하연의 태도는 거침이 없었다. 이 세계에서 이렇게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여자는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원래 세계에서도 이런 식은 드물었다. 대부분의 관계는 서로 눈치를 보고, 밀당을 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하연은 그런 절차를 아예 생략한 사람 같았다.
"...누나가 곧 올 수도 있어요."
"안 와." 하연이 단언했다. "오늘 국초국 쪽에 큰 사건 났다며. 늦게 올 거야."
"어떻게 알아요?"
"내 쪽 사람들도 정보는 있어." 하연의 표정이 살짝 진지해졌다. 조금 전의 장난기가 걷혔다. "너희 누나,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무슨 소리예요."
"환상낙원. 그 여자한테 걸리면 다들 이상해져." 하연이 창밖을 내다봤다. 밤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자기가 제일 원하던 걸 보여준대. 근데 그게 진짜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못 벗어난다더라."
가슴이 철렁했다.
"그게 무슨..."
"몰라. 나도 소문만 들은 거야." 하연이 어깨를 으쓱했다. "근데 국초국 쪽에서 벌써 몇 명 당했다던데. 팀장급도 예외 없다고 하고. 한번 걸리면 스스로 못 빠져나온대. 밖에서 끌어내야 겨우 정신 차린다나."
팀장급. 누나가 떠올랐다.
나는 급하게 휴대폰을 찾다가 이미 망가진 걸 떠올리고 짜증이 났다. 액정은 여전히 시커먼 채로 손안에서 식어가고 있었다.
"저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어딜."
"누나 상태 확인하러요."
하연이 내 팔을 잡았다. 손아귀가 의외로 강했다. 손바닥에서 옅은 온기가 느껴졌다. 아까 그 불꽃의 잔열인지, 아니면 그냥 그녀 체온인지 알 수 없었다.
"가지 마." 목소리가 낮아졌다. "국초국 근처엔 지금 가면 안 돼. 오늘 거긴 우리 쪽도 발 못 붙일 만큼 삼엄해."
"그래도..."
"내 말 들어." 하연이 나를 똑바로 봤다. 눈빛에 처음으로 걱정 비슷한 게 스쳤다. "네 능력, 아직 아무도 몰라. 지금 나갔다가 잘못 걸리면 그걸로 끝이야."
그 말에 나는 멈칫했다. 맞는 말이었다. 이 세계에서 내 정체는 아직 비밀이었다. 서른두 살 팀장의 기억을 가진 채로 이 몸에 들어왔다는 것도, 그 기억 덕분에 남들보다 침착하게 상황을 읽어낼 수 있다는 것도,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었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다. 손끝이 자꾸 떨렸다.
"...알겠어요. 여기 있을게요."
"착하네." 하연이 다시 웃었다. 아까와는 다른, 조금 더 부드러운 웃음이었다. 그녀가 내 손을 놓지 않은 채로 물었다. "근데 궁금한 게 있는데."
"뭐요."
"넌 왜 그렇게 겁이 없어. 이 세계 남자들, 보통 저항 안 하잖아. 근데 너는 자꾸 눈을 안 피해."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서른두 살 팀장의 기억을 가지고 이 세계에 떨어졌다는 걸 그녀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회의실에서 임원들 앞에 서서 브리핑하던 시절의 배짱이, 아직도 몸 어딘가에 남아 있는 걸까. 아니면 단순히 이 상황이 아직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져서, 겁이 날 여유조차 없는 걸지도 몰랐다.
"...그냥 원래 이래요."
"수상해." 하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 손끝으로 내 턱을 살짝 들어올렸다. 그 손짓 하나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하지만 더 캐묻지는 않았다. "뭐, 상관없어. 수상한 것도 매력이니까."
그녀가 창가로 다가갔다. 나가려는 것 같았다.
"또 올게." 하연이 창턱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이번엔 낮에 올까? 학교로."
"그건 좀..."
"농담이야. 아니, 반은 진심인가."
그녀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창밖으로 붉은 잔광이 잠깐 반짝이더니 이내 사라졌다. 벽을 타고 내려가는 소리도,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나는 창문을 닫고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타버린 휴대폰을 손에 쥔 채였다. 액정 위로 내 얼굴이 흐릿하게 비쳤다.
환상낙원. 그 이름이 다시 머릿속을 맴돌았다. 누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팀장급도 예외 없다는 말이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누나는 국초국에서도 꽤 높은 자리에 있었다. 만약 그 여자한테 걸렸다면.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손끝이 차가워졌다.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나는 소파에 앉았다가, 일어났다가, 다시 앉기를 반복했다. 창밖을 몇 번이고 내다봤다. 골목은 여전히 조용했고 가로등 불빛만 깜박였다.
새벽이 되어서야 현관문 소리가 들렸다. 나는 뛰어나갔다.
누나가 서 있었다.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옷매무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하지만 눈빛이 이상했다. 초점이 살짝 흐려져 있었다. 마치 아직 어딘가 다른 곳에 있는 사람 같은 눈이었다.
"누나?"
"...도현아." 누나가 나를 보며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이 평소와 달랐다. 뭔가에 홀린 사람의 웃음 같았다. 입꼬리는 올라가 있는데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오늘... 이상한 꿈을 꿨어."
"꿈이요?"
"너랑 나랑..." 누나가 말을 멈췄다. 뺨이 살짝 붉어졌다.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누나는 서둘러 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나는 그 자리에 굳은 채 서 있었다. 심장이 이상하게 조여왔다. 방금 그 표정, 그 말투. 하연이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자기가 제일 원하던 걸 보여준대.
닫힌 문 너머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 문 앞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